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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3일 월요일

대륙을 향한 분단의 현실, 연해주를 가다

대륙을 향한 분단의 현실, 연해주를 가다희망래일 대륙학교 2기의 2박3일 연수 동행기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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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24  07: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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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전 10시 1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약 2시간 40분의 비행. 분단은 하늘길도 끊어놓았다. 그렇게 비행기는 중국 간도지역 상공을 지났다.
사단법인 '희망래일'(이사장 이철)이 운영하는 대륙학교 2기생 등 30명은 13일부터 15일까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하산 등 연해주 연수를 떠났다. 대륙의 꿈을 안은 이들의 연해주 기행, <통일뉴스>가 함께했다.
  
▲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변에 자리한 '이상설 선생 유허비'. 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다. 올해는 헤이그밀사사건 110년,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기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수이푼강. 이상설 선생의 유해는 동해로 향했을 것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기행단은 곧장 우수리스크로 향했다. 약 1시간여에 걸쳐 이동한 버스는 일행을 이상설 선생 유허비로 안내했다. 이상설. 1907년 고종 황제의 밀지를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알리려던 인물.
북만주에서 만주리까지 총괄하는 대종교 북도본사를 맡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설 선생은 1917년 연해주에서 병사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고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원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마라."
선생의 유언을 산자는 야속하게도 그대로 받들었다. 동해로 흐르는 수이푼강. 헤이그밀사사건 110년, 이상설 선생 순국 100주기. 이 곳에 이상설 선생의 유해가 뿌려졌다는 표식이 덩그러니 남았다. 선생의 유해는 분단된 한반도 동해를 오르내리리라.
  
▲ 발해 옛터 '솔빈부'. 말을 기르던 곳으로 광야가 펼쳐졌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일행을 태운 버스는 보다 더 오랜 역사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발해 옛터 '솔빈부'. 5경 15부 중 말을 방목해 기르던 솔빈부는 말그대로 광야였다. 늦가을의 바람이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었다. 잊혀진 역사 발해 그리고 후손들은 일제의 억압을 끊어내고자 이 땅을 다시 찾았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하느냐"라던 윤심덕의 자조섞인 노래가 어울린 듯 아닌 듯. 독립투사들은 과연 너른 발해 옛땅을 달리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분단의 역사, 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상념에 들게 하는가. 솔빈부에 부는 바람은 어제도 오늘도 같으리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기행단은 최재형 선생 고택을 방문했다. 우리의 역사에서 잊혀진 최재형이라는 이름 석자 만큼이나 고택은 형편이 낡고 초라했다. 여기저기 벗겨진 페인트, 스산하기만 한 집안.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살았던 선생의 온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 러시아 한인사회의 표상, 최재형 선생이 1918년부터 1920년까지 거주한 고택이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최재형. 러시아 한인사회의 표상.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후인물. 1860년 8월 함경북도 경원의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로 이주한 선생은, 가난에 못이겨 11살의 나이에 가출했다. 그리고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으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하지만 그는 '검은머리 러시아인'에 그치지 않았다. 흔히 말하는 '검은머리 미국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재형 선생은 러시아 한인 지도자로 재러 한인의 생활안정과 동포 자녀 교육 사업에 힘을 썼고, 러일전쟁 이후 국권수호를 위해 의병운동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으로 선임되는 등 러시아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하지만 일본은 연해주 지역 러시아혁명세력을 제거하고 한인 독립운동을 말살시키기 위해 1920년 '4월참변'을 일으킨다. 선생도 참변으로 희생됐다. 그리고 분단과 함께 '최재형'이라는 이름은 우리의 역사책에서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선생의 고택을 박물관으로 탈바꿈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더욱 뜻깊은 것은 한국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러시아 정부가 협조하고 있지만, 공사의 주체는 바로 고려인들이라는 것. 어스름한 시각에도 고려인들은 공사장에서 한창 선생의 뜻을 복원하고 있었다.
현재 학교로 쓰이는 '전로한족중앙총회결성' 장소를 지나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고려인 문화센터'를 방문했다.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건립된 문화센터에서 펼쳐진 공연은 북한식 조선춤이었다. 분단의 역사는 해외에서 통일된 느낌이랄까. 고려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의 공연이 분단의 현실을 느끼게 해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고려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리랑 가무단'이 북한식 조선춤인 칼춤을 선보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우수리스크에서 하룻밤을 보낸 기행단은 이튿날 14일 조선인 이주와 고려인 강제이주의 긴 여정을 더듬었다.
라즈돌로예역.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잇는 연해주 1번 국도와 북한, 러시아, 중국을 잇는 대륙횡단 열차 중간 기착지. 작고 허름한 역에서 1937년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길에 올랐다. 극동지역에서의 일본 정보원 침투를 차단한다는 이유로, 스탈린은 고려인을 열차에 강제로 태웠다.
18만여 명의 고려인들은 야간에, 라즈돌로예역에 집결해 맨몸으로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다. 슬픔을 간직한 역사 내부에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입김이 공기를 감싸고 나라 잃은 백성의 서글픈 눈망울이 여기저기 맺혀있는 듯했다. 우리는 고려인의 역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기행단을 태운 버스는 조선인이 처음 연해주 땅을 밟던 포시에트항, 목허우로 향했다. 버스가 달린 도로는 하산과 라즈돌노예를 잇는 군사전용도로로, 최재형 선생이 당시 조선인을 모아 건설했다. 100년이 가까운 도로는 여전히 러시아 연해주의 유일한 도로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 도로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곡괭이질을 하며 땀을 흘렸을까.
  
