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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8월 27일 화요일

현대제국주의의 모습

[지구화시대 자본주의 -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제4장 현대제국주의 ①
  • 김정호 북경대 박사
  • 승인 2019.08.27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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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변혁진영 내 이론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저자 김정호씨의 양해 아래 그 동안 레디앙에 연재해 오던 [지구화시대 자본주의―‘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앞으로 민플러스에서도 공동 연재하기로 하였다. 저자는 이 연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취지를 밝힌 바 있다:
우리는 19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당시의 자본주의에 대해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 같은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우리는 그간 이 문제를 별반 고려하지 않은 채 행동해 왔다. 하지만 변혁운동의 전진을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본주의가 어떤 단계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리라고 본다. 본 글의 연구주제는 간단하다. 즉,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도대체 어떤 자본주의인가, 여전히 국가독점자본주의인가, 아니면 새로운 국제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하였는가? 이 궁금증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설정된 본 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장 신자유주의의 본질 ; 제2장 국제독점자본의 형성과 발전 ; 제3장 지구화시대 금융업자본 ; 제4장 현대제국주의 ; 제5장 다극화와 신국제질서.
현재 제3장까지 (총 7회) 연재가 끝난 상태이며, 민플러스는 앞으로 연재되는 ‘제4장 현대제국주의’부터 게재할 예정이다. 그전 내용이 궁금한 독자께서는 기존 레디앙에 연재된 저자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아래 링크 참조)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저자의 입장이 전후 미국중심 현대제국주의체제를 어느 정도로 볼 것인가 등에서 독자들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논의자체를 한국사회를 이해하는데 폭넓은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또한 독자들의 공론화의 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며, 현대제국주의와 한국사회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기대한다. [편집자]
[새 장을 시작하며] ‘제국주의’란 말이 요즘 들어 다소 낯설게 들린다.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개념은 유효할까? 그런데 한편에선 세계 모든 일에 간섭하려고 하는 미국이란 존재는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다. 단순히 ‘패권주의’라는 규정만으로 그 복잡한 동기와 행동논리를 다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패권주의’란 무엇인가? 지구화시대에 있어 더욱 많은 문제들이 국제정세와 연계되며, 과거보다도 훨씬 대외적 요소의 내적 규정성은 강해졌다. 이 같은 외부적 힘을 올바르게 이론화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 때문에 ‘제국주의’ 개념은 오늘날 더욱 우리에게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된다.
제4장 현대제국주의
현대제국주의는 과거 식민지지배로 상징되었던 구제국주의와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제국주의이며,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이후 냉전체제하에서 성립된 이래 오늘날 지구화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고 있는 제국주의를 일컫는다. 우리는 앞서의 논의를 통해 지구화시대인 오늘날 현대제국주의의 성립과 관련된 객관적 조건에 대한 인식에 접근할 수 있는 일정한 기초를 확보하였다고 판단된다. 즉 '생산의 국제성'과 '자본의 일국적성(민족성)' 간의 모순으로 집약되는 국제적 차원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국제 분업의 더 한 층의 발전에 대한 객관적 요구와, 이를 가로막는 '지역경제 집단화'라는 국제독점 동맹 간의 모순 등으로 구체화되어 표현된다.1)
그러나 이 같은 모순이 존재한다고 하여 정치적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2)가 곧 바로 성립하거나 현실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국가가 모두 제국주의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듯이, 제국주의 문제에 있어서도 반드시 그 객관적 필연성과 주관적 능력간의 관계가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오늘날에 있어 더욱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국부적이고 지역적인 영향력만 가지고서도 출현할 수 있었던 구제국주의와는 달리,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는 반드시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슈퍼 제국주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국주의는 아무 국가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전 지구적인 거대한 슈퍼 제국주의가 애초에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현대제국주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우선 부딪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현대제국주의의 기원과 관련한 문제이다.
