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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8일 토요일

러시아에서 눈물 젖은 '서울 스까야'를 걷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4. 블라디보스토크下 : 신한촌에서 영원한 불꽃까지
2019.06.08 13:43:27




"거사를 앞둔 안중근처럼 웃으면서 갑시다!"

마지막 날 아침,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찾았다. 이번엔 기차 탑승 목적이 아니라 역 탐방이 목적이었다. 역사 앞에 선 대장 박흥수 철도기관사는 자못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곳이 거사의 시작점"이라고 했다.

1909년 10월의 어느 날 안중근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이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계획 소식을 들었다. 암살을 결심한 안 의사는 10월 21일 대동공보사 회계원 우덕순과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만나 하얼빈으로 가기 위해 열차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역. ⓒ프레시안(박정연)

박 기관사는 이토 저격 사건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사실 이 거사의 참가자 가운데에는 거사와는 상관없는 순진무구한 17살 소년이 있었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 일행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 가는 도중에 한의사 유경집을 만납니다. 유경집에게는 17살 아들 유동하가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 통역이 필요하다면서 유동하에게 통역을 부탁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이 17살 청년은 안중근 삼촌의 부탁에 아무런 의심 없이 통역과 안내를 맡으면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뤼순 감옥에 갇혔던 유동하는 석방 후 볼셰비키 당원으로 활동했고, 27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안중근을 만나기 전 유동하는 자신이 그런 엄청난 일에 휘말릴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혁명 전사가 될 것이라고는 더더욱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으로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뒤집혀버린 셈이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박 기관사 또한 "제가 만일 영화감독이라면 유동하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을 것"이라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사 안은 오래된 건물의 정취가 느껴졌다. 박 기관사는 안중근 의사가 거쳐갔던 1909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했다. 

둘러보다 보니, 낡은 벽에 걸린 두 개의 동판이 눈에 띄었다. 하나는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식에 참석한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방문을 기념하는 동판, 또 하나는 2015년 부산역과 자매결연을 기념해 만든 동판이었다. 박 기관사는 "부산에서부터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 올 그날을 고대한다"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역과 부산역의 자매결연을 기념해 만든 동판. ⓒ프레시안(박정연)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박 기관사는 조합원들에게 "기차를 타러 가는 안중근 의사의 표정이 어땠을 것 같냐"고 물었다. 죽음까지 각오한 엄청난 일을 앞뒀으니 비장한 표정이었지 않았을까. 혹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을까.

"비장한 얼굴로 가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까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 동지와 함께 유랑 가는 여행자처럼 웃으면서 갔다고 해요. 우리도 웃으면서 내려갑시다."

플랫폼으로 나오니, 외벽에도 이런저런 동판이 보였다. 박 기관사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주요 역을 소개한 동판을 소개한 뒤, 철도가 낳은 역사적 비극에 대해 이야기했다.

"1차 대전 때 프랑스, 독일, 영국의 군사 전문가들이 3개월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땠나요? 전쟁이 4년이나 지속됐습니다. 왜 예측이 틀렸던 것일까요. 알렉산더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는 일단 싸움이 붙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철도가 생기면서 불리한 상황이 될 것 같으면 계속 물자 보급해주고 병력을 투입하고 그러다 보니 전쟁이 장기화됐습니다. 이렇게 비극적인 전쟁이 철도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문명의 아이러니인 셈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우리는 '9288 기념비'와 그 앞에 전시된 기차 모형을 보며 경탄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지임을 알려주는 '9288 기념비'의 9288은 노선 길이인 9288킬로미터를 의미한다. 지구 둘레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길이다.  

이틀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방문으로 플랫폼이 통제되는 바람에 기념사진을 찍지 못했던 우리는 이날 비로소 '9288 기념비' 앞에서 횡단열차 탑승 '인증샷'을 찍을 수 있었다. 조합원들은 "전체 노선의 일부만 경험했지만 횡단열차에 탄 것 자체로 뿌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9288 기념비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 ⓒ프레시안(박정연)

눈물의 땅, 신한촌 

버스를 타고 이번에 우리가 내린 곳은 어느 언덕 마을이었다. 박 기관사는 오르막길 어귀부터가 바로 '신한촌'이라고 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 해안가가 전략적 요충지로 급부상하자 러시아 당국은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을 모조리 쫓아냈다. 그때 쫓겨난 한인들이 고개를 넘어가서 새롭게 정착한 곳이 바로 이곳 신한촌이다.

