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8년 12월 25일 화요일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위령백비사진전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백비사진전시회 개최
이용섭 기자 
기사입력: 2018/12/26 [10:43]  최종편집: ⓒ 자주시보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위령백비사진전

▲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위령백비 사진전이 12월 24일 국회의원회관 2층 만남의 공간(로비)에서 개최되었다. 사진전에는 피학살자유족회 집행부와 많은 유가족들이 참석을 하였다. 사진전에 참석한 유가족들은 이구동성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을 당한 피학살자들의 원한은 국가 차원에서 풀어줄 것은 강력히 촉구하였다.     © 이용섭 기자

▲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위령백비     © 이용섭 기자

지난 12월 24일부터 국회의원회관 2층 만남의 공간(Robby)에서는 국회민주주의와복지국가연구회 주최,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주관 아래 1950년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들을 기리는 위령백비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12월 24일 오전 11시 국회의원회관 2층 만남의 공간에서백비사진전 개막식이 열렸다. 사진전 개막식에는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안호상 회장과 김선희 사무국장 등 집행부와 많은 피학살자 유족들이 참석을 하였다. 또 더불어 민주당 소병호 의원과 민주평화당 황주홍 의원도 개막식에 참석을 하여 진상규명을 위한 과거사법제정노력을 국회차원에서 기울이겠다고 개막연설에서 다짐을 하였다. 이에 피학살 유족들은 수십 년 동안 맺힌 한을 쏟아내며 기대감 속에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 사진전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소병호 의원이 과거사법제개정을 위해 국회차원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연설에서 약속을 하였다.     © 이용섭 기자

▲ 민주평화당 황주홍 의원이 사진선지회 개막식에 참석하여 개막연설을 하고 있다. 황주홍 의원은 억울하게 학살을 당한 피해자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국회차원에서 과거사법제개정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 이용섭 기자

한편 윤호상 유족회 회장은 조선전쟁전후 군, 경찰, 반역적인 우익폭력세력 그리고 미군 등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을 당한 피학자들과 그 유족들의 억울한 한(限)을 풀어주기 위해 정부차원에서는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성토하였다. 국회 또한 조선전쟁전후피학자들의 억울한 희생을 밝혀줄 수 있는 과거사법제정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을 하였다.

▲ 윤호상 유족회 회장은 조선전쟁전후 군, 경찰, 반역적인 우익폭력세력 그리고 미군 등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을 당한 피학자들과 그 유족들의 억울한 한(限)을 풀어주기 위해 정부차원에서는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성토하였다. 국회 또한 조선전쟁전후피학자들의 억울한 희생을 밝혀줄 수 있는 과거사법제정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을 하였다.     © 이용섭 기자

사진전 관련인사들의 개막연설과 개막식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참석자들은 개막식 뎅기(띠-테이프)를 자르는 의식을 진행하였다. 마지막으로 개막식에 참석한 참석자들 모두 기념사진을 찍고 개막식을 마무리하였다. 개막식이 끝난 후 바른미래당 박주선 의원이 들려 사진전관련 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갔다.

사진전에는 100여 점의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개막식 정면과 왼쪽 면에는 “백비(白碑) 미디어 사진전”이라는 커다란 네모꼴의 현수막이 걸려있었으며, 개막식 정면 좌측에는 조선전쟁전후피학살자들을 기리응 위령비인 《백비(白碑-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하얀 비석)》가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전은 12월 24일부터 12월 28일까지 국회의원회관 2층 만남의 공간(Robby)에서 열린다.

아래에서 “백비 미디어 사진전”을 개최하면서 조선전쟁전후피학살자전국유족회 측에서 배포한 자료 전문을 올려준다.


----- 백비(白碑) -----

❝ … 1943년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개시했고 세계 이(2)차 대전이 벌어졌다. 밤이면 등화관제라하여 불빛이 밖에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훈련을 하는데…5월경에 들어 밤이면 자주 공습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린다. …보도연맹으로 끌려가서 숫하게 죽는다는 말도 들리고 북에 간 사람들 중 고위층의 집안들을 도륙 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식 재판이 아니고 즉결처분을 해서 경찰서장의 권한으로 마구 죽여도 한마디 말도 못한다는 말도 들린다…내 남편은 끌려간 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도 못하고, 면회할 엄두도 내지를 못하고…마구잡이로 실어다가 학살을 한다니…밤마다 가택수색을 하여 남자만 있으면 공비소탕전에 데리고 간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모든 것 무시하고 면죄해준다고 속여 보도연맹 가입한 사람 다 잡아다 한구덩이 파고 생매장해서 몇 십만 명을 죽이고 5·16에 또 죽이고 5·18광주 사건에 또 얼마나 학살하였다. 유신정권이다 뭐다 하면서 긴급 조치령으로 마구 사람을 잡아 가두더니 인혁당이다 하여 또 죽이고 동족 살생 만행을 얼마나 하고도 모자라서 아직도 사람 죽이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고 해당 되지도 않는 죄를 뒤집어 씌워 재판을 하니 한심하다…통일이나 된다면 모든 한을 다 풀겠는데 참으로 길이 멀고 험하다. 손이 닿을 듯 하다가도 멀어지고 한다. 이제는 늙고 병든 몸도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으면 하지만 마음뿐이다. 몸과 마음은 자꾸 쇠잔해 간다… ❞
-서옥순 여사 ‘내 삶을 되돌아보며’ 中에서

