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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6일 화요일

“박근혜 4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제7화] “박근혜 4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마지막회] 독재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면 충분하다
정운현 | 2016-12-07 10:00:2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소설 ‘혜주’는 경주 인근의 한 종갓집 고택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시작한다. 이 집안의 장손인 송 선생은 폭우가 쏟아진 어느 여름날 제각(祭閣) 서실에 비가 새는 지를 살피러 갔다가 오래된 비밀기록을 우연히 접하게 된다. 이 비록(秘錄)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빠진 ‘혜주’라는 여왕의 존재와 그를 둘러싼 한 시대사가 기록돼 있었다. 이를 접한 역사학자는 “역사교과서를 새로 써야할 내용”이라며 흥분하였고,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세상에 처음 공개됐다. 물론 이 내용은 순전히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다.
 혜주의 ‘비록’이 발견된 제각. 사진은 진주 강씨 종중 제각
여왕 혜주는 폭정을 견디다 못한 신하들에 의해 재위 4년차에 탄핵을 당했다. 임시조회에서 신하들은 혜주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로부터 3일 뒤 혜주는 자신의 생모이자 측근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민 상궁에게 자결할 것을 명한 뒤 그 자신 역시 민 상궁을 따라 자결하였다. 이로써 혜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후임으로 덕종시대가 열렸다. 덕종은 즉위 당시 12세여서 3정승이 3년간 수렴청정을 하기로 했다. 당시 영의정은 혜주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 북파의 수장 김성조였다.
하루는 영의정 김성조가 좌의정 윤상과 우의정 김병돈을 집으로 초대했다. 세 사람 모두 거사에 일등공신들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난 후 김성조가 얘기를 꺼냈다.
“다름 아니라 폐주(혜주) 얘깁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런 군주가 나왔는지 저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개국 이래 첫 여왕이라고 해서 백성들도 기대를 한껏 걸지 않았던가요? 우리 신료들도 그랬고요. 조금만 잘 했어도 역사에 길이 남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자 좌의정 윤상이 맞장구를 치며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여왕에 대해 누가 큰 기대까지는 걸었겠습니까? 그저 여왕이니까 부덕(婦德)의 가치를 국정에 반영해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국정을 펼 줄 알았더니 이건 남자 임금들보다 더했으니 말입니다. 단설형(斷舌刑)은 두고두고 역사에 오명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우의정 김병돈이라고 빠질 수 없었다.
“오기와 독선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게 무능한 임금은 또 처음 봤습니다. 본인이 잘 모르면 신료들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면 될 텐데 침전에서 혼자 모든 걸 처리하려니 무리수가 따르는 건 당연지사지요. 솔직히 말해 폐주가 군사(軍事)를 알겠습니까? 외교를 알겠습니까? 기껏해야 문고리 권력인 우별직 노천과 좌별직 무극, 그리고 민 상궁의 치마폭에 놀아난 꼴이니 주변사람을 잘못 쓴 것도 다 폐주 자신의 책임이지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김성조가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하는 얘깁니다만, 폐주 시대를 역사에서 아예 깨끗하게 지워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번 해봤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폐주시대는 너무도 치욕스럽습니다. 우리도 조정에서 같이 정사를 봤습니다만, 그때를 생각하면 저는 지금도 잠이 잘 오질 않습니다. 폐주의 갖가지 실정(失政)을 전부 다 기록할 수도 없을뿐더러 기록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선뜻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좌의정 윤상이 김성조를 거들고 나섰다. “실록에서 폐주를 지우는 문제는 한번 토론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윤상이 김성조 쪽으로 의견이 쏠리는 듯하자 김병돈도 말투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습죠. 언제 기회가 되면 다른 신료들과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한번 토론해보시죠.”
김성조는 오늘은 이 정도로 바람을 잡는 선에서 끝내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편전을 담당하던 사관(史官) 박성식의 집에 간밤에 불이나 일가족 넷이 모두 불에 타죽고 그 바람에 사초(史草)도 전부 다 소실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황으로 봐 누군가 고의로 불을 낸 것이 분명했다. 혜주는 평소 사관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편전 사관이 가진 사초가 거의 유일한 것이었다. 이것이 불타버렸기 때문에 혜주 실록은 사실상 집필이 불가능하게 됐다. 3정승은 임금을 찾아가 화재소식을 아뢰고는 방책을 찾아보겠노라고 고했다.
