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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1일 수요일

4대 총선 : 3.15부정선거국회

  • 기자명 김장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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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0.03.12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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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총선의 역사(4)

1. 자유당의 위기와 폭정의 강화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 선거는 ‘보수양당체제’와 ‘여소야대’가 형성된 정초선거로 유명하다. 진보당이 강제해산으로 배제되고, ‘50만환 선거기탁금제’까지 도입하며, 보수양당체제가 굳어지지 시작한다. 
총 233석 중 자유당은 126석으로 개헌선 확보에 실패했고, 민주당은 79석을 차지하여, 3대국회(15석, 7.3%)에 비해 무려 64석(79석, 34%) 약진했다. 실제로 자유당 후보 236명의 득표율은 50%를 조금 넘겼고, 민주당 후보 199명의 득표율은 40%로서 의석수 차이에 비해 전체 득표차이는 67만 표에 불과했다. 
또한 자유당 당선자 90%는 농촌, 지방이었고, 민주당 당선자 60%는 도시에 분포했다. 심지어 서울의 경우 16개 의석 중 자유당 의석은 단  1석, 민주당이 14석, 무소속이 1석을 차지함으로써 사실상 자유당은 전멸하였다. 전형적인 여촌야대 현상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도시화가 진척되고, 국등학교 의무교육실시, 중고등학교, 대학교육이 확대되는 조건에서 이승만 정권의 폭압과 부정비리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1957년부터 미국의 원조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적 불만은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4대 총선의 결과는 2년 후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할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폭압과 부정선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58년 이승만 정권은 구류기간연장, 사법경찰조서 증거채택, 국가기밀범위 확대, 민심혼란형 이적행위처벌 강화 등 야당과 언론을 통제하는 독소항을 대폭강화한 국가보안법 개정을 밀어붙여 2.4국가보안법 파동을 야기한다. 또한  이미 진보당 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불온 문서 투입 사건, 뉴델리 사건 등으로 야당을 탄압해 오던 터에 1959년 4월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야당 성향의 경향신문을 폐간조치하기에 이른다.
▲ 국가보안법 개정안 비판공청회가 열리는 민주당중앙당부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광경1958년 11월 26일, 국가보안법개악반대민주당중앙투쟁위원회라고 쓴 플래카드와 간판이 민주당중앙당부 정문에 붙여졌다. 1958년 12월 6일 오후 1시부터 민주당중앙당부 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국가보안법개정안 비판공청회가 2, 3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정체불명이 청년들의 난입과 소란, 기물파괴 등으로 무산되었다.
▲ 국가보안법 개정안 비판공청회가 열리는 민주당중앙당부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광경1958년 11월 26일, 국가보안법개악반대민주당중앙투쟁위원회라고 쓴 플래카드와 간판이 민주당중앙당부 정문에 붙여졌다. 1958년 12월 6일 오후 1시부터 민주당중앙당부 회의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국가보안법개정안 비판공청회가 2, 30여 명으로 추산되는 정체불명이 청년들의 난입과 소란, 기물파괴 등으로 무산되었다.
2. 3.15부정선거
이승만은 1959년 3월 ‘최후로 써먹을 총알’이라던 충성파 최인규를 내무장관에 임명한다. 최인규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각 도 경찰국장, 총경급 인사, 7개 도지사를 물갈이하고 본격적인 선거체제에 돌입한다. 또한 “고발당하면 내가 신분보장을 책임지겠다”며 공무원들에게 선거운동에 내몰았다.
이렇게 해서 희대의 3.15부정선거가 자행된다.
이전 선거는 보통 5월에 실시되었으나 이승만은 3월 15일 조기선거를 강행했다.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이 선출되었으나 1960년 1월 병세가 악화되어 치료차 미국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악용한 것이었다. 조병옥은 끝내 2월 15일 사망하함으로써,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에 사활을 걸었다. 지난 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이 장면에게 패했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붕 당선에 혈안이 되었다.
반도호텔 809호에 차려진 자유당 선거운동본부를 두고, 한희선 자유당 중앙위 부위원장, 박용익 자유당 총무위원장,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총괄하였다.
3.15부정선거에 조달된 자금만 62억 9,000만환이었다. 이 막대한 자금은 송인상 재무장관이 한국은행 총재 김진형, 산업은행 총재 김영찬을 통해 재벌대기업에 산업금융채권 형식으로 융자해주고, 이를 다시 선거자금으로 염출하는 방식으로 조달했다.
부정선거에는 경찰, 공무원 뿐만 아니라 1958년 발족하여 131만의 회원를 거느린 ‘대한반공청년단’이 전국 89개 시·군·단 단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동대문 시장 상인연합회 회장 이정재 밑에 있던 임화수는 ‘종로구단’ 단장이었고, 유지광은 종로구단 동부특별단부 단장으로 활약했다. 임화수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라는 영화, ‘인간 만송’(만송은 이기붕의 호) 글을 쓰도록 문화인들까지 동원하였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야당후보들은 폭력과 테러에 시달렸다. 3월 9일, 10일 전남 여수와 광산에서는 민주당 간부가 구타살해당하기도 하였다.
선거일에는 전국적으로 4할 사전투표(총 유권자의 40%에 해당하는 자유당표를 투표 전에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는 것), 3인조·9인조 공개투표, 투표함 바꿔치지, 표 바꿔치지 등 온갖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자유당 완장부대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민주당 선거위원, 참관인을 매수하거나 테러, 고의시비로 퇴장시키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직계가족 사망 허위 전보를 듸우거나 전화하기 등의 수법으로 참관을 방해했다. 곳곳에서 민주당 참관인이 쫓겨나고, 아예 포기하고, 선거무효,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철수해버리는 상황들이 발생했다.
