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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9일 화요일

경찰의 시각에서 본 5.18


  • 기자명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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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5.1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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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두환 회고록』의 5.18왜곡 비판

    ▲ 지난달 27일,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씨가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동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 뉴시스]
    ▲ 지난달 27일,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는 전두환 씨가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재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동으로 들어서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코로나19 때문에 40주년을 맞은 5·18기념행사가 대부분 취소되었지만 유독 관심을 끄는 것은 ‘전두환 재판’이다. 이 재판에서 가장 큰 쟁점은 5·18당시 헬 기사격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다. 2017년 발간된 『전두환 회고록(이하 ‘회고록’)』 에서 전두환은 ‘헬기사격’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헬기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와 피터슨 목사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 ‘가면을 쓴 사탄’(‘회고록’ 480쪽)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러자 조비오 신부 조카 조대영 신부가 ‘사자(死者)명예훼손’이라며 고소했던 것이다.
    ‘회고록’은 5·18을 왜곡하는 여러 자료 가운데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비록 ‘회고록 형식’을 빌었지만 사실은 5·18을 ‘폭동’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선전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지난 40년간 국가차원의 진상규명을 통해 밝혀진 객관적 사실을 대부분 부인하고 있다.
    1980년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과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는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권장악을 위해 내란을 일으켰다. 당시 내란에 반대한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민주화운동’으로 판명났다. 이 같은 평가는 1997년 5·18재판에서 대법원의 판결로 공식 확인됐고, 내란 수괴 전두환과 그 일당은 처벌을 받았다. ‘회고록’은 이렇듯 사법부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확립된 5·18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부인 하고 있는 것이다.
    ‘회고록’의 내용이 상당부분 허구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5·18당시 ‘경찰의 행적’이다. 지금까지 5.18에 대한 담론은 이분법적인 도식이 지배하였다. 한쪽은 민주화를 외치던 ‘광주시민’이고, 다른 한쪽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공수부대’라는 도식이다. 그런데 5·18 현장을 찍은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공수부대 뒷쪽에는 경찰이 진압복장을 한 채 대열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경찰은 ‘진압군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공수부대가 M16 소총을 휴대하고 진압봉이나 대검을 휘둘렀던 것과 달리 경찰은 총을 휴대하지 않았고, 진압봉과 방석모만 착용했다. 총기를 휴대하지 않은 채 비무장이었던 것이다.
    5·18 때 경찰은 어떤 존재였을까? 치안 질서 유지의 일차적인 책임은 경찰에게 있다. 그러나 계엄령이 내려지면 군이 전면에 나서게 되고 경찰은 군을 보조하는 위치로 바뀐다. 어찌됐던 경찰은 계엄군과 한편이 되어 가장 가까이서 시위진압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경찰의 시각에서 5·18은 어떻게 보였을까? 그동안 이런 관점에서 계엄군의 진압작전 행태가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올해 5월 처음 발간된 『안병하 평전(이재의 저, 정한책방)』 이 그런 시각을 보여준다. 5·18당시 전라남도 경찰국장이었던 ‘안병하’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회고록’의 거짓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
    안병하라는 인물에 필자가 처음 관심을 가졌던 때는 27년 전인 1993년 7월이다. 미망인 전임순 여사가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신고센터에 고인이 된 ‘남편 안병하의 명예회복’을 신청했던 것이 계기가 됐다. 그 무렵 5·18진상규명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컸지만 경찰의 역할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었다. 경찰은 계엄군과 진압대열에 함께 서 있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점에서 흥미로웠다.
    첫째, 진압대열에 서 있었던 경찰이 과연 광주시민과 나란히 5·18피해자라는 명제가 성립할 수 있는가?
    둘째, 공수부대와 경찰 사이에 당시 어떤 일이 있었던가?
    셋째, 상급자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 문제였다.
    당시 필자가 기자생활을 하던 때라 미망인 전임순 여사를 찾아가서 만났다. 1988년 10월 국회 5·18청문회를 눈앞에 두고 그녀의 남편 안병하는 8년간 보안사에서 받은 고문으로 인해 오랜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가 들려주는 남편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의 사연은 충격이었다. 필자는 1985년 5월에 간행된 5·18에 대한 최초의 기록 ‘넘어넘어’(원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기록. 이 책 전면개정판은 32년 만인 2017년에 다시 선보였다.) 초고를 집필했었다. 5·18의 전체 모습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군과 경찰은 한 몸’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한 것이 5·18의 본질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접근하게 했던가 하는 깨달음과 부끄러움이었다. 전남 도경국장 안병하 스토리는 필자로 하여금 5·18을 기존의 시각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도록 만들었다.