며칠 뒤 춘추관에서 실록청(實錄廳) 구성에 관한 안이 의정부에 제출됐다. 임금이 죽고 나면 실록청을 세워 선대 임금의 실록을 펴내는 것이 관례였다. 3정승은 모두 실록청의 최고 책임자를 겸하고 있었다. 실록 편찬을 위한 회의에서 3정승은 사초 화재사고를 이유로 혜주 실록 편찬을 반대하였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 실록청 설치는 하지 않는 것으로 잠정 결정이 됐다. 3정승은 임금을 찾아가 회의결과를 보고하고는 임금의 윤허를 받아냈다.
 조선왕조실록 실물 사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김성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혜주 관련 기록 말살작업에 나섰다. 그는 어명을 빙자하여 폐주 관련 기록을 남기거나 입에 올리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로써 궐 안팎의 혜주 관련 기록은 전부 불태워졌다. 아울러 향후 폐주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자는 그 형태에 관계없이 엄벌에 처하겠다고 공표했다. 사상 유례 없는 역사말살 행위였다.
얼마 뒤 김성조는 승지 김인겸을 불러 실록청 실무자 가운데 얘기가 통할만한 사람을 하나 물색해보라고 지시했다. 며칠 뒤 김인겸은 예문관 봉교 송문수를 소개했다. 김성조는 송문수에게 혜주의 재위 4년을 선왕 광조(光祖)의 재위기간에 넣어 광조의 재위기간을 20년에서 24년으로 늘리라고 지시했다. 혜주는 혜명공주로 있다가 광조가 승하한 그 해 돌연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라고 했다. 또 광조의 실록 4년을 추가로 재구성하되 혜주 관련 내용은 모두 빼라고 지시했다. 송문수는 근 여섯 달에 걸쳐 비밀리에 이 작업을 마무리 했다.
작업이 끝난 후 송문수는 승승장구하여 홍문관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본디 송문수는 사관으로서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영의정 김성조의 지시로 혜주 역사 말살작업을 맡게 됐다. 이후 그는 자신의 행동에 큰 회의를 갖게 됐다. 비록 임금의 윤허를 받은 일이라고는 하나 역사 말살은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는 이런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극비리에 혜주시대를 기록한 소책자를 만든 그는 임종을 앞두고 장남에게 “은밀히 보관했다가 400년이 지난 후에 공개하라”고 유언했다. 이것이 바로 ‘비록(秘錄)’이다.
이는 소설에서나 가능한 얘기일 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그러나 영의정 김성조가 혜주시대를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던 것은 “폐주시대는 너무도 치욕스러운데다 폐주의 갖가지 실정을 전부 다 기록할 수도 없을뿐더러 기록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의정 김병돈이 “후세에 교훈으로 삼을 폭군은 연산주 하나로도 족하다”고 한 말도 흘려들을 얘기는 아니다.
국정원 대선개입 등 부정선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된 후 일말의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2007년 대선 당시에도 진보여성계 일각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을 기대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는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거는 세간의 기대가 적지 않았음을 말한다. (물론 지난 대선 당시 심리학자 황상민 교수는 박 대통령을 두고 “생식기만 여성”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은 전부 남성이었다. 남북 대치상황에서 여성 대통령이 안보 문제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일말의 우려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보수는 안보에 강하다’는 속설에 묻히고 말았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측에서 내건
‘준비된 여성대통령’ 슬로건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준비된 여성대통령’ ‘국민대통합을 이룰 대통령’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6년 가까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고, 1998년 정계에 입문한 이래 근 15년 가까이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니 그만하면 일견 ‘준비된 대통령’으로 볼만도 했다. 게다가 여성으로서의 포용력과 부드러움으로 지역, 계층 등으로 사분오열된 국민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특히 대선 과정에서 그는 ‘호남총리론’을 내걸며 영호남 지역갈등 및 지역격차 해소를 표방했다.
그러나 이는 전부 말뿐이었다. 대선 때 내건 주요 대선공약 가운데 제대로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해명이나 사과 한 마디도 없었다. 한 마디로 안하무인이었다. 게다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독선과 아집으로 남용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비리나 무자격 등으로 논란이 인사들을 보란 듯이 고위직에 임명하였다. 계층 간 갈등이나 지역차별로 인한 사회적 논란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1%를 위한 정책’으로 일관해 갈등과 불균형을 심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재벌의 대변자요, 기득권자들의 수호자로 불리고 있다.
