다양한 가능성을 숙고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4년 8월 27일)
오늘의 화두는 다양성이다. 프랑스어 디베르시떼(diversite)라고 한다. 프랑스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단어이고,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즐겨 읽는 <장은수의 책과 미래>라는 칼럼의 제목이 “내다 보는 눈과 열린 귀”이다. 그가 소개한 토머스 서든도프 호주 퀸즐랜드대 교수의 <<시간의 지배자>>(디플롯 펴냄)에 따르면, “미래를 내다보는 힘은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다. 예지력이 없다면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지도, 그에 따른 기회와 위험을 사전에 대비하지도 못한다. 내일을 모르는 삶, 전면적 불확실성은 끔찍한 지옥과 같다. 무엇이 최선인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시간을 지배하려면 예지를 올바로 쓰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 출발은 겸손이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확실한 미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플랜 B를 생각지 않는 인생은 아주 작은 변화에도 파멸할 수 있다. 자기 패를 과신하는 도박꾼들이 항상 파산하듯이 말이다. “인간은 최선을 희망하지만, 최악을 준비하는” 존재여야 한다. 미래가 내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숙고할 때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유연하고 개방적인 인지 장치라는 거다. 가령 출신과 신분과 성향이 각각 다르고 다양한 이들이 한 팀을 이루어 미래를 내다보면 예측력이 좋아진다. 그리고 오늘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이 왕정이나 귀족정보다 민주 정치가, 온갖 사람이 모여드는 도시가, 그 중에서도 다민족, 다인종 공동체가 더 창조적인 이유라는 점이다. 다른 목소리의 존재는 시간의 흐릿한 지평선에서 기대를 보완해 우리가 미지를 더 잘 다루게 이끈다. 여기서 일어나는 “내다보는 눈은 열린 귀”와 짝을 이룰 때 비로소 온전히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하늘의 별이나 바람의 움직임을 보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신들의 지식을 추출하는 일”이라고 키케로가 말했다. 인류는 진화의 길 위에서 “마음의 눈으로 시간을 가로지르는 놀라운 힘”을 얻었다. 그 힘을 상징하는 존재가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보는 자’란 뜻이다. 그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불은 마음의 안개를 밝히고 앞날의 어둠을 거두는 불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티탄족으로 동생 에피메테우스와 아틀라스를 둔 장남이다.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름은 ‘먼저 아는 자’란 뜻이고,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아는 자’란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머릿말을 ‘프롤로그’라고 하고, 편집 후기를 ‘에필로그’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의 미래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바로 아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신들의 전쟁’에서 제우스 편을 들고, 아틀라스는 자신들의 조상들인 티탄 족 편을 들어, 지구를 받치는 형벌을 받았고,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지배하는 올림포스로 초대받는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과 식물들을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러니까 신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을 창조한 사람이 프로메테우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모습을 본 따 인간을 만들었다. 그때 프로메테우스의 과업을 축하하기 위해 제우스를 비롯한 모든 신들이 프로메테우스의 피조물들에게 선물을 보내왔는데 그만 ‘멍청한’ 동생 에피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줄 선물을 남겨두지 않고 몽땅 나눠줘 버린 것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 불을 훔쳐다 준다. 인간에게 이 불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불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몸을 따뜻하게 하고 고기를 잘라 구워 먹고 삶아 먹는 조리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두운 밤에도 불 때문에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 프로메테우스 덕분에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된다. 유인원과 현생 인류의 중간 단계에 속하는 화석 인류를 이렇게 말한다.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녔으며, 석기와 불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이 불은 진화를 거듭 한다. 티탄 시대의 헬리오스(티탄 시대의 태양)의 ‘태양 마차’의 불은 하늘에서 땅을 비출 뿐이었다. 그러나 이 불이 헤스티아(로마 식으로는 베스타)의 부엌의 화로, 헤파이스토스(대장간의 신)의 대장간의 불로 그리고 아폴론의 ‘포에보스’로 진화하였다.
헤스티아의 불은 ‘생존의 불’이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데에 필요한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에 쓰이는 불이다. 따뜻하게 살고, 음식을 익혀 먹고, 어둠을 밝히는 1차원적인 불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 불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들은 먹고 사는 일에만 만족할 수 없었다. 마치 우리가 술도 단지 배고파서 마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두 번째로 헤파이스토스의 불은 ‘변화의 불’이다.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의 불은 쇠를 녹여 도구를 만들어냈다. 인간은 이 도구를 이용해서 땅을 갈고 농사를 지었다. 세상을 바꾸는 2차원적인 불이 되었다. 그러면서 불의 강도는 더 세어져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온도에서 쇠를 달굴 뿐만 아니라 세상을 태워버릴 거대한 불로 진화하였다. 불이 갖는 양면성이 드러난다. 불로 쇠를 적당히 달구면 단단한 도구가 되지만, 불의 강도를 너무 세게 하면 모든 것이 다 타버린다. 이와 같이 술이 갖는 양면성도 이 불 때문이다. 술도 적당히 마시면 우리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데, 지나치게 마시면 몸을 헤치게 한다.
이러한 불이 그 다음 단계로 진화한 것이 아폴론의 불이다. 우리는 이 불을 ‘생각의 불’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아폴론은 의술의 신, 음악과 예술의 신, 예언의 신으로 ‘팔방미인의 황태자’였다. 그러면서 태양의 신으로 밝은 이성을 상징하는 잘 생긴 신으로 그리스의 모든 젊은이들이 닮고 싶어했던 신이었다. 아폴론이 갖게 된 불은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의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이다. 구체적인 일상의 삶에서 인간이 지혜로워져 추상의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인간이 사유 하기 시작하며,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몸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나 추상적인 생각을 하며, 차가운 머리로 사유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인간은 머리가 커졌고, 육체의 힘을 잃어가고 감각이 무디어 갔다.
