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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7일 토요일

‘이건희 컬렉션’ 함께 누리기의 의미를 묻다

 등록 :2021-08-07 18:54수정 :2021-08-07 19:03


국보 ‘인왕제색도’ 등 44건 전시 인기
고려 불화 두점 밑그림부터 보여주는
터치스크린 자료 고미술-일상 연결
컬렉션 비판까지 담겨야 모두 ‘향유’
[한겨레S] 옛날 문화재를 보러 갔다

국립중앙박물관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인왕제색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인왕제색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초대권도 없다. 기념 도록도 없다. 개막 전에 이미 한달치 관람 예약이 모두 마감된 특별전. 지난달 21일 시작한 국립중앙박물관의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이야기다. 매일 0시0분0초에 시작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치열한 예약 경쟁(16일부터는 18시 예약 개시로 변경)을 뚫어도, 전시를 볼 수 있는 시간은 단 30분. 그래도 입장 시간 전부터 전시실 앞에 차례로 줄을 선 사람들 사이에는 묘한 흥분과 설렘이 맴돌고 있었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일컬어지는 대규모 기증이 이뤄진 것을 기념해 서둘러 마련된 이 작은 전시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크게 엇갈린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면 드디어 전시를 봤다는 기쁨의 인증샷들이 올라오고, 트위터에 들어가면 이 전시만은 절대 보지 않겠다는 맹렬한 비판이 이어진다. 이 온도차조차 한국인들이 삼성을 대하는 복잡한 태도와 닮아 있어 흥미롭다.


 차분하고 단정하게 꾸민 전시실에 배치된 44건의 전시품은 내년 봄으로 예정된 대규모 전시에 앞서 열린 예고편이다. 회화, 조각, 공예품, 전적(고문서) 등의 다양한 분야를 고루 아우른 탓에, 대강 줄거리가 담긴 트레일러보다는 짧고 강렬한 티저에 가깝다. 모두 국보나 보물 등의 지정문화재이거나 그간 전시나 연구에 자주 등장한 ‘아는 얼굴’들로, 최초로 공개되는 유물은 없다.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을 통해 우리 근대 미술의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았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나선 국립현대미술관과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보면서도 못 봤던 고려불화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제216호)이다. 이맘때 습도 높은 한국의 여름 아침을 그대로 그림 안에 옮겨다 놓은 그림을 보노라면, 미술품 감상에도 제철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반면 언뜻 지나치기 쉽지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을 꼽으라면, 고려 14세기에 그려진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와 <수월관음도>라고 답하고 싶다. 정확히는, 이 두 점의 작품 앞에 설치된 터치스크린 ‘고려불화 들여다보기’다. 앞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 기증품들을 어떻게 국민들에게 보여줄 것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가 새로 촬영한 것이다. 전시를 총괄한 것은 미술부이지만, 이 터치스크린에는 박물관에서 2010년대 중반부터 보존과학 연구 성과를 전시로 시각화해왔던 노하우가 담겨 있다.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은 결국 앞으로의 연구에 달려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려 불화인 &lt;수월관음도&gt;, &lt;천수관음보살도&gt;를 첨단기술로 분석해 밑그림은 물론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도록 한 터치스크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려 불화인 <수월관음도>, <천수관음보살도>를 첨단기술로 분석해 밑그림은 물론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는 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도록 한 터치스크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실 고려불화를 실제로 보는 일은 늘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좌절로 시작된다. 수백년의 시간을 버티며 화면이 어둡게 변색된데다, 쉬이 손상되는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전시 공간의 조도도 낮춰놓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 속에 섬세한 비단옷을 겹겹이 걸쳐 입은 우아한 자태의 부처와 보살이 있음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개는 작품 옆에 적힌 설명문을 읽고 안다. 보고 싶은 것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전부 선명한 디스플레이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일상에 익숙해진 관람객들에게, 이 어둑지근함은 그 자체로 낯설고 불편한 비일상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는 터치스크린의 밝은 화면 하나가 고려불화 감상이라는 비일상적 이벤트를 친근한 일상의 영역으로 연결시킨다. 단순히 그림을 크게 늘려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정보들까지 깊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적외선 사진을 통해 채색 전의 또렷한 밑그림을 보여주고, 엑스(X)선 사진으로는 어떤 안료가 어디에 쓰였는지도 찾아볼 수 있게 한다. 이렇게 첨단 기술을 활용한 분석 결과가 연구보고서 한쪽이 아닌 전시실 한가운데에 놓일 때, 관람객은 말 그대로 그림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경험을 통해 유물에 담긴 이야기를 자신의 시간 안에 담게 된다. 그리고 한번 더 어둠 앞에 가 눈을 크게 떠 보는 용기를 얻는다. 그저 전시가 좋아서, 우리 문화재가 좋아서 박물관을 찾는 작은 애호의 마음들에 대한 국립중앙박물관식의 시원스러운 격려처럼 여겨졌다.


기념에서 기억으로

이 기증전의 제목인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를 다시 돌아본다. 문화재 2만1600여 점을 일거에 기증한다는 전례 없는 사건은 단순히 그 수만큼의 실물이 다른 공간으로 옮겨지는 물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저자 이광표는 고미술 컬렉션 기증의 의미를 사회적 기억(집단기억)에서 찾았다. 기증된 유물뿐만 아니라 전시와 연구를 통해 새로 공유되는 모든 이야기가 새로운 문화유산으로 기억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건희 컬렉션을 어떤 방식으로 ‘함께 누리고’ 있는가. 얼마 전 정부는 기증품에 ‘건희’로 시작되는 소장품 번호를 매기고, 등록 절차가 끝나는 대로 새로운 이건희 미술관 건립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현재 예정된 대규모 전시까지, 온통 긍정적인 측면만을 부각하며 정신적 기념비를 세우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학자 제프리 올릭의 지적처럼, 사회적 기억은 과거의 오류에 대한 후회와 반성까지 포괄해야 역사성과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이건희 컬렉션의 조성과 기증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이런 비판 역시 이 기증의 서사 한켠에 기록되어야, 이 수만점의 문화재는 우리 사회에서 온전하고도 새롭게 공유되고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 1주년 전시가 열리는 내년 봄까지 8개월여가 남았다. 이 1년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시간이 되길, 더 많은 이들에게 향유의 기억을 남겨주는 시작이 되길 기대한다. 이 커다란 사건은 기념으로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결국 기억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신지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 연구원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006803.html?_fr=mt1#csidx5f862e678768574bf391eed61225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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