어떤 정권이든 집권 기간 중에 정책 실패나 시행착오는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실정은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차례 민주정부가 10년간에 걸쳐 터를 닦아 놓은 민주체제를 하루아침에 독재정권 시대로 회귀시켰다. 국민은 언로가 막히고 언론은 재갈이 물려졌다. 남북 긴장완화의 완충지대이자 남북 경제교류의 터전인 개성공단을 하루아침에 폐쇄시켜 수많은 입주 기업인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동시에 또다시 남북 간에 긴장을 고조시켰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인 피해는 물론 과도한 국방비 지출로 거액의 국민 혈세를 낭비한 셈이다.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최근 곪아터진 비선실세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사건은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총체적으로 드러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미스터리 7시간’을 두고 온갖 억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 최근 언론보도를 통해 소위 ‘의료게이트’가 불거지면서 비아**, 프로포폴 등 이 거론되면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추론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참사 당일 굿은 하지 않았다거나 대통령은 청와대 관저에서 집무를 봤다는 그 이상의 해명은 내놓지 않고 있다. 마치 청와대가 유언비어를 자초하고 있는 꼴이다.
온 나라를 뒤흔든 ‘최순실 게이트’는 비단 최순실 등 비선실세 몇 사람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았다. 검찰의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이 사건에 개입한 사례는 수도 없이 발견되었고, 마침내 검찰은 박 대통령을 참고인에서 피의자, 즉 ‘공범’으로 신분을 전환시켰다. 앞서 11월 4일 2차 대국민담화에서 박 대통령은 검찰과 특검조사를 성실히 받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검찰의 최후통첩인 ‘11월 29일 대면조사’를 끝내 거부했다. 그리고는 국회를 향해 탄핵을 하라느니 특검수사를 받겠다느니 하면서 ‘버티기’를 계속하고 있다.
 검찰 중간수사결과 발표에서 드러난 박근혜 대통령의 ‘공범’ 사례들 (한겨레, 2016.11.20)
급기야 현직 검사가 박 대통령의 강제수사를 주장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의 혐의는 직권남용, 사기, 제3자 뇌물죄, 강요, 공무상 비밀누설 등 죄질도 좋지 않거니와 죄상도 매우 심대하다. 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박 대통령을 두고 “쿠데타에 버금가는 국헌문란 사범”이라고 했으며, 정의당 노회찬 의원은 “이보다 더 나쁜 대통령은 일찍이 없었다.”고 말했다. 28일 새누리당 윤리위원회는 박 대통령에 대한 징계 절차에 착수하기로 했다. 또 이날 서청원 의원 등 새누리당 친박 중진들은 박 대통령에게 ‘임기 전 명예로운 퇴진’을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오죽하면 박 대통령의 최후의 버팀목이랄 수 있는 친박 중진들까지 자진 하야를 주장하고 나섰을까?
10월 29일부터 서울 청계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시작됐다. 이어 2차 20만, 3차 100만, 4차 100만(서울·지방 포함), 11월 26일 5차 집회 때는 전국적으로 190만 명이 촛불을 들었다. 200만 명이 가까운 인파가 모였음에도 단 한 명의 연행자, 단 한 건의 불상사도 없었다. 집회 역사상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전 세계인들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5차 집회 때는 청와대로부터 200미터 지점까지 접근이 허용됐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거대한 촛불의 함성도 두렵지 않으니 내 갈길 가겠다는 식이다. 오만한 권력자의 후안무치의 극치라고 하겠다.
혹자는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라고 강변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일제강점기 35년도,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도 우리의 역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굳이 이같은 반민주 독재정권의 역사를 반복해서 되씹을 필요까지는 없다. 독재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면 충분하고 나라를 거덜 낸 정권은 이명박 정권 하나면 족하다. 4차 촛불집회가 끝난 후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 소설 ‘혜주’를 읽은 한 독자가 내게 말했다. “혜주처럼 박근혜 정권 4년을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다”고. 물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찬동할 사람이 적지 않을 듯싶다. 이게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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