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떠받치는 죽음들

김혜형 작가, 농부
김혜형 작가, 농부

파리매의 꿀벌 사냥

텃밭에서 일하다 날아가는 파리매를 봤다. 두 마리가 엉겨 날기에 짝짓기인 줄 알았는데, 쇠비름 줄기에 앉은 걸 보니 꿀벌을 사냥한 파리매다. 파리매는 파리목에 속하지만 파리의 천적이다. 날아가는 곤충을 매처럼 덮쳐 잡는 포식자인데, 파리뿐 아니라 꿀벌, 말벌, 무당벌레, 풍뎅이, 잠자리, 메뚜기, 심지어 동족까지도 가리지 않는다.

파리매는 길고 강력한 다리로 사냥감을 붙잡고 주둥이를 찔러 넣어 체액을 빨아먹는다. 공중을 나는 사냥감을 날렵하게 채는 실력자라 ‘암살자 파리(Assassin fly)’로 불리지만, 말벌이나 잠자리처럼 크고 힘센 곤충에겐 거꾸로 사냥당하기도 한다. 먹고 먹히는 일이 반드시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꿀벌을 사냥한 파리매.
꿀벌을 사냥한 파리매.

거미도 희열에 들뜰까

거실 유리창이 거대한 산왕거미의 거처로 뒤덮였다. 창밖의 거미줄을 걷어내지 않고 지켜본다. 산왕거미는 몸집도 크고 거미줄 지름도 1미터가 넘는다. 사람 사는 집 유리창에 거미줄을 친 것은 매우 영리한 전략이다. 저녁이 되면 불빛에 끌려든 날벌레들이 거미 앞에 속속 도착할 것이다. 이 자리가 먹고살기에 유리하다는 걸 녀석은 어찌 알았을까. 거미줄을 걷어내지 않는 인간을 만난 건 순전히 운이겠지만 말이다.

 

산왕거미가 사슴벌레를 거미줄로 칭칭 감고 있다.
산왕거미가 사슴벌레를 거미줄로 칭칭 감고 있다.

소나기 지나간 오후, 운 나쁜 사슴벌레 암컷이 거미줄에 걸렸다. 거미줄이 휘청하자 빠르게 달려드는 산왕거미, 흰 거미줄로 팽이 돌리듯 사냥감을 팽글팽글 돌려버린다. 놀라운 순발력이다. 사슴벌레는 버둥거릴 틈도 없이 은빛 거미줄로 꽁꽁 포박된다. 거미줄이 그대로 수의가 된다.

다리 하나를 겨우 달싹거릴 뿐 꼼짝 못 하는 사슴벌레, 먹잇감을 대롱대롱 허공에 걸어놓고 제자리로 어슬렁어슬렁 돌아가는 산왕거미. 죽음과 삶이 한순간에 결판나는 야생의 저편을, 안전한 유리창 이편에서 지켜본다. 포식자에게 붙잡힌 순간 사슴벌레는 절망감으로 괴로울까. 사냥감을 붙잡는 순간 거미의 몸은 희열로 들뜰까. 그들도 인간처럼 공포와 기대로 감정이 널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줌 싸고 도망가기

쇠뜨기 한 무더기를 호미로 콱! 찍어 올리는 순간, 축축한 흙 속에서 참개구리가 펄쩍 튀어나온다. 뜨거운 햇살을 피해 흙 속에서 쉬다가 날벼락을 맞았구나.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감싸 들고 이리저리 살펴본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서늘한 휴식을 파탄낸 게 미안해서 풀숲으로 개구리 엉덩이를 밀어 넣는다. ‘해가 뜨거우니 거기서 쉬렴.’

순간, 참개구리가 도약한다. 풀 밑에 발사체라도 있는 듯 폭발적인 속도로 피융! 날아간다. 동시에 녀석의 꽁무니가 분노의 오줌 줄기를 사선으로 분출한다. 개구리가 오줌을 내보낸다기보다 오줌이 개구리를 날려 보내는 것 같다.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온 오줌 줄기를 반사적으로 피한다. 개구리는 위협을 느낄 때 오줌을 싼다는데, 손에 잡혔을 땐 가만있다가 놓아준 후에야 뒷북이라니! 오줌 줄기가 제법 긴 것으로 보아 용량 또한 상당할 것 같다. 풀밭 저편에 착지할 때 녀석의 몸무게는 필시 반으로 줄었으리라.

 

참개구리야, 뭘 쳐다보니?
참개구리야, 뭘 쳐다보니?

집 뜰에 참개구리가 많다. 정원에도, 텃밭에도, 잔디밭에도, 발밑에서 개구리들이 펄쩍펄쩍 뛴다. 매끈한 청년 개구리가 대부분이지만 두꺼비 못잖게 몸집 비대한 나이 든 개구리도 드물게 본다. 그런 참개구리를 만나면 감탄사가 터진다. 대견하고 장해서. 저만큼 크려면 얼마나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을까. 뱀으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도망친 경험은 얼마나 많았을까.

