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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8일 목요일

10만의 순교로 되살아난 민족의 영웅

<홍암 나철 100주기⑩>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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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08  14: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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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에 부쳐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하다. 더군다나 서구식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에 완전히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아울러 이번 기획취재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많은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 /필자 주
<연재 기사>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지만 몸통이 중요하다”
<홍암 나철 100주기 ②> [인터뷰]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제일 위대한, 제일 억울하게 묻혀 있는 인물”
<홍암 나철 100주기 ③> 기념관 준공 서두르는 벌교 생가

일본 황궁 앞에서 단식투쟁 벌인 조선 선비
<홍암 나철 100주기 ④> 일사와 도동기를 찾아서


“700년간 닫힌 신교의 교문이 다시 열리어”
<홍암 나철 100주기 ⑤> 을사5적 처단투쟁과 단군교 중광

“내가 신의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자”
<홍암나철 100주기⑥> [인터뷰] 최윤수 대종교 삼일원 원장

"천하에 독립한 제일 큰 산은 오직 한 백두산이시니"
<홍암나철 100주기⑦> 만주로 망명한 대종교 총본사

홍암의 후예들, 청산리서 승전고 울리다
<홍암나철 100주기⑧> 당벽진과 액하감옥의 비극

“후대인들이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홍암 나철 100주기⑨> [인터뷰] 맹고군 중국 밀산시 전 부시장

  
▲ 홍암 나철 대종교 대종사가 1916년 8월 보름 순교하기 열흘 전에 사리원역 앞 사진관에서 남긴 기념사진. 이미 순명을 결심한 상태였을 것이다. 한복 차림에 대종교의 삼법수행을 상징하는 단주를 손에 쥐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홍암 나철 100주기를 맞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 생가에서 시작한 기획취재가 서울과 도쿄, 화룡 등을 거쳐 중국 밀산에서 일단락됐다. 정작 홍암이 100년전 순명 조천한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한 채.
오는 9월 15일은 음력 팔월 보름 한가위, 홍암 나철이 조천한 지 딱 100년이 되는 날이다. 남북관계가 원활하다면 대종교는 물론 홍암을 기리는 많은 이들이 삼성사를 찾아 북녘과 해외 동포들과 함께 100주기 추도제를 올릴 날이다.
그러나 올해는 남북관계의 마지막 버팀목이던 개성공단마저 문을 닫았고, 남북간 대결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는 10월 3일 개천절이나 늦어도 음력 개천절인 11월 2일에는 평양 단군릉에서 남북해외가 함께 천제를 올리고, 삼성사에서 추도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홍암의 차별성 국학, 그리고 단군민족주의
  
▲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호촌 대종교 3종사 묘역. 가운데가 홍암 나철 대종사 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일제의 악랄한 무단통치에 맞서 마지막 남은 한오리 목숨마저 민족의 제단에 바친 홍암 나철의 100년 전 행적을 더듬으면서 지금 우리가 처한 반도의 현실을 절감해야 했다, 남도의 끝자락 벌교에서 난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외교를 벌이고, 만주에 대종교와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구월산에서 순교한 과정은 반도에 갇힌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 단군으로부터 비롯되는 우리의 오랜 역사가 재조명 되고,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고려시기 대몽항쟁기에 이어 조선 말기 및 일제식민 초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시기였고,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연구센터 소장은 지난해 홍암 99주기 강연회에서 “단군의 건국을 집단역사의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단군의 자손으로서의 집단(민족)정체인식 밑에 집단(민족)의 단결과 발전을 도모하는 일련의 의식-사상-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단군민족주의를 정의하고 “대종교가 1909년 중광이라는 이름하에 창립된 것은 당시에 한참 대중화의 길로 확산되어가던 단군민족주의의 한 양상이었으며, 실제로 대종교는 당시 확산되어가던 단군민족주의적 요구와 분위기에 힘입어 교단의 성장을 이룩했었다”고 말했다.
홍암이 대종교를 중광하고 본격 포교에 나설 때 대종교를 사실상 ‘국교’(國敎)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미 형성돼 있었던 셈이다. 대종교가 급속히 세를 불리고 항일투쟁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번 기획기사 전반을 이끌어줬다. 지난 6월 14일 대종교 중광터인 안국선원 답사에 앞서 가진 인터뷰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번 기획취재의 주요한 가닥을 잡아줬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내용까지 이끌어준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홍암 나철을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로 위치지웠다.
수운 최제우 역시 민족종교 동학(천도교)을 창시하고 동학농민전쟁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위치가 확고하다. 그러나 홍암은 당시 민족종교 창시자들인 수운 최제우나 증산 강일순, 소태산 박중빈과는 달리 새로운 종교를 연 것이 아니라 기존 전통종교인 신교를 중광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더욱 결정적인 차이는 ‘국학’에서 찾을 수 있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인 단기(檀紀), 국전(國典)인 개천절이 홍암과 대종교를 통해 되살아났고, 현대 국어운동과 국사운동의 원천이 바로 대종교였음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외세의 등쌀에 시달리고 남북으로 분단된 오늘의 현실에서 자주와 통일을 위한 기치는 단연 민족주의일 수 밖에 없고, 그 민족주의의 내용은 바로 국학일 수 밖에 없다. 홍암 나철 100주기에 홍암과 그의 후예들이 만주벌판에서 피로 아로새긴 역사를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민족주의가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집중 연구 필요한 삼일사상과 삼법수행
  