▲ 라즈돌로예역. 1937년 소련의 강제이주정책으로 18만 여 명의 고려인들이 이 곳에 집결에 중앙아시아로 떠나야 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러시아 최초 조선인 마을 '지신허'로 향하는 길.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상념에 젖었을 찰나, 13도의군 유인석 장군이 1년간 머물렀다는 바라바쉬 마을을 지나 러시아 최초의 조선인 마을인 '지신허'에 도착했다. 1860년 이전부터 두만강 주변에 살던 조선인들은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갔다. 1863년 최운과 양응범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뤘다.
1864년 60가구 308명에서 1868년 165가구, 1869년 766가구가 거주하고 1900년대에는 1천6백명이 살았다. 1937년 강제이주정책으로 마을이 해체되기 전까지 '지신허'는 대륙을 향한 조선인들의 꿈이 서린 곳이었다.
가수 서태지의 기부로 '지신허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하지만, 기행단은 철망에 가로막혀 대륙을 꿈꾼 조상의 발자취를 까치발을 들어 바라만 봐야 했다.
우수리스크를 출발한 지 4시간이 가까웠을 시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도착했다. 한말 의병운동의 중심지로 평가되는 '연추'가 바로 이곳이다.
  
▲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자리한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 세 차례의 이전으로 이 곳에 위치하게 됐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대륙학교 2기 연해주 연수에 참가한 이들이 단지동맹비 앞에서 '기다리다 목 빠진 역장'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연추의 첫 방문지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 12명은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왼손 무명지를 잘라 피를 모아 '대한독립'을 적었다. 그리고 조선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역사를 기리기 위한 '단지동맹비'의 이력은 말그대로 수난의 길이었다. 2001년 추카노보 강변에 세워졌지만, 상습 침수지대에 있어 방치된 상태였다. 2007년 비석은 이전했지만, 러시아 정부가 국경수비대 발급 출입증이 없는 외국인 출입을 제한해 접근이 어려웠다. 그러다 2011년 크리스키노에 현지 농장을 갖고 있는 유니베라(옛 남양알로에)의 협조로, 유니베라 농장 앞에 우뚝섰다. 지금은 꾸준히 제대로된 관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동양평화론을 펼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기리고자, 대륙학교 2기생들은 희망래일이 펼치고 있는 '기다리다 목 빠진 역장'을 연출했다. 의사의 뜻이 분단을 넘어 통일로 그리고 대륙으로 뻗어가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 러시아 크라스키노 전망대에서 바라본 연추 일대.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크라스키노 전망대. 1938년 두만강 부근에서 소련과 일본의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한 것을 기념한 하산전투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발해 옛성 염주성과 연추가 한 눈에 보이는 곳.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박차를 가해 말 달려왔다는 지역. 이성계는 자신이 세운 나라가 일본에 의해 망할 것을 알았을까.
탁트인 조망을 뒤로한 대륙의 꿈은 점차 분단의 현실에 다가섰다. 기행단은 포시에트항에 도착했다. 첫 한인 도착지라는 느낌보다 가로막힌 남북.러 경제협력의 터라는데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포시에트항은 러시아 시베리아 석탄을 실은 열차의 경유지이다. 이곳을 거쳐 하산역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열차가 내달린다.
