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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27일 목요일

조선 애국가에 깃들어 있는 사연

리준무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9/06/28 [00:11]

 
애국가에 깃들어 있는 사연
▲     ©자주일보

≪애국가≫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3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 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백두산 기상을 다 안고 근로의 정신은 깃들어
진리로 뭉쳐진 억센 뜻 온 세계 앞서 나가리
솟는 힘 노도도 내밀어 인민의 뜻으로 선 나라
한없이 부강하는 이 조선 길이 빛내세
나는 북조선<애국가>의 가사를 읽어볼 때나 장엄하게 울러 퍼지는 선율을 들어볼 때 마다 느껴지는 강한 감동이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영도자의 만년을 내다보는 원대한 포부와 넘치는 기상이 노래 전체에 용솟음치고 있으며 드높은 민족의 존엄과 영예가 가슴 뿌듯하게 안겨온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승화시켜 주고 인민들에게 자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
슬기로운 인민들이 신성한 노동으로 이루어낸 화목한 사회, 일심단결을 승리의 보검으로 굳게 믿고 뭉쳐선, 인민들의 뜻으로 세워진 나라,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신념과 어떤 일이 있다 해도 강성대국건설(자주적 통일)은 자기 힘으로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배짱과 고집이 노래 속에 웅비하고 있다.
내나라 푸른하늘 아래의 한줌의 흙 까지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이 노래는 길가에 피어있는 들국화보다도 소박하고 순수하다.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기댈데가 없었던 북조선의 민중들은, 끝내는 부자들의 편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신에 대한 환상도 없다. 다만 진리로 뭉쳐진 민중들의 힘만을 하늘같이 믿고 일어선 나라라고 노래는 힘있게 외치고 있다.
박세영 작사, 김원균 작곡으로 2절로 구성된 ≪애국가≫
“아침은 빛나라”라고도 불리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가’는 1946년 여름 시인 박세영(1902~1989)이 썼다. 곡은 ‘김일성장군의 노래’ 작곡가인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원균(1917~2002)이 1947년 6월 곡을 붙였다. 애국가의 가사는 1절과 2절이 있다. 애국가는 4분의 4박자에 내림 “나” 대조(B Flat Major)에 ‘약간 느리고 장중하게’ 부르도록 요구하고 있다
1992년 4월 약 20년 만에 사회주의 헌법이 개정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는<애국가>이다."라는 조항(제170조)이 처음 채택 되었으며 이 헌법조문은 1998년 9월 헌법 개정 때도 제165조에 그대로 명기되어 있다.
조국해방기념 중앙보고대회가 끝난 뒤인 1946년 8월 16일 김일성주석은 창작가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애국가>도 없이 조국해방 기념보고대회를 하고 나니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며 <애국가>가 없는것에 대해 못내 아쉬워 하였다. 김일성주석은 애국가의 창작사업을 몸소 발기하여 창작의 방향과 실천상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구체적인 해결방도들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며 본격적인 <애국가> 창작사업에 들어갔다.
김일성주석은 나라의 주인 된 기쁨을 안고. 새 조국 건설에 발벗고 나선 우리민중들은 자주독립국가의 진정한 애국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빛나는 조국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고 하면서 그들이 부르는 국가는 조국에 대한 열렬한 찬양과 대중적인 노래로 되어야 한다고 간곡한 당부를 하였다.
김일성주석은 광복된 우리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고 자기의 손으로 정권을 세우고 또 민족문화를 건설하고 있는데 아직도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애국가>창작사업에 모든 작가와 예술인들이 참가할 것은 물론 작곡가가 아니더라도 창작하고 싶은 사람은 다 참가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애국가에 꼭 담아야 할 사항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3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고 산들은 기세차고 장엄하며 전원에는 오곡백화가 무르익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지하자원과 금은보화도 무진장 합니다. 우리인민은 반만년 오랜 역사를 가진 인민이며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인민입니다. 우리 인민은 먼 옛날부터 외적을 물리치고 우리강산을 피로써 지켰으며 특히 우리 항일유격대원들은 일제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손에 무장을 들고 15성상 영웅적으로 싸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조국과 슬기로운 투쟁전통을 가진 조선인민의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노래에 담아야 합니다. 인민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면 자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욱 솟아날 것 입니다.”라고 창작가들에게 애국가에 담아야 할 분명한 지침을 절절하게 강조 하였다.
애국가가 창작되어 선포 될 때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애국가의 작곡가이며 인민 예술가인 김원균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수령님의 강령적인 가르침을 받으면서 나는 진정 수령님이시야말로 인민들의 사상감정과 염원을 한 몸에 체현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그이께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철저하시고 가장 열렬하신 절세의 애국자 이시라는 것이 더더욱 가슴에 와 닿았다.” 라고 말했다.