▲ 지난해 12월 19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홍암 나철 대종사 조천 99주기 추모 강연회'에 참석한 대종교 인사들. 오른쪽부터 홍수철 총전리, 최윤수 삼일원장, 김영두 종무원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자칫 홍암과 대종교를 항일운동이나 국학이라는 사회적 관점에 한정시켜 보기 쉽지만, 홍암은 종교지도자이고, 대종교는 어디까지나 종교다. 특히 국교(國敎)를 중광한 의미는 무엇보다도 크다. 국교는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리 민족 정통의 유일무이한 고유 신앙인 것이다.
「단군교포명서」에는 백봉신사의 “우리 민족과 함께 성쇠하여, 본교가 흥하면 천지가 다시 새롭고 산천이 다시 빛나며 인민이 번창할 것이고, 본교가 쇠하면 상하의 지위가 바뀌고 음양의 질서가 어그러져 만물이 흥왕치 못한다”는 말이 비중있게 실려있다.
대종교의 3대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 참전계경은 단순히 한 종교의 성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경전으로서 깊은 연구가 필요하고, 홍암이 남긴 「신리대전」의 재조명도 필요하다.
홍암은 한얼님을 한임(桓因)과 한웅(桓雄)과 한검(桓儉)으로 “나누면 셋이요 합하면 하나”라고 했으며, “한임은 조화의 자리에 계시고 한웅은 교화의 자리에 계시고, 한검은 치화(다스림)의 자리에 계신다”고 규정했다. 이른바 대종교의 삼신(三神), 삼일(三一)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이 스스로 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수련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지감, 조식, 금촉의 삼법(三法)수행은 향후 전통 수련.수행 문화의 무궁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근대 민족주의 양대 산맥, 동학과 대종교
  
▲ 국학연구소는 '국학'과 특히 대종교에 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월례강좌에서 부여를 주제로 임찬경 박사가 발표하고 있는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연재를 진행하면서 주변에서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홍암 나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만큼 홍암과 대종교가 생소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는 거리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고대사와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에서 급격히 높아지는 추세는 거세지는 주변강대국들의 압박과 격화되는 남북대결 속에서 민족적 활로를 찾으려는 발버둥이라고 풀이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주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짊어진 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 역사의 재조명을 통한 민족 활로의 모색은 필연이다.
  