박 기관사는 1917년만 해도 이곳에 만 명 정도가 살았다고 했다. 특히 해외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에게는 '아지트' 같은 공간이라고 했다. 신채호, 안중근, 이동명, 안창호, 박헌영, 주세죽 등 잘 알려진 독립운동 지사 가운데 여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최재형과 이상설 등이 참여한 권업회를 중심으로 스탈린구락부, 대동공보사 등 항일 운동 지원 단체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해 신한촌은 한인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신한촌 입구 언덕길, ⓒ프레시안(박정연)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이 길 입구에 원래 독립문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진을 보면, 1920년 3월 1일에 3.1운동 1주년이라고 해서 언덕길에 태극기도 걸어놓고 성대하게 기념식을 엽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장소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를 방문한 우리에게 아주 의미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덕 정상에서 조금 걷다 박 기관사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슈퍼마켓으로 보이는 한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엘레나'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박 기관사는 이 슈퍼마켓 자리가 독립운동가 이동휘 선생의 생가 터라고 했다. 이동휘 선생은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국방장관)을 지냈으며, 김 알렉산드라와 함께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인물이다. 박 기관사는 이렇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 인물의 생가가 보존되지 않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이동휘 선생의 생가터인 슈퍼마켓. ⓒ프레시안(박정연)

이동휘 선생의 생가 터 옆 언덕길로 내려가니 작은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이곳은 과거 한민학교 터였다. 양옥으로 지어진 건물로, 평등과 자유와 같은 기치를 가르치는 근대식 교육이 이뤄지던 곳이었다. 박 기관사는 "이곳에서 근대식 교육이 이뤄졌음에도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에 서당을 전시해놓은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분개했다.

한민학교 터는 '4월 참변'의 슬픔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1920년, 러시아에서는 혁명군인 적군과 반혁명군인 백군으로 나뉘어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제국주의 반대 기치를 내걸고 식민지 약소민족의 해방을 외친 적군의 편에 섰다. 당시 백군을 지원하던 일본은 1920년 3월 적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분개한 일본군은 조선인들이 적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920년 4월 5일 신한촌에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적군 부대가 주둔한 한민학교를 장악한 뒤, 잡아 온 조선인들을 학교 안으로 몰아넣고는 불을 질렀다. 일본군은 자신들을 습격한 이들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4월 참변'으로 하루 사이에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한촌뿐 아니라 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 습격이 자행됐고,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등이 일본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러시아에서 만난 '서울 거리' 

처참한 비극의 현장을 뒤로 한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반가운 글자를 발견했다. 울타리에 'СЕУЛЬСКАЯ', '서울거리'라고 적힌 문패였다. 이곳이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몇 안 되는 단서였다. 박 기관사는 "최근 리모델링한 집"이라면서 "7~8년부터 '이곳이 한인촌이었음을 알 수 있도록 해달라'고 문제제기했던 건데 정권 바뀌고 이제야 새로 명패를 달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집을 한국 정부가 구매해서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박물관처럼 신한촌 역사에 대해 잘 알 수 있게끔 꾸며놓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세울스카야 2A' 집에 걸린 문패. ⓒ프레시안(박정연)
▲신한촌기념비. ⓒ프레시안(박정연)
 

이곳이 과거 한인촌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또 다른 단서가 있었다. '서울거리' 집보다 윗 동네인 하바롭스크길에 있는 신한촌 기념비다. 이 기념비는 1999년 광복절에 연해주의 한인들과 해외 동포들이 3.1운동 80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박 기관사는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져있고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미래에는 다 하나 되어 협동해서 사는 민족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했다. 

기념비는 세 개의 큰 기둥과 여덟 개의 작은 돌로 이뤄져있었다. 세 개의 큰 기둥은 서울의 한성정부, 상해의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뜻하고, 여덟 개의 작은 돌들은 조선 팔도를 의미한다고 했다.  