하지만 지난 9월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러시아 측의 외국인 출입불허 조치로 정작 가보고 싶던 북.러 경제협력의 현장은 볼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 당시 '5.24조치' 예외로 인정받아 세 차례 시범운송까지 진행됐지만, 정부의 독자 대북제재로 중단된 상태.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내세워, 나진-하산프로젝트에 우리도 동참할 수 있으리라던 꿈은, 문재인 정부의 강력한 대북제재와 압박으로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 포시에트항. 러시아 시베리아 석탄을 실은 열차 중간기착지로, 열차는 하산역을 지나 북한 나진항으로 향한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5시간 가까이 밤길을 내달려, 안타까움의 심정으로 지친 몸을 느낄 겨를도 없이, 버스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행 마지막 밤을 보냈다.
15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아침은 청량했다. 독수리 전망대에 올라 러시아 극동지역 부동항인 금각만을 바라보고, 블라디보스토크역, 블라디보스토크항, 혁명광장, 영원의 불꽃, 니콜라이 2세 개선문 등을 둘러봤다. 그리고 이어진 기행은 또 다시 마음을 저미게 했다.
먼저, 철제 울타리 넘어 조명희 문학비를 바라봤다. 일제당시 러시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민족문학가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동참했으며, '낙동강', '짓밟힌 고려' 등 저항시를 발표한 작가. 하지만 그는 1937년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됐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문학비는 방문객의 체온을 느끼지 못한 채 쓸쓸히 철망 너머 한 켠에 서있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조명희 문학비. 철제 울타리에 가로막혀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 신한촌 기념비. [사진-통일뉴스 조정훈 기자]
마지막 방문. 버스는 신한촌 기념비로 향했다. 일제시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들은 개척리에 모여살았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이유로 한인들을 서북편 외곽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잡초가 무성한 자갈밭을 일구며 한인들은 '신한촌'을 형성했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이다.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신한촌에 러시아인들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이 곳이 신한촌임을 증명하는 '신한촌 기념비'가 세워졌다. 물, 바람, 구름처럼 떠돌아야 했던 한인을 기억하려는 듯 세 개의 기둥이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고령의 고려인이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었다. 너희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이곳에 살아 있었음을 증명하듯. 신한촌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하는 그의 꿈은 우리 모두의 몫이었다.
2박3일의 짧은 기행이 끝났다. 간도 하늘 위를 날던 비행기는 일본 열도를 따라 내려왔다. 3시간이 넘는 비행. 대륙으로 향하던 선조들이 걸어갔던 길을 오늘의 우리는 빙 둘러가야 했다. 분단의 아픔은 금단의 선으로 남아 남한을 섬으로 만들었다. 대륙을 향한 꿈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할 때 꿀 수 있다. 그리고 분단을 끊어내는 힘은, 바로 우리자신, 평화를 향한 외침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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