독점자본의 상부구조로서의 제국주의는 한편에선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경제관계의 궁극적인 규정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 그 자신 상대적 독자성을 갖고 나름의 역사적 진화를 겪는다. 때문에 얼마간 역사적 시기가 근접한 제국주의 간에는 그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일정한 연계와 계승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는 냉전체제하에서 성립된 현대제국주의를 직접적인 발판으로 삼고 있으며 그 계승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현대제국주의의 출발점은 2차 대전의 종식이며 이를 전후로 하여 구제국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큰 획을 긋지만, 그러나 종전 이후 출현한 현대제국주의에 있어서도 다시 그것의 내부적 발전에 따라 서로 다른 두 형태의 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점은 지구화시대의 현대제국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관건적이다. 비록 과거에나 지금이나 현대제국주의에 있어 미국의 패권적 지위는 변화가 없지만, 그러나 이 같은 '미국'이라는 동일성 때문에(즉 그것의 현대제국주의 내의 연속적인 지배적 지위 때문에) 그가 대표하는 현대제국주의가 중간에 질적 변화가 발생한 점을 놓치는 것은 이론연구에 있어 실패를 자초하기 쉽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종전 후 냉전체제 하에 존속했던 제국주의는 냉전종식 후의 제국주의와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는데, 사실상 현대제국주의의 이 같은 내부변화는 일찍이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제국주의는 그 성격 변화에 따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전기는 대체로 ‘냉전체제’에 상응하는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종식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에 해당되며, 후기는 냉전체제가 해체된 1990년대 초중반 이후 지금까지에 이르는 시기의 그것을 말한다. 이 같은 현대제국주의의 시기구분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대체로 그 경제적 하부토대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내부적 성격변화에 또한 조응된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국독자 역시도 1980년대를 전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현대제국주의 내에 있어 후기 형식은 당연히 전기의 현대제국주의를 모태로 한다. 때문에 그 전기 형식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지구화시대의 제국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담고 있다. 필자는 전기의 그것을 '동맹적 제국주의'로 그리고 후기의 그것을 '단일패권적 제국주의'로 부르고자 한다.
1. 냉전체제하의 '동맹적 제국주의'
1) 구제국주의와 현대제국주의
현대제국주의의 초기 형태가 그 성격에 있어 '동맹적'3)이었으며 또 그것이 왜 그 같은 형태로 밖에 출범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 성격상의 차이, 그리고 그에 따라 제국주의가 갖추어야 할 주체조건 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식민지의 직접적인 점령여부는 구제국주의와 현대제국주의를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표식이 된다. 구제국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강점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정복과 군사력 그리고 행정적 통치에 의존해서 그것을 유지하였다. 이에 비해 현대제국주의가 의지하는 것은 주요하게는 국경과 지역을 초월하는 일종의 '규범' 혹은 '규칙'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광범한 식민지 민중들의 자각과 전쟁 당사국인 구식민제국들의 쇠락 그리고 세계사회주의체제의 존재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직접적 점령과 같은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리하여 새롭게 나타난 것이 '규범'과 '규칙'에 의한 통치방식인데, 이는 현대제국주의에 강압적인 인상 대신 일정 합법적 외투를 걸칠 수 있게 해주었다.
현대제국주의는 이렇듯 일종의 특정한 규범적 국제 질서이자 기제라고 할 수 있으며, 또 이 때문에 그것은 처음부터 세계적 규모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양자는 상호 의존적이다. 세계적 범위에서 통용되지 않으면 감히 국제 질서라 부를 수 없으며, 또 범세계적 차원에서 관철되기 위해서는 형식상으로나마 보편적 규범에 입각한 국제 질서이어야만 한다. 이에 비하면 전통적 제국주의는 일종의 국부적이며 지역적인 존재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과거 대영제국이 강점한 식민지가 비록 아시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세 개 대륙에 걸쳐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 불렸지만, 그러나 그러한 영국도 모든 식민지들을 점령하지는 못했으며 더더구나 지구적 통치를 구축하는 차원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구제국주의국가와 현대 제국주의국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구제국주의국가의 경우 침략당하는 국가에 비해 경제와 기술 그리고 군사 방면의 실력이 일정한 우위를 갖추기만 하여도 식민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포르투칼이나 스페인과 같은 오래된 식민주의국가들은 당시 대면했던 상대가 대부분 아직 노예제나 씨족사회의 단계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단지 신식 항해기술을 장악하고 조총이나 대포로 무장한 얼마 되지 않는 모험가들 대오만을 거느리고서도 자신들보다 인구나 면적 면에서 수배 내지 수십 배에 달하는 식민지를 점령통치하는 일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현대제국주의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이미 독립을 획득하여 주권을 지닌 국가들이며, 또한 일부 지역의 소수 몇 개 국가가 아니라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다. 때문에 현대제국주의가 하나의 세계질서와 세계패권을 건립하고 유지하려면 강력한 군사‧경제‧과학기술 방면의 하드파워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상당한 정치‧문화‧사상‧이데올로기 방면의 소프트파워 또한 필요하다. 이 같은 실력과 영향력을 갖출 때만이 각종 국제법과 국제규칙을 제정하고 또 그것을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 형상적 비유를 빌자면 현대 제국주의자는 '지구 사령관임'에 비해, 전통적 제국주의자는 '지방 성주'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4)