1947년 5월 초순 박세형의 시가 애국가의 가사로 채택 된 뒤 제출된 여러 작품들 중에서 선발한 두 편의 창작곡이 최종심사를 받기 위한 <애국가>후보작으로 등록이 되었다. 김일성주석이 참석한 가운데 드디어 <애국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역사적인 시청회(실제연주를 들어보며 혹시 오류가 없는지 점검해 보는 비공식공연) 순간이 다가 왔다. 공정한 심사를 하기 위해 작곡가의 이름을 표시하지 않고 번호로 표시해 인정이나 안면 등에 영향을 받지 못하도록 하라고 세심한 주의를 주었다.
역사적인 시청회장에는 새로 탄생할<애국가>를 만나려고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날은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도 불구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청회장에 들어서는 김일성주석을 본 김원균은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이 줄줄 흘러 어찌할 줄을 몰랐다고 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시청회 때는 자신에 대한 노래라고 매번 사양하던 김일성주석이 이번에는 친근하게 창작지침도 주고 몸소 시청회에 까지 참석해주니 어찌 감동이 되지 아니하였 겠는가?
1947년 6월 27일, 그날은 날씨가 찌는듯이 무더웠다. 한 일군이 선풍기를 가져다 그분 옆에 설치 하려고 하자 김일성주석은 선풍기를 회의장 가운데에 놓고 모두에게 바람이 골고루 가도록 하라고 했다. 시원한 바람을 일구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한동안 바라보던 김일성주석은 오늘은 인민들이 그렇게 기다리는 <애국가>가 나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냐고 하면서 좀 덥기는 하지만 선풍기를 끄는 것이 어떻겠는가 얼마나 힘을 들여 만들어낸 열매인가고 뜨겁게 말하였다.
창작가들이 내놓은 작품을 이처럼 귀중히 대해주는 김일성주석의 배려가 예술인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였고 시청회에 온 참가자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모두들 주석님을 우러러 보았다. 그러나 가사를 쓴 시인도 노래를 부를 합창단원들도 선풍기 소리가 <애국가>를 감상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에 대해 미쳐 주의를 돌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피아노 반주가 흘러나오고 합창단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번호 100번의 작품이 연주되고 있었다. 많은 신청작품 중에 결선에 선발된 두곡중 한 곡은 100번으로 하고 또 다른 하나는 50번이라고 정하였다. 마음은 설레이고 심장은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장중한 애국가의 선율이 힘차게 울려 퍼지자 모두들 엄숙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주석은 무엇인가를 가끔 수첩에 적고 있었다. 이때에 100번의 노래와 50번의 노래연주가 모두 끝났다.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기었다. 청중들은 김일성주석의 말씀을 들으려고 흥분된 마음으로 숨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시청회에서 새로 지은 <애국가>를 다 들어보고 난 김일성주석은 “노래를 들어보니 마음이 고상해지고 삼천리강산이 보이는 것 같아 노래에 사람들의 마음을 틀어 잡는 데가 있다”고 흐뭇해 하면서 첫 번째 노래를 한번 더 들어 보자고 요청을 하였다. 첫번째 노래를 다 들어본 다음 두번째 노래도 들어 보자고 하였다. 두 번째 노래가 끝난 다음 주석께서는 먼저 들어본 곡이 장중한 맛이 있고 무게가 있으니 <애국가>로 하고 뒤에 들은 곡은 제목을 고쳐 그대로 부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애국가≫창작에 대한 제언
김일성주석은 이 노래를 듣고난 후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으로부터 ‘길이 받드세’까지는 가사를 반복하여 한번 더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며 "우리나라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인데 어떻게 한번만 부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한번만 부르고 끝나면 곡이 너무 단조로우니 한번 더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율로 보아도 더 효과적이고 음악적인 면에서도 한결 장중해지니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 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일성주석의 이러한 지적과 가르침은 비범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애국가>를 작사 한 사람이나 작곡한 사람들 그리고 시청회장에 참석한 그 누구도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연주된 첫 번의 노래가 김원균작곡 <애국가>이고 두 번째 곡은 오늘날 제목을 바꿔서 부르고 있는 리면상의 <빛나는 조국>이다. 오늘도 <빛나는 조국>은 <사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뮤직 페스티발)의 개막식 등 중요한 국가적 행사에서 귀중하게 사용되고 있다.
김일성주석이 <애국가>의 탄생을 선포하는 그 역사적인 순간 장내에서는 폭풍 같은 박수와 환호가 터져 올랐다. 시청회 참가자들은 모두가 김일성주석을 우러러보며 음악예술에 대한 그분의 천품 앞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글줄마다에 스며있는 가사의 의미를 되새겨 볼수록 절세위인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사상을 알게되고 가슴을 뭉클하게하는 선율의 진한 감동은 삼천리 내 조국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뜨겁게 느끼게 한다. <애국가>를 듣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 이던지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쳐 나가겠다는 각오를 하게 될 것이다.
지난날 이북의 민중들은 이 노래를 들으며 가열찬 사회주의 조국건설에서 나라를 지켜 냈으며 태양의 위업을 받들고 주체의 낙원을 건설하였다. 오늘도 이북은 이 노래를 들으며 정치강국 사상강국 군사강국 예술 강국을 이룩했으며 또 나라를 과학기술강국의 궤도에 올려 놓았다. 이제는 경제강국을 이루기 위해 대계도를 건설해 놓았고 희천에서도 그 용맹을 떨치고 있다.
이 처럼 김일성주석의 숭고한 뜻이 어려있고 현명한 영도의 만년대계가 아로새겨져 있는 <애국가>는 주체조선의 찬란한 빛을 뿌리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세계만방에 끝없이 울려 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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