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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5일 수요일

50년 끈질긴 추적... 일본인도 감동시킨 '지쿠호의 기록자'

19.06.06 10:54l최종 업데이트 19.06.06 10:54l






 강제징용 현장을 찾은 김광열
▲  강제징용 현장을 찾은 김광열
ⓒ 추미전

평생을 일본에서 산 '재일 향토사학자'이자 2017년 고인이 된 고 김광열 선생이 2019년 6월 6일 현충일을 기념해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이 뚜렷한 사람들에게 수여한다는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살아생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으나 사명감을 가지고 홀로 걸어갔던 길, 그 길의 의미를 너무 늦게 인정받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그의 수고를 알아주니 하늘에서나마 기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지난해 초 다큐멘터리 <끌려간 사람들, 지쿠호 50년의 기록>을 준비하면서였다. 그가 한 일들을 하나씩 알아갈수록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김광열의 헌신 : 13만 건에 달하는 강제징용 자료 모으다

2018년 2월 국가기록원에 재일 향토사학자 김광열이 기증한 기록물들이 도착했다. 김광열이 50년 동안 수집한 자료들은 사과 상자 43개에 달했다. 숫자로는 13만 건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자료였다. 국가기록원에 개인이 기증한 기록물로는 2번째, 외국에 거주하는 개인이 기증한 기록물로는 최고 많은 양이었다.
 
 김광열의 기록장, 자신이 모은 기록들을 언제, 어디에서 수집했는지 과정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기록장
▲  김광열의 기록장, 자신이 모은 기록들을 언제, 어디에서 수집했는지 과정을 일일이 기록해 놓은 기록장
ⓒ 추미전

기증 목록은 문서 형식의 기록물뿐 아니라 캠코더로 직접 찍은 영상, 직접 촬영한 사진, 녹음테이프 등까지 다양했다. 기록물의 내용은 전부 강제징용과 위안부들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김광열은 일제강점기 많은 조선인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후쿠오카에 살았다. 1970년대 후반 개발의 바람이 불어닥치면서 조선인 강제징용의 현장과 자료들이 무관심 속에 사라져 가는 것을 목격한 그는 이 사료들을 지금 모으지 않으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에 자료 수집을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월급을 준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 시작한 일이었다. 

일제강점기 후쿠오카는 부산에서 출발한 강제 징용자들이 첫발을 디딘 일본 땅이었다. 후쿠오카에서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지쿠호 일대는 조선인 징용의 대표적인 현장이다. 김광열은 지쿠호 일대 탄광들을 직접 다 찾아다니면서 남은 자료를 수집했다. 수집할 수 없는 자료들은 손으로 일일이 기록했다.
 
 후쿠오카 오노우라 탄광명부 원본
▲  후쿠오카 오노우라 탄광명부 원본
ⓒ 추미전

석회산이 많은 지쿠호 일대는 지금도 석회석 채취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 일대에 있던 오노우라 탄광이 폐광을 준비하던 1980년대, 김광열은 여러 차례 탄광사무소를 찾았다. 광부 명부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의 이름을 필사하기 위해서였다. 매일 찾아와 조선인 광부의 이름을 하나씩 필사하는 김광열의 열정은 일본인 직원조차 감동하게 할 정도였다. 

일본인 직원은 탄광이 문을 닫던 날 '조선인 명부'가 적힌 원본 노트를 김광열에게 몰래 줬다. '오노우라 탄광 조선인 명부'는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조선인 광부명부' 중 유일한 원본으로 이 안에는 탄광 근로자들의 입소 일자와 본적, 해고 이유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김광열의 끈기 :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 봉안묘역 만들다
 
13만 건에 달하는 자료 가운데는 조선인 명부 외에도 귀한 자료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인 강제동원 기업으로 알려진 아소광업은 11개의 탄광산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10개의 작업장에 조선인 광부들을 동원했다. 

아소광업은 일제강점기의 모든 자료를 자신들이 설립한 도서관에 보관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접근을 아예 차단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광열의 기록물 가운데는 아소광업의 '건강보험 대장 원본'이 있었다. 이 자료가 향후 강제징용의 진실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기대하고 있다.
 