그런데 2차 대전이 막 종식 되었을 무렵만 하더라도 기존의 오래된 제국주의국가들을 포함해서 이 같은 현대의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국가의 자격을 갖춘 나라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아니하였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미국조차도 당시에는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훨씬 미달하였다. 종전 직후의 미국은 비록 경제와 군사 면에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였지만,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은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지구적'인 것이기 보다는 '국부적'인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미국은 독립 후 줄곧 국내 문제에 치우쳐 왔으며 해외 식민지 개발에 있어서는 다른 서구 열강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었는데, 그 같은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비록 2차 대전 기간 중 연합국진영에 참여하여 그 지도적 국가로서의 위신을 크게 넓혔다고는 하나, 객관적으로 볼 때 종전 직후 미국의 경제‧정치‧군사 면에서의 영향력은 자신이 대전기간 중 직접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점령한 서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일부 국가와 지역의 범위를 크게 상회한 것은 아니었다.5) 이 같은 조건을 감안 할 경우 종전 직 후 전 세계적 범위에서의 규칙 제정권을 요하는 현대제국주의의의 성립을 위해서는 반드시 몇 개 유력한 국가들의 협력이 요구되었으며, 이에 따라 현대제국주의의 초기형태는 '동맹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당시 신흥 강대국인 미국은 오직 서유럽의 전통적인 구제국주의국가들 (그중 특히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서만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종전 후 미국과 몇몇 서유럽국가들이 결합한 '동맹적 제국주의'는 우선 국제연합(UN)의 설립과 'IMF-GATT 체제'의 구축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이들 기구 출범이 갖는 의의는 초기 참여국의 규모가 가졌던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이들에 의해 제정된 규칙들은 종전 후 정치와 경제면에서 국제질서를 규정하였으며, 이후 회원국들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이들 기구는 명실상부한 전 지구적인 질서와 규범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제 정치조직으로서의 국제연합은 연합국진영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천명한 '반파시스트 투쟁정신'의 계승을 자신의 표면상의 설립취지로 삼았다. 이 때문에 국제연합의 이념에는 전 세계의 항구적 평화에 대한 옹호, 회원국 간의 상호평등과 존중 및 공존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에 비해 국제 경제조직인 IMF와 GATT가 설립목표로 삼았던 것은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세계무역질서의 수립이다. 비록 위의 국제조직들은 정치면에서 거부권을 갖는 안보리 5개국 상임이사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경제면에서 일국화폐인 미국달러를 세계기축통화로 삼는 등의 일정한 형식상의 불평등을 포함하였지만, 그러나 우리가 너무 이상에만 치우쳐서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내용만 가지고서 '패권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세계 각국이 수용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논란이 많은 'IMF 통화체제'라 할지라도, 당시 달러 자신은 국제협약에 의하여 '1온스=35달러'의 가치로 황금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또 이를 지키기 위한 미국 국내법의 구속을 받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예컨대 미국의 국내 화폐(즉 유통 중인 미연방준비이사회의 지폐) 가치의 25%는 법률 상 황금에 의해 지지되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같은 국제통화제도는 '준 금본위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규정이 끝까지 제대로 지켜진다면, 이 제도의 형식상의 '공정성'은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형식상으로나마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규범이 마련되었는데, 이는 현대제국주의가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의 일부가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것만 가지고서는 사실상 형식상의 '공정경쟁'을 위한 규칙을 제공한 것일 뿐 아직 '제국주의체제'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이 같은 규범과 규칙이 실제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기능하게 되었는지, 또 국제적으로 이러한 질서구축을 위해 일부 서유럽 유력 국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은 미국이 어떻게 그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는 '패권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여기서 일국 내 법률관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규칙'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능력이 더 관건적일 때가 많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결국 경제력과 군사력에 의존한다는 점도 함께 기억하여야 한다. 그중 경제력은 궁극적으로는 한 국가의 패권실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지만, 단기적으로만 보자면 보다 직접적으로는 정치군사적 요인이 결정적인 경우가 많다. 미국은 당시 경제력과 군사력 이 두 가지 측면의 우세를 모두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이 같은 우세는 모두 전쟁 종식 직후의 특수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결코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후 전후 복구과정을 통해 서유럽의 동맹국들이 경제부흥에 성공하게 된다면, 그들은 경제방면에 있어 얼마든지 다시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또 만약 미국의 경제적 우위가 지속될 수 없게 된다면, 그 군사적 우위 또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은 종전 후 국제질서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이해에 맞게끔 방향 지워야 할 동기를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을 비롯한 새롭게 출현한 사회주의권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이를 위한 좋은 계기를 제공하였다. 