당시 강성 야당 도시 대구에서 ‘이기붕 5,000표, 장면 32표’라는 비공식 개표 보고가 올라오자, 최인규 등은 경비전화로 이승만 80%, 이기붕 70~80% 선으로 조정하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선거결과는 이승만 966만표(88.&%), 이기붕 833만표(79%), 장면 184만표(17%)였다.
누가 봐도 부정선거였다. 
▲  4할 사전투표 부정선거를 은폐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불태우는 공무원들
▲ 4할 사전투표 부정선거를 은폐하기 위해 투표용지를 불태우는 공무원들
3. 4.19혁명
□ 2.28 대구학생시위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이미 2월말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2월 28일  일요일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의 유세일에 맞춰 강제등교를 실시했다. 경북고 학생들을 비롯하여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하여 대구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12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대구 고등학생 시위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고등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 3.15 1차 마산 의거, 광주 의거
투표 당일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나고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마산에서는 사전 기표해 둔 용지가 우르르 쏟아지는 부정선거가 적발되어, 3000여명이 시위에 나섰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로 대응함으로써 고등학생 등 8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마산을 기억하자는 시위가 3월 16일 서울 고등학생 시위, 청주 시위, 17일 서울, 진해, 3월 24일, 25일 부산, 4월 6일 부산 고등학생 시위로 이어졌고, 이승만 정권은 등교중지령을 내렸다.
▲ 김주열 학생
▲ 김주열 학생
□ 4.11 2차 마산의거
4월 11일 마산 신포동 부둣가에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다. 3.15 1차 마산시위 27일만에 발견된 김주열 열사의 얼굴에는 최루탄이 관통된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최루탄은 직경 5센티미터, 길이 20센티미터로 알루미늄 탄피에 고리부분에 프로펠로가 달린 미제 고성능 원거리 최루탄으로서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무장폭도 진압용 무기였다.
김중열 열사 시신에 관한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고, 3만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자유당과 관련된 건물, 자유당 인사의 집, 파출소, 시청 등을 휩쓸었다. 밤이 되자 경찰은 다시 카빈총을 지급하고 다시 발포를 개시했다. 그러나 시위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이어졌고, 노인들까지 합세한 가운데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 시위대, 경찰발포, 계엄군, 시위대
▲ 시위대, 경찰발포, 계엄군, 시위대
□ 4.19 피의 화요일
4월 18일 고려대생 3,000여명이 가두에 진출했다. 이때부터 대학생들이 항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위대를 고대에서 출발하여 태평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을지로와 종로4가 사이에 있는 천일백화점 앞길에서 쇠갈고리와 곡괭이, 쇠사슬로 무장한 100여명의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50여명이 다쳤다.
시민들은 경악했고, 21일로 예정된 대학생들의 데모는 19일로 앞당겨졌다. 국회의삳응로 진출하던 시위대를 방향을 경무대로 바꾸었다. 집결한 군중을 10만여 명을 뤟씬 넘었다. 경무대 가까이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미터로 좁혀지자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그러나 죽음을 각오한 시위대를 계속 전진했고,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이승만은 오후 3시 서울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시위대는 서울신문을 불살랐다.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이승만은 오후 4시반 유혈사태가 발생한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도 경비계엄을 선포했다. 이날 시위로 수송초등학교 6학년 전한승을 포함하여 10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 4.19혁명의 승리
▲ 4.19혁명의 승리
▲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 무너지는 이승만 동상
□ 4.25 대학교수 시위와 이승만 하야
계속되는 경찰발포와 계엄군의 진압으로 항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불씨를 살린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였다. 이승만은 여전히 이기붕 사퇴 선에서 상황이 마무리하려고 하였고, 미국은 이승만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258명의 대학교수단은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들어갔다. 대학로에서 종로를 지나 국회의사당까지 시위행진대열은 학생, 시민들로 4-5만 명으로 불어났다. 교수들의 시위를 끝났으나 시위대를 해산하지 않았다.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다가온 탱크 2대를 결국 시위대와 하나가 되고 말았다. 일부 시위대를 서대문 이기붕 집으로 몰려갔다. 이정재의 집은 전소하고 임화수의 평화극장이 파괴되었다.
26일 오전 10만여명의 군중이 집결한 가운데 이승만은 메카나기 주한미대사와 매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을 만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함게 들어온 사람은 시민학생 대표 5인이었다. 시민학생대표는 하야를 요구했다. 10시 30분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단서를 단 하야성명을 발표했다.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에서 자살했다. 5월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떠났다.
4.19혁명과정에서 186명의 민중이 사망하고, 6,026명이 부상당했으며, 수만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사망한 희생자는 국민학생·중학생이 19명, 고등학생이 36명, 대학생이 22명, 회사원 및 학원이 10명, 하층노동자가 61명, 무직자 33명, 직업 미상 이 5명에 이르렀다. 민중의 희생과 항쟁으로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몰락하고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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