이러한 추상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 ‘진짜’ 인간적인, 문명의 세계로 넘어가는 지점에서 ‘불’이 ‘물’을 만난다. 이 때 등장하는 신이 포도주의 신, 아니 술의 신 디오니소스이다. 불이 물을 만나야 불이 완성된다. 이때부터 인간은 신으로부터 벗어난다. 신이 주는 것만으로 기뻐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예-술해서’ 행복해 하게 된다. 이때부터 진정한 문명이 시작하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말에서 ‘명’자가 물과 불, 달과 해가 만난 단어인 것처럼. 이제 프로메테우스 신으로부터 훔쳐 온 불이 아폴론에게 이른 다음 디오니소스를 만나 술이 되면서 불은 완성된다. 그러자 인간은 술을 알게 되면서, 신에게 올리는 경배를 게을리하고, 신에게 감히 덤비게 된다. 그래서 신들은 불을 훔쳐간 프로메테우스를 미워했던 것 같다.
지금부터는 신들이 불을 훔쳐간 프로메테우스와 그 불을 덥석 받은 인간에게 내리는 형벌들도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받은 형벌은 신은 죽지 않으니, 고통을 주는 것으로 코카서스 높은 절벽에 묶여 날마다 찾아오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것이었다. 그를 더 아프게 했던 것은 날마다 간이 다시 재생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살이 찢기는 아픔보다 다시 살아나는 간이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제우스가 자신의 미래를 알려 달라는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우라노스와 아버지 크로노스가 그랬던 것처럼, 제우스도 언젠 가는 권좌에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문제는 프로메테우스만이 제우스의 앞날을 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불의와 타협하고, 유혹을 견디지 못해 정의를 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치에 따라 당연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으니 인간은 존재해야 하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지명되었으니 인간은 다른 생명체보다 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프로메테우스는 ‘정의의 화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프로메티안(Promethean)’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이 말은 ‘프로메테우스 같은’이란 말로 ‘개인적이고 독창적이며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사전에 쓰여있다. 다시 말하면 프로메티안이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정의로움을 지키며 인류에게도 도움을 주는 현자’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제우스가 불을 숨겼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정의가 실현되기 전에 불의가 일어난 것들을 우리는 간과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할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에 어떤 보상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 길을 선택했다. 우리는 그 용기의 밑바닥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았다. 그는 완벽하지 못한 인간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조건 없는 사랑만이 정의를 이룬다. 사랑은 남을 나처럼 생각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조건이 없다. 조건을 달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다른 이로부터 대접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해주는 것이라면, 정의는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이 싫어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사랑도 남의 입장에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랑과 정의는 한 축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사랑과 정의 중에서 우선 해야 하는 것은 정의이다.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하면 당장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
물론 정의는 말처럼 쉽지 않다. 자신의 힘겨운 삶을 통해 싸워야만 쟁취할 수 있다. 정의를 외면하게 하는 세속의 유혹이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 유혹은 정의로운 삶보다 효율적인 삶을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의 실현은 자신의 인생을 걸 만큼 힘겨운 투쟁이 필요하다.
이 힘겨운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으면서,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제우스가 고의로 불을 숨겼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정의가 실현되기 전에 불의가 일어난 것들을 우리는 간과한다.
제우스는 불이라는 문명 창조의 도구를 독점함으로써 인간에게 ‘신을 닮아 갈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이에 비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압제 하며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인간 스스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우스는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원천인 불을 숨김으로써 인간의 자율성을 가로막으려 했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과 ‘스스로 문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줌으로써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결점을 스스로 극복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정의는 인간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과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본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왜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받는가? 프로메테우스는 이름처럼 남보다 먼저 생각하여, 먼저 깨어난 자이다. 먼저 깨달은 자로 그는 우리 인간에게 불 그 자체만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할 수 있는 지혜, 즉 이성을 주었다.
세상은 위험한 진실보다 안전한 거짓의 편에 서라고 충동 한다. 제우스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간을 원했고, 프로메테우스는 힘들더라도 제 머리로 생각하는 인간,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을 원했다. 불의와의 끊임없는 결투를 통해서만 정의로움의 감각은 단단히 담금질 된다. 정의와 정의감은 다르다. 정의감이 있어도 정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불의와 타협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정의감을 간직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만큼 고통을 겼어야 한다.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배운다.
이야기 다른 길로 샜다. 물론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다. 과식은 성인병을 부르는 걸 빤히 알면서도, 먹을 걸 보면 일단 손을 뻗는다. 비극 작품엔 신들의 지식을 무시하는 인간의 오만과 미망, 도전과 파멸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 이야기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 못 다한 ‘다양성’ 이야기는 계속된다. 특히 이 문제는 2024년 프랑스 올림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랑 그대로의 사랑으로 / 홍수희
준다의 미래형이 받는다 였던가
준다의 미래형이 되돌려 받는다 였던가
준다의 미래형이 언젠가는 세상을 돌고 돌아
나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거였던가
아니 아니다
내가 아주 조금 인생을 살아보니
준다의 미래형은 잊는다였다
그리하여 준다의 완성형은 잊힌다였다
그때 비로소
준다의 과거형은 순백의 사랑이 되리
사랑 그대로의 사랑이 되리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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