 김광열이 수집한 아송광업건강보험대장- 국가기록원
▲  김광열이 수집한 아송광업건강보험대장- 국가기록원
ⓒ 추미전

김광열의 열정은 기록수집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에 조선인 유골이 방치돼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직접 발품을 들여 찾아갔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유독 탄광으로 끌고 간 이유는 탄광이 일본인들이 가장 피하는 고된 노동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지하 수백미터의 땅 밑에서 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혹사당한 조선인 노동자들, 후쿠오카 호슈 탄광에 17살에 끌려갔던 광부 안용한이 남긴 신세 한탄 노래 한 구절은 조선인 광부들의 노동이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숯 파러 왔노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고향으로부터 쌀가루 부쳐왔네,
쌀가루 받아들고 눈물만 흘렸네

- 일본 호슈 탄광에 강제징용됐던 고 안용한씨의 신세타령 중에서

탄광 광부들 가운데는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아소광업에서 일하다 죽은 조선인들의 유골 항아리 수십 기가 동굴에 방치돼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광열은 직접 아소광업을 찾아간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방문한 김광열은 아소 측에 격식을 갖춰 조선인들의 유골을 봉안해 달라고 요구한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 방문이었을 텐데 김광열은 어떻게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었을까? 김광열을 알아가면서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결국 김광열의 끈기가 이겼다. 아소광업은 김광열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다가와시 미타테 묘지 한쪽에 조선인들의 유골 봉안실을 따로 만들었다. 김광열은 죽을 때까지 이 봉안실을 책임지고 돌보았다. 

강제징용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김광열의 행적에 조국의 누구도 관심 두지 않을 때 김광열의 활동을 주시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일본 우익단체들이었다. 우익단체들은 김광열의 집 앞에서 시위하고 칼 같은 위협적인 도구를 넣은 우편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광열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김광열의 집은 날이 갈수록 자료들로 가득 찼다. 자료들은 목록별로 잘 분류가 돼 1층을 다 채우고 2층까지 채웠다. 타지에 있는 아들 가족이 집을 방문하면 머물 방이 없을 정도로 자료로 가득 찼다. 그의 아들은 모든 자료를 국가기록원으로 넘긴 뒤 이런 고백을 했다.

"자료를 다 넘기고 나서야 우리 집이 이렇게 넓은 줄 처음 알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이 일을 한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김광열은 자신의 돈을 들여 현장을 찾고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또 기록했다.

김광열이 없었다면 기록도 없다

그는 왜 평생 이 일에 몰두한 것일까? 김광열이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는 그의 아버지 김선기가 일제강점기 핵심적인 독립투사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 김선기는 대구 신간회를 만들고 대표로 활동했다. 독립투사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 인물이다.

김광열은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시대에 감옥은 아니지만 일본으로 끌려와 희생된 이들의 삶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2000년대 들어 후쿠오카 역사기행을 이끌었던 김광열은 젊은이들 앞에서 자신이 강제징용 자료 모으기에 평생을 바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 사람들이 다 메워버리고나면 우리 역사는 다 지워지는 것이지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여기서 고생하고 눈물 흘리고 죽고 살고 그 역사가 여기 다 있고 무너져 가고 있다. 이거 그대로 나는 모른다고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 역사는 어디서 찾느냐,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김광열 생전 육성 중에서
 
 김광열이 기록을 위해 지니고 다녔던 녹음기와 카메라
▲  김광열이 기록을 위해 지니고 다녔던 녹음기와 카메라
ⓒ 추미전

그의 이야기는 2018년 11월 경남 MBC <끌려간 사람들, 지쿠호 50년의 기록>으로 제작돼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올해 그가 국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역사 속에 묻힐 뻔한 그의 노력을 알리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에 제작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주어지는 일도 아닌 길, 오히려 갖은 겁박과 위협을 감수해야 했던 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50여 년에 걸쳐 한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알아갈수록 김광열의 삶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이해타산을 뛰어넘어 묵묵히 걸어간 이들의 굳건한 발자취가 종종 역사의 의미 있는 한걸음이 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바람결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13만 건의 자료들은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종류에 따라 분류하고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작업을 거치고 있다. 올해 말 그의 자료들이 공개되면 강제동원의 진실을 밝히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기억하기 위해 50여 년간 기록하는 수고를 스스로 감당했던 김광열, 이제는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할 때이다. 국민훈장 동백장은 그를 기억하는 첫 신호탄일 뿐이다. 13만 건에 달하는 그의 자료들을 통해 강제징용의 역사적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갈 때 '지쿠호의 기록자' 김광열의 수고는 진정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자의 개인블로그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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