    ▲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사진 : 5.18기념재단]
    ▲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사진 : 5.18기념재단]
    경찰청에서는 2005년과 2017년 두 차례 5·18에 대한 경찰보고서를 펴냈다. 『5·18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2017)』 은 경찰관 증언과 경찰청 내부 비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전남지방경찰청이 엮은 5·18에 대한 정식 경찰보고서다. 이에 앞서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안병하 전 전남국장 5·18관련 순직 진상조사 보고(2005)』 라는 자료를 펴냈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경찰의 시각에서 『전두환 회고록』에 나타난 5·18왜곡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5·18직전 광주시내 상황이 학생시위로 무질서와 혼란이 극에 달해 군의 개입 없이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었는가.
    둘째, 학생과 시민들의 공격에 공수부대가 흥분했고, 공수부대의 과격진압은 이런 맥락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행위였으며, 이것이 광주항쟁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셋째, 시민들이 경찰서 등지에서 탈취한 총기로 무장하고 발포했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이 사실인가.
    넷째, 북한특수군 수백 명이 광주에 잠입하여 시위를 주도하고 사라졌다는 북한군 개입설이 성립할 수 있는가.
    다섯째, 계엄군 철수 이후 광주 시내는 무장시민군에 의해 자행된 살인과 약탈 등 범죄가 판치는 무법천지였는가.
    여섯째, 전남 경찰국장 안병하가 ‘회고록’에서 묘사한 것처럼 근무지를 무단이탈하고 진압업무에 실패하였는가. 전두환의 주장대로 광주의 불행을 야기한 무능한 지휘관이었던가.
    일곱째, 시민들이 교도소를 지속적으로 공격했는가 여부 등이다.
    2017년 경찰보고서는 『전두환 회고록』이 왜곡하고 있는 위와 같은 핵심적인 쟁점을 경찰 내부 비공개자료와 증언을 통해 하나씩 비판하고 있다.
    첫째,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내려진 1980년 5월 17일 자정 이전까지 광주의 치안상황은 평온했다. 16일 날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의 요청에 따라 안병하 도경국장은 학생들의 평화시위를 약속했다. 그 결과 그날 밤 야간 횃불시위까지도 경찰의 보호아래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17일 토요일에는 진압경찰이 휴식과 야유회를 즐길 만큼 모처럼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안병하 국장도 5월 초부터 열흘 이상 집무실에서 긴장 상태로 밤을 새우다 그날 밤 처음 아내가 기다리던 관사로 돌아와 숙면에 떨어졌는데 갑자기 비상이 걸려 밤중에 출근하였다. ‘회고록’은 5월 18일 경찰의 요청에 따라 공수부대가 시위진압에 투입됐다고 했는데 안병하 국장은 오히려 공수부대가 투입되면 학생들의 희생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경찰이 더 적극적으로 진압함으로써 공수부대 개입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히 학생시위를 관리하여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일 광주시내에 진압을 위해 동원된 경찰 숫자는 약 2천여 명에 달했지만, 학생시위대는 1천명을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무시한 채 경찰의 요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엄당국이 18일 오후 일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시민을 자극하여 사태가 커졌다. ‘회고록’은 경찰의 요청에 따라 계엄군이 시내에 투입된 것으로 거짓 사실을 담고 있다.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 등 경찰의 비공개 기록에 따르면 안병하 국장은 18일 오후에 계엄군 투입을 요청하지 않았다.
    둘째, 경찰보고서는 ‘회고록’의 주장과 달리 시위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시민들의 공격 때문에 흥분하여 과격진압을 한 것이 아니라 특수 제작된 진압봉, 착검 상태의 대검을 사용하여 너무 과격하게 진압했기 때문에 그 결과 시민들이 흥분해서 사태가 커진 것으로 보았다. 이때 광주시내에 퍼진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는 광주시민과 일반국민을 분리시키려했던 계엄당국이 고도의 심리전 차원에서 유포한 것으로 의심한다.