❝ 1950년 8월 18일 새벽 국군 해병대는 통영 용남면 장평리 해안에 상륙하여 삼봉산 전투에 돌입하자 장평리 김금례는 국군의 밥을 했으며 남편 박덕용(朴德)은 노무자로 밥과 탄약을 나르게 되었다. 국군이 북진을 하자 남편 박덕용은 이들과 같이 떠났다. 그러나 남아있던 김금례는 오히려 인민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1950년 8월 19일 CIC(방첩부대)군인에게 연행되었으며, 다음 날 새벽 용남면 장평리 건너편인 거제 사등면 덕호리 선창가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
-제2차 백비 위령순례 자료집 中에서

❝ 쌍굴다리에 고립된 피난민 중에 임산부가 있어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다가 그 어머니가 총을 맞아 죽었다. 아기 혼자 남아서 울고 있는데…
인기척만 나면 미군이 총을 쏘아 대니까 같이 있던 피난민들이 아기를 빨리 없애던지 아니면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아버지는 미군의 총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아기를 물에 집어 던졌다. 그 아버지는 그걸 지켜보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미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
-제4차 백비 위령순례 자료집 中에서


백비

한국전쟁전후 조국의 해방공간에서 백만 명 이상의 민중들은 영문도 이유도 모른 채 대대적인 학살을 겪어야만 했다. 70년이 넘도록 한국전쟁전후 기간 민간인학살은 “정명”(正名)과 성격이 규정되지 못하고 이념의 덧칠 속에 갇혀 남북화해와 종전선언을 앞두고 있는 현재까지도 한발자욱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에 유족회와 관련단체들로 구성된 백비(白碑)순례단은 4개 월 동안 남한지역 총 45개의 학살지순례에 나서 원혼표식설치와 유족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천도재를 봉행하였다. 이를 통하여 학살지발굴과 유해매장지 발군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전국 각 지역의 미신고유족들의 증언을 청취하며 과거사법안(제정)을 촉구하는 사회적 여론을 언론 보도를 통하여 환기시켰다.

2018년 11월 15일 전국에서 사상 최대의 유족들이 국회 백비 봉헌식에 참여하였고 국회의장실은 민족의 염원이 담긴 결의문과 백비를 수인하였다.


전국유족회 소개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는 한국전쟁 전후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백만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하여 1960년 10월 10일에 결성된 “전국피학살자 유족회”의 숭고한 정신과 뜻을 받들어 2000년 9월 7일에 새롭게 출범하여 선배 유족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계승한다.


유해발굴과 학살지 조사 보존 발굴 필요성

2005년에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과 의문사 등 각종 시국사건을 조사하였으나, 신고기간을 1년으로 축소,.경험과 조사인력 부족 등으로 부실한 조사로 미신고유족을 양산하였으며, 2010년 이명박 정권은 위원회를 폐쇄하였다. 이어 박근혜 정권은 과거사문제를 전면적으로 부인하여 모든 과거사진상규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동안 국회는 눈을 감았고 입을 봉하였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10여 년이 흘러간 지금 촛불시민항쟁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국정 100대 과제를 선정하여 과거사문제를 적폐청산 1호로 발표하였고 국민의 눈높이네 맞는 과거사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이행하지 못하였다.


국가폭력 재발방지

국회는 국민의 여망에 따라 법이 필요하면 지체 없이 해당상임위원회에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국민의 국회이고 신뢰받을 수 있는 입법기관으로서 책임이고 의무일 것이다.

한반도는 금년 들어 급격하게 대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국제사회도 한반도정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과거사 기피국 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국회가 한반도 변화와 세계 여론에 귀 기울이고 남북화해와 상생에 선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 과거사 해결문제의 시급성을 직시하고 신속한 과거사법 제·개정을 서둘러야 한다.

20대 국회에서는 여,야를 떠나 현재 상정된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개정법률안”이 제, 개정 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야 한다.

국가공권력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를 더 이상 묵과하고 방치하는 것은 학살의 책임보다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자유한국당은 물론이거니와 집권당도 역사의 법정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을 것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와 관련단체들은 “과거사기본법재개정촉구범국민기자회견과 국회백비봉납”을 통하여 과거사법안의 입법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바이다. 

조국이 해방되었으나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의 수는 13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국군, 경찰, 미군, 민간단체, 치안대 등에 의한 계획적이고 잔혹한 학살이 전 국토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반공이라는 명목 하에 민간인들은 어떠한 법적 절차도 없이 무조건 죽음을 당해야 했다.


묻혀지고 버려진 학살의 진실 - 방치된 학살지

전쟁이 중단되고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학살의 실체에 대해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500만 명 가량의 유족들은 사회적인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울분과 통한의 반세기를 숨죽여 살아왔다.


조선전쟁전후피학살자 과련자료사진들

▲     © 이용섭 기자

▲     © 이용섭 기자

▲ 자료사진     © 이용섭 기자

▲ 자료사진     © 이용섭 기자

▲ 자료사진     © 이용섭 기자

조선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지전국분포도
▲ 자료사진     © 이용섭 기자

광고
트위터페이스북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