▲ 원주에서 사회운동에 앞장서면서도 동학과 해월 최시형을 재조명한 무위당 장일순. 생명사상과 한살림 생협운동이 장일순의 원주사단에서 비롯됐다. [사진출처 - 무위당 장일순 홈페이지]
동학과 해월 최시형을 다시 불러낸 고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의 후학 격인 주요섭 한살림 연수원 사무처장은 동학혁명 2주갑 기념 21세기민족주의포럼 강연에서 동학과 대종교의 역사적 맥락을 짚은 바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 조선말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과 개화(開化)의 길을 압도한 동학혁명이 30만 순교자를 낳았고, 일제시기 남한이 떠받드는 임시정부 세력이나 북한의 주류가 된 공산주의 항일 빨치산 세력 보다 더 많은 10만의 순교자가 다름아닌 대종교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항일무장투쟁 세력이었다는 것.
주요섭 처장은 “지금 이른바 보수와 진보라고 하는 것도 기본적으로 서학 1,2가 아닐까, 미국을 모델로 하는 서학1, 북유럽이나 독일을 모델로 하는 서학2, 심지어는 녹생당의 경우도 서학3일 수도 있다”며 “지금 우리시대의 동학이라고 하면 무엇일까. 동학이나 대종교의 끊긴 맥을 복원도 하고 토론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건물 건너 커피숍과 한 블록 건너 붉은 십자가가 점령한 오늘 우리의 도시생활 속에서 복지와 평화, 환경과 생명을 부르짖는 이들마저도 본질적으로 서학3, 서학4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자신의 낡은 중화(中華). 모화(慕華) 사관을 대종교를 만남으로써 깨트린 백암 박은식(1859~1925)은 꿈에 금나라 태조를 만나 나눈 대화체 소설 『몽배금태조』에서 “우리 역사는 다른 나라의 노예문서”라며 “다른 나라의 노예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스스로 일러 ‘소중화’라 한다”고 한탄한 바 있다.
중화사관을 극복하고 대륙사관에 눈뜬 박은식은 “무릇 영웅은 나라의 방패와 성이요 인민의 지휘관”이라면서 『명림답부전』과 『천개소문전』 등 “우리 4천년 역사에서 가장 자주독립의 자격이 완전하여 신성한 가치가 있었던 때”인 고구려의 영웅들을 호출해 내어 대륙사관의 대중화에 앞장선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100주기를 맞은 홍암 나철과, 그의 유지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고 목숨바친 백포 서일,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 그리고 임오십현을 비롯한 10만 순교자들이 과연 그렇게 멀게만 느껴져야 할까?
도동기와 도제사언문을 기다리며
  
▲ 단군 영정은 여러 종류가 있다. 2013년 광화문 개천절 행사에서 공개된 구월산 삼성사 단군 초상화를 찍은 사진. 대종교 항일투사들은 이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10만 순교의 역사는 우연이 아니다. [사진제공 - 이정희 단통협 사무국장]
홍암 나철 100주기 기획취재가 본격화되면서 단재 신채호가 홍암의 자결 소식을 베이징에서 접하고 지었다는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선 순간이 있었다. 이미 『신채호 문학유고선집』(김병민, 1994) 부록에 실린 단재의 저작 목록 중 「도제사언문」이 명기돼 있고, 소장처도 대체로 평양 인민대학습당으로 특정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차례의 중국 취재 과정에서 김병민 전 연변대 총장 측에 확인한 결과 “도제사언문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며 “인민대학습당에 있는 단재 자료들 속에는 없었다”는 실망스런 답을 들었다. 단재의 도제사언문이 100년만에 다시 세상에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당분간 무망해진 것이다. 물론, 도제사언문을 찾기 위한 노력은 이번 기획취재 이후에도 지속되겠지만.
홍암이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외교를 펼치던 당시 친필로 기록한 『일사』(一史)와 『도동기』(度東記)도 이번 기획취재에서 꼭 찾아내고 싶은 자료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백포 서일의 저술이자 대종교 경전(보전)으로 채택됐지만 서문과 발문, 서언만 남아있는 「구변도설」과 「삼문일답」의 완본을 찾는 것도 중요한 숙제다.
  