뱀의 몸으로 스민 참개구리

정원에서 풀을 매는데, 께엑~ 께엑~! 다급한 비명소리가 난다. 놀라서 돌아보니 두어 걸음 떨어진 꽃밭에서 유혈목이가 참개구리 엉덩이를 물고 있다. 개구리가 비명을 지르며 네 다리를 바둥거린다. 내가 다가가니 개구리를 문 뱀이 몸을 움츠린다. 나를 피해 슬며시 뒤돌아서더니 머리를 곧추세우고 화단의 경계석을 넘어간다. 뱀의 입에 걸린 개구리가 허공에서 덜렁덜렁 흔들린다. 뱀이 스르륵 난초 그늘로 숨는다.

 

참개구리를 사냥한 유혈목이.
참개구리를 사냥한 유혈목이.

뱀이 천천히 개구리를 삼킨다. 개구리의 뒷다리가 뱀의 입속으로 빨려든다. 조금씩 조금씩 빨려들 때마다 참개구리는 께엑 께엑 울면서 몸부림친다. 나는 마음속으로 빈다. 뱀의 독이 빠르게 개구리를 마비시키기를. 제발 이 고통이 짧기를. 뱀이 턱을 움직여 개구리를 빨아들인다. 개구리의 배와 몸통이 뱀의 입속으로 빨려든다. 잠시 조용하던 개구리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괴성을 지른다. 끼악~ 꿰에엑~!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다.

참개구리의 머리가 반쯤 뱀 아가리 속으로 들어간다. 앞발은 ‘앞으로 나란히’ 하듯 길게 뻗는다. 개구리의 까맣고 반짝이는 눈이 마지막으로 나를 본다. 그 눈마저 뱀의 입속으로 사라지고, 삐죽 나온 두 개의 앞발도 잠시 후 완전히 사라진다. 뱀의 분홍 아가리가 닫히는가 싶더니 곧 까만 혀가 날름날름 튀어나온다. 쩝쩝 만족스러운 입가심이다.

목이 불룩해진 뱀이 난초 그늘에 평온히 엎드린다. ​개구리는 뱀의 목 부위에 둥그스름하게 놓여 있다. 이제 울음을 그치고 뱀의 몸에 스며야 한다. 목숨으로 목숨을 지탱하고, 죽음으로 삶을 부축하는 시간이다.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돌아 나왔다.

 

메뚜기를 입에 문 참개구리.
메뚜기를 입에 문 참개구리.

먹히는 일이 먹는 일을 떠받친다

연못이 있으니 개구리가 많고 개구리가 많으니 뱀도 많다. 우리 집 마당은 곤충과 양서류와 파충류가 먹이사슬을 이뤄 ‘살아가는’ 공간이다. 폴짝 뛰는 메뚜기를 개구리가 채어 먹고, 달아나는 개구리를 뱀이 물어 삼킨다. 누군가 살려면 누군가 죽지 않을 수 없으니 ‘살아가는’은 ‘죽어가는’의 동의어일까. 유전자의 지속성으로 보면 영구히 사는 일이되 개체의 일회성으로 보면 영원한 소멸이다.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먹히는 일이 먹는 일을 떠받친다. 내가 일평생 먹어온 수많은 살이여. 당신들의 일회성 살을 무수히 먹고 내 일회성의 몸은 아직 건재하다.

 

아기 참개구리
아기 참개구리

폴짝! 아기 참개구리 한 마리가 수로로 뛰어든다. 몸집이 강낭콩만 한 꼬마 개구리다. 올봄 연못에서 깨어난 올챙이 중 하나일 것이다. 저 어린것이 우리 뜰에서 뱀에 먹히지 않고 살아 어른이 될 확률이 몇 퍼센트일까. 저 어린것이 이번 겨울을 나고 새봄을 맞이할 확률은 또 얼마나 될까. 보호망도 안전장치도 없이 포식자 앞에 던져진 삶, 오늘 살지 오늘 죽을지 모르는 삶, 죽음을 옆구리에 끼고 사는 삶.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정해진 운명은 없으니까.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 받아들이지 않고는 달리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지. 어찌해볼 수 있다는 환상으로 시작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의 침입과 확장에 아등바등 저항하다, 어찌할 도리 없이 잠식되어 해체되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끝내 떠나고 말 사람과 도저히 떠나보낼 수 없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 무릎 꿇는다. 아직 먹히지 않은 개구리처럼 아직 여기에 있는 나는, ​다만 오늘의 밥, 오늘의 숨, 오늘의 행위, 오늘의 마음에 기댈 뿐이다. 짧은 인생의 막간에서 돌 틈의 안개꽃, 고양이의 하품, 꽃잎 위의 실베짱이 같은 작은 아름다움에 눈과 마음의 닻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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