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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19일 토요일

가족 모르게 노르웨이로 입양돼 학대 받으며 자랐습니다


[372명 해외입양인들의 진실 찾기] "막내 딸 찾아달라"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며

정경숙 해외입양인  |  기사입력 2023.08.20. 05:07:05


내 한국 아버지를 기억하며,

70년대 막내딸을 찾으려고 헛되이 노력했던 아빠(Appa)의 눈물이 땅에 흘러내렸습니다. 저는 1969년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입양 서류에는 다르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는 갑작스레 아내를 잃었고, 어린 아기와 여자 형제들은 엄마를 잃었습니다. 무너진 채로 홀로 된 한 남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했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한 명은 겨우 12살의 나이에 다른 집에서 일을 시작하여 매달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했습니다. 두 명은 위탁가정에 맡겨졌습니다. 저는 병원에 가야 하는 몹시 아픈 아기였어요. 그래서 저는 어느 기관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아빠는 저도 병원에서 회복한 뒤 위탁가정에 가는 걸로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세 딸이 일시적으로 위탁가정에 맡겨졌다가 나중에 안동에 있는 농장으로 다시 데려오길 바랐습니다. 

둘은 찾았지만 셋째는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아버지는 1974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저를 찾아 헤맸죠. 저는 1970년에 이미 아무도 모르게 노르웨이 해안에 도착했지만, 가족과 친척들은 제가 아직 살아 있다면 한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986년 입양 후 처음 만난 가족과 친척들은 제가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모두 충격에 빠졌습니다.

아버지는 임종하실 때 큰 언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여동생, 경숙이를 꼭 찾아줘."

아버지는 우리 자매가 함께 있기를 바라며 큰 언니에게 자신의 임무를 넘겨주셨어요. 아버지는 마지막 남은 가족들이 유대를 키워가며 가문의 명맥을 잘 이어가길 원하셨어요. 

우리를 통해 그가 살아있고, 그의 이름도 살아있으며, 정 씨 가족은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아버지 자신도 위탁가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는 먼 친척들과 함께 지냈지만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다른 것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노르웨이라는 외딴 섬에 도착해 평생 방치와 심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삶의 고난으로 인한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제가 후천적으로 받은 것이지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이 지금이라도 이런 인신매매를 중단할 것을 촉구합니다. 인신매매에 가까운 이런 입양은 아이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이들의 영혼에 상처를 줄 뿐입니다. 제 조국이 여전히 '서방에 아동을 수출하는 국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저는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미래의 한국 어린이들이 저처럼 더 이상 돈 때문에 서방으로 보내지는 경험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오늘날 한국은 부유한 국가이자 주요 20개국(G20) 중 하나입니다. 이제 한국이 나서서 과거를 청산하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우리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때입니다. 한국은 앞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에 담겨 있는 화합의 의미를 진정성 있게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미래를 위한 저의 기도입니다. 

▲필자의 입양 당시 모습. ⓒ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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