▲ 홍암 나철이 사흘간 단식농성을 벌였던 일본 도쿄 황궁 정문 앞. 일제는 아직도 식민통치를 사죄하지 않고 있고, 홍암 나철과 대종교 관련 자료들도 어디에 얼마나 보관돼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942년 임오교변은 대종교의 모든 기록이 사라지게 된 가장 직접적 계기였다. “피검당시 일경에게 압수된 물품은 총본사 비품으로 신간교적 2만 여권 과 구존서적 3천여권 및 천진 및 인신(印信) 각종도서 등 전부와 각지 교우 검속(檢束)시에 압수된 서물(書物) 6백여종인바 해방후 각방으로 색출에 진력하였으나 종내 발견치 못함이 유감스럽고도 애석한 일이다.”(대종교중광60년사)
또한 이번 취재과정에서 “중국 지안(集安) 김교헌 김교헌 자택 지붕에서 자료가 쏟아졌다”(양현수)거나 “만주국 시기기 때문에 지방 자료는 다 장춘에 집결해 장춘 당안관에 있다”(맹고군), “대련 당안관에 중요한 자료들이 많이 있는데, 고위인사를 동원했지만 볼 수 없었다”(최삼룡)는 증언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홍암 100주기에 ‘홍암 나철 전집’이 발간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홍암대종사 조천100주년 준비위원회’가 오는 1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홍암 나철 대종사 순명 조천 제 100주기 추모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신운용 외국어대 교수 등이 중심이 돼 홍암 나철 자료집을 발간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 홍암 나철이 조카 나정수에게 쓴 유서.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필름을 제공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사진 - 통일뉴스, 자료제공 - 이양재]
실제로 홍암 나철과 관련된 자료들은 국내에 얼마 남아있지 않고 그나마 남겨진 유서들 마저도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전모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번 기획취재 과정에서 이양재 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이 제공한 슬라이드 필름 중에는 공개된 적이 없는 조카 나정수에게 쓴 유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그나마 보성군이 79억을 들여 10개년 계획으로 추진해온 홍암 나철 생가 복원과 기념관 건립 사업이 마무리돼 오는 11월 2일 기념관 개관식이 열릴 예정이지만, 기념관 전시물과 교육관 교육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춰져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
한편, 만해 한용운 연보 1935년 4월에 등장하는 ‘이때를 전후하여 대종교 교주 나철 유고집 간행을 추진.(미완성)’이라는 대목을 추적했지만 전보삼 만해기념관 관장은 만해 관련 자료 중에 홍암 나철 관련 자료는 본 적이 없다고 확인했다.
지난 7월 26일 수원 경기도박물관 관장실에서 만난 전보삼 관장은 “만해 자료 대부분은 한국전쟁 당시 분실됐다”며 “남은 자료는 73년과 79년 두 차례 만해 한용운 전집을 발간하면서 모두 포함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마 홍암 자료의 경우는 만해가 직접 자료를 수집한 것이 아니라 대종교 관계자 누군가가 만해에게 편집과 출판을 의뢰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밀산에서 만난 ‘현대판 홍암의 후예들’과 국학연구소
최근 사드(THAAD) 문제로 한중 관계가 경색되면서 보성군과 대종교 삼종사 묘역이 있는 중국 화룡시의 자매결연 추진이 무산되고 선양회가 삼종사 묘역에 설치한 안내판마저 철거되는 상황에 처해있다. 만주지역에서 주로 활동해온 대종교의 역사적 흔적들이 보존되기 더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이다.
정작 대종교를 중광한 자리(서울 안국동 안국선원 자리)와 개천절 행사를 처음으로 연 자리(서울 계동 현대사옥 인근) 등에는 서울시가 세운 자그마한 표지석 하나밖에 없는 실정이고, 기념비나 동상 나아가 기념관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밀산시 당벽진에 '서일 총재 항일투쟁 유적지' 기념비를 세운 맹고군 전 밀산시 부시장(왼쪽)과 채명군 전 밀산시 국장.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대종교 총본사가 머물렀고, 백포 서일이 순국했던 중국의 동단, 러시아 접경지대인 밀산에서 백포 서일 기념비를 세운 맹고군 전 밀산시 부시장과 채명군 전 밀산시 국장 일행을 만난 것은 이번 기획취재 과정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중국 속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조선족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120년 이주역사를 기록하고 이상설, 안창호 등이 개척한 조선인 독립기지인 한흥동과 십리와에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분투하고 백포 서일의 항일투쟁 기념비를 밀산시인민정부의 명의로 제대로 세워낸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판 홍암의 후예들’이라 부를 만한 이들의 ‘서원’(誓願)의 진실함은 우리에게 귀감이 될만 하다.
국학과 대종교 연구에 일로매진하고 있는 국학연구소의 김동환 연구위원은 <통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홍암 나철이 구한말 국망의 위기 속에서 고민한 것을 우리가 또다시 고민해야 한다”면서 “또다시 국망도존(國亡道存)이다. 사상적 무장, 정신적 무장이다. 정신만 투철하면 결코 나라가 안 망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격정적으로 토로한 바 있다.
  
▲ 홍암 나철이 순명 조천한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올해 100주기 추도행사가 남북해외 동포들이 모인 가운데 이곳에서 열리길 기대한다. 2003년 개천절 민족공동행사 당시 방문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이번 기획취재에 큰 도움을 준 국학연구소와 대종교, 그리고 수많은 국내외 인사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부족한 글을 맺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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