건립비 뒷면에는 기념비를 세우는 데 기여한 단체들이 적혀있었는데 그 가운데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극우 이념을 대표하는 단체가 여럿 있었다. 박 기관사는 "기념비를 세우는 것도 결국 자본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해방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단체들에 의해 이런 기념비가 만들어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했다.

이제 페르바야레치카역으로 걸어가는 길, 박 기관사는 이 길이 "눈물의 길"이라고 했다. 개척리에서 신한촌으로 쫓겨난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 이주 정책에 의해 다시금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박 기관사는 "역으로 가는 한인들의 걸음이 얼마나 애통했을까"라며 "지금은 봄이라 꽃도 펴서 보기엔 예쁜 길이지만 한때 누군가에게는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이 있던 길"이라고 했다. 

▲페르바야레치카역 매표소. ⓒ프레시안(박정연)
ⓒ프레시안(박정연)

신한촌을 떠난 지 10분도 되지 않아 페르바야레치카역에 도착했다. 매표소만 덜렁 있는 아주 단출한 역이었다. 하루에 이곳을 정차하는 기차도 몇 대 없다고 했다. 운 좋게도 20분 뒤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 가는 기차가 있었다. 길게 늘어선 화물기차들을 실컷 구경한 뒤 기차에 올랐다. 낡은 외관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열차 안에 들어가니 나무 의자가 우리를 반겼다. 오래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차에 타니 마치 놀이기구를 탄 것마냥 다들 신이 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블라디보스토크역까지는 무척 가까웠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영원한 불꽃'이 우리의 4박 5일 대장정의 마지막 방문지였다. 대조국 전쟁 당시 희생된 군인들을 기리는 곳으로, 바닥에 새겨진 별 가운데에는 실제로 붉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온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명의의 화환이었다. 김 위원장은 이틀 전 이곳에서 헌화를 했다. 우리는 이 화환을 중심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조국 통일!"을 외쳤다.

"시베리아 시간여행, 미친 듯이 즐거웠다가 미친 듯이 슬펐다"

하바롭스크와 우수리스크,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빡빡했지만 그만큼 유익했던 여정이 모두 끝났다. 무사히 여행을 마친 조합원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조합원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번 여행이 가져다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김선 조합원은 "기차에서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김화수 조합원은 "프레시안 조합원들과 함께 해서 너무 좋았고, 특히 신한촌에서 박흥수 대장이 박해받은 역사를 말하며 울컥했을 때 저도 덩달아 울컥했던 게 생각난다"고 말했다.

임영섭 조합원은 "우리 독립운동사, 특히 연해주 일대의 활동에 대해 공부하고 싶어서 왔는데, 우리 여행 컨셉이 역사 탐방인 만큼 많은 것을 배우고 간다"며 "여행에 함께한 젊은 분들이 이번 역사 탐방을 기회로 좀 더 민족 정기를 채우고 깊은 역사의식을 갖게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나영미 조합원은 "기록되지 않은 연해주 독립운동 흔적을 돌아볼 수 있어서 너무 감동이었다"고 했다. 이상래 조합원은 "감정 기복이 굉장히 컸던 여행이었다. 미친 듯이 즐거웠다가 슬펐다가 분노스럽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잘 이끌어내주신 박흥수 대장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시베리아 시간 여행'을 진두지휘했던 대장 박흥수 기관사도 조합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6박 7일 같은 4박 5일 일정을 마쳤는데, 극동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역사를 살펴보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그러한 것들을 우리 프레시안 조합원들과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정말 시간 여행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 끝에 우리가 서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저는 러시아에 많이 와봤지만, 올 때마다 다른 것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한 뼘씩 커나가는 것 같고, 다른 분들도 성장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여행이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이런 여행은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분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면서 환호 지르거나, 역사적 장소에 갔을 때는 숙연해지거나 했던, 여행이 준 에너지를 오랫동안 간직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열심히 또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끝) 

▲블라디보스토크 '영원한 불꽃'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프레시안(박정연)
<'시베리아 시간여행' 시리즈 모음>

서어리 기자 naeor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박정연 기자 daramj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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