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한번 잘 왔다. 아파트 현관에서 모르는 아이가 두 손 모아 인사하다니. 마주친 것도 아니고 뒤쫓아오면서. 승강기에서 내릴 때 또 안녕히 가시란다. 그러고 보니, 어른도 웬만해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지 않던가. 도회지에 이런 동네가 있구나. 그 녀석, 한 아홉 살 됐을까. 흐뭇한 마음이 갑자기 찌뿌둥해진다. 툭하면 ‘9살’ 하는 표기가 떠오른 탓이다. ‘구 살’이라 쓰고 ‘아홉 살’이라 읽어라?

우리는 수효를 말할 때 ‘일(一) 이(二) 삼(三)’보다 ‘한 두 세’를 주로 쓴다.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왜 ‘일 달, 이 달, 일 해, 이 해’라 하지 않을까. 달·해가 순우리말이라, 앞에 오는 수량 관형사도 한자어보다는 순우리말이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고라니 일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 배롱나무 이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 연필은 삼 자루가 아니라 세 자루 해야 자연스럽듯.

심지어 뒤에 한자어가 와도 대개 순우리말을 쓴다. 트럭 한 대(臺), 색종이 두 장(張), 단편집 세 권(卷). 물론 고정 법칙은 아니어서, ‘일(日), 년(年)’과 만나면 4일, 5일, 6년, 7년으로 쓴다. 주로 시간과 연관 있다.

물론 예외 같은 조어가 없을라고. 무일푼. ‘한 푼도 없다’를 ‘일 푼도 없다’고는 안 하는데, 한자어 접두사 ‘무(無)’와 어울리려다 보니 ‘무한푼’이 아니라 ‘무일푼’이 됐을 터. 그마저도 ‘무1푼’이라 쓰지는 않는다. 결국 아라비아 숫자는 앞서 보았듯 뒤에 오는 말이 한자어일 때나 일부 자연스러움을 알 수 있다. ‘보름은 15일을 말한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육군 복무 18개월’처럼…. 아홉 살을 ‘9세(歲)’로는 써도 ‘9살’ 하면 어색한 까닭이다.

며칠 뒤 승강기에서 이웃을 한 분 마주쳤다. 알은체할 틈도 없이 먼저 인사하시는데, 일흔이 훌쩍 넘어 보인다. ‘사흘’을 ‘4일’로 알아듣는 세태에, 많은 것을 ‘잃은’ 나이로 착각할라.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지기에는 너무 ‘이른’ 연배 아닌가. 인생은 칠십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