    셋째, 경찰보고서는 시민들의 무장 시각이 군 당국에 의해 조작됐다고 밝혔다. 5·18직후 치안본부의 지시로 전남경찰국은 무기피탈 경위를 치밀하게 조사했다. 이때 밝혀진 바에 따르면 광주시내 경찰 무기는 안병하 국장의 지시에 따라 5월 19일 밤에 이미 군부대로 모두 옮겨 ‘소산’시켰다. 5월 20일 야간에 광주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이 피탈됐으나 공이와 실탄이 없었다. 실제로 총기와 실탄이 피탈된 시각은 5월 21일 13시 30분경 나주 남평지서에서 발생하였다. 이 시각은 공수부대가 도청 앞에서 집단발포를 시작한 21일 13시에서 30분이 지난 뒤였다. 즉 ‘회고록’에서는 시민군이 먼저 무장했기 때문에 계엄군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다고 주장하는 데 그 시각까지 시민군의 수중에는 실탄이 없었다.
    넷째, 경찰기록은 5·18기간 중 130여 명의 정보, 보안 형사들이 활동했고, 시내 주요지점 23개소에 정보센터를 촘촘하게 운영하였다. 형사들의 눈을 피해 수백 명의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주장이라고 단정했다.
    다섯째, 5·18기간 동안 경찰의 치안공백 상태에도 불구하고 광주시민들은 생필품 부족 속에서도 질서를 유지하면서 서로 돕고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을 보여줬다. 이 기간 동안 경찰이나 군인 가족들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은행도 털리지 않았다. 시민군은 오히려 경찰서를 보호했다. 안병하 국장이 5월 24일 직접 광주경찰서와 도 경찰국 자신의 사무실에 들러 확인했던 사항이지만 모든 게 시민군들에 의해 잘 보호되고 있었다.
    여섯째, 5·18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이 경찰에게 보여 준 우호적인 태도나 감정은 안병하 도경국장의 ‘원칙에 바탕을 둔 시위관리 방침’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안 국장은 경찰이 앞장서서 처음부터 강경하게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광주시내 경찰서 무기고에 보관된 총과 실탄은 5월 19일 밤중에 미리 군부대로 옮겨버렸다. ‘회고록’에서는 안병하 국장이 5월 21일 오후 1시, 공수부대의 도청 앞 집단발포 때 근무지를 이탈했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경찰기록에는 안 국장이 현장에서 경찰의 작전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군과 경찰이 시내에서 철수할 때도 모두 안전하게 피신한 것을 확인한 후 맨 마지막에 안병하 국장은 도청을 떠났다. 21일 오후 공수부대가 퇴각하면서 시민군과 격렬하게 총격전을 벌였던 것과 달리 경찰들은 오히려 시민들의 보호를 받았다. 그 결과 당시 공수부대는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경찰은 단 한 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5월 25일 오후 계엄군의 도청 공격을 앞두고 최규하 대통령이 시민들을 설득하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광주에 내려왔다. 함께 내려온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안병하 경찰국장에게 대통령 앞에서 ‘경찰이 무장을 하고 도청을 접수하라’는 요구를 했다. 이희성과 안병하는 육사 8기 동기생이었다. 안병하는 “경찰은 시 민군의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어떻게 시민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면서 진압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라고 답변했다. 다음날 안병하 국장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되어 ‘직무유기 혐의’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오랜 투병 끝에 결국 사망했다. 사후에 그 공적이 평가되어 순직과 5·18유공자로 인정되었고 2017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찰영웅’으로 선정되었다.
    일곱째, 시민군이 지속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회고록’의 주장은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보았다. 경찰이 총기피탈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사실인데, 광주 인근 모든 경찰서가 피해를 입었으나 담양 등 전남의 동부권 경찰서만 피해가 없었고, 그쪽에서 시민군의 활동은 미약했다. 당시 교도소가 담양 방향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공수부대는 담양 쪽으로 진출하려는 시민군이나 일반시민의 접근을 교도소 공격으로 오인했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전남경찰의 보고서에는 그밖에도 『전두환 회고록』의 5·18왜곡을 구체적인 증거와 증언을 통해 설득력 있게 비판하고 있다. 이는 5·18이 폭동이 아니라 경찰마저 함께 한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필자 이재의
    1956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으며 전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조선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했다. 《광주일보》 ‘월간 예향’ 기자, 《광남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0년 5월 항쟁 당시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 상황실에서 활동했으며, 그해 10월 체포돼 1981년 8·15특사로 석방됐다. 5·18 광주항쟁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기록) 초고를 1985년 작성했고, 2017년 이 책의 전면개정판을 공동집필했다. 2000년 내외신기자들의 5·18 취재기 The Kwangju Uprising (M.E. Sharpe)을 《뉴욕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콧 스톡스 (Henry Scott Stokes)와 함께 편집하여 미국에서 펴냈다. 현재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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