미국이 이를 위해 채택한 전략이 동서 간 '냉전체제'의 의도적인 구축이었는데, 이 같은 냉전체제를 빌려 미국은 종전 후 경제와 군사방면에 있어 자신의 일시적 우위를 보다 항구적인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6) 그리고 이 과정은 종전 후 자본주의 국제질서가 초기 다소 모호하고 때론 '이상주의적'이기까지 했던 색채를 벗어 던지고 점차 제국주의적인 것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하였다.7) 여기서 현대 제국주의의 출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냉전체제의 성격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하에서 그것의 의의·성격·형성과정 등에 대해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2) 냉전체제와 '동맹적 제국주의'의 수립
미국에 있어 냉전체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도하는 국제질서 구축에 있어 필수적인 '전 지구적 배치를 갖는 군사력'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종전 직후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은 아직 서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일부 지역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전 지구적 배치를 갖는 군사력' 창출이라는 이 문제가 해결될 때라야만 현대제국주의는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주의권이 배제된 자본주의진영만의 단독적 시장을 성립시키는데 있어서도 그러하며, 또 나중에 명백해지듯 미국의 달러패권의 유지의 측면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후자의 경우 이는 순수한 경제력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정치·군사력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또 이 같은 달러패권의 유지는 미국이 경제패권을 지속할 수 있는 관건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냉전체제는 어떻게 미국의 이 같은 군사력 창출이 가능토록 도왔을까?
냉전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있다. 그런데 당시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국제문제의 가장 주요한 이슈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종전 후 전쟁으로 파괴된 기존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서유럽 각국 내의 계급투쟁이 격화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본래 일국적 상황으로 전개되는 계급투쟁이 국제적 차원에서 다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양대 진영 간의 대립으로 확대 발전하는 데에는 많은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예컨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각국 국가독점자본주의 간 국제적 대단결의 성공, 당시 서유럽의 가장 강력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공산당의 전후 국제정세에 대한 전략적 판단 오류와 타협주의노선, 소련의 경직된 '양대 진영' 이론과 패권적 야심 등등이 그것이다. 어떻든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동서 양대 진영의 분화와 대립은, 서유럽 각국의 노동계급이 전쟁이 가져온 폐허와 생활고 속에서 기존체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계급투쟁의 수위가 임계점에 접근함에 따라, 그리고 미국과 같은 패권적 야심을 가진 국가의 전략적 의도가 첨가됨에 따라, 어렵지 않게 한 단계 수위를 높인 전면적인 군사 대결적 성격으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과 서유럽 각국의 통치계급은 국내의 불만을 국제적인 긴장조성을 통해 상대적으로 완화시키고 대중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처음 양대 진영이 성립하는데 있어 원인을 제공하였던 이데올로기적 차이와 대립은, 점차 본격적으로 군사집단화한 양대 진영에 대해 다시 그 존재에 대한 나름의 명분과 합법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리하여 냉전체제는 먼저 각국의 일국 내 계급투쟁을 국제적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수렴시킨 후, 다시 이를 군사집단화한 양대 진영 간의 대립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통해 성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냉전체제의 형성은 당시 미국이 주도하는 '동맹적 제국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 동맹이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면서 군사적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냉전체제의 구축을 통해 미국은 현대제국주의의 성립에 필수적인 지구적 범위에서의 군사력 배치를 완성할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국제관계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고 '집행'할 수 있는 실질적 능력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세계적 범위로 냉전체제가 확산되어가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냉전은 처음 1945~49년 기간에 유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미·소가 유럽대륙에서 각자 비교적 안정적인 전략적 구조를 건립한 후인 1950~60년대에 점차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및 세계 각지로 확대되었다.8)이러한 냉전체제의 세계적 확장에 수반하여 미국은 유럽과 지중해 그리고 아시아와 근동지역에서 필요한 군사기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또 자신이 주도하는 각종 지역안보동맹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냉전체제 구축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미국과 영국 간의 동맹관계이다. 미국은 당시 정치상으로 영국의 지지가 대단히 중요하였다. 영국의 지지가 있어야만 유럽에서의 군사적 주둔을 계속할 수 있고, 또 반드시 유럽을 '발판'으로 하여야만 자신의 경제적·군사적 영향력이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9) 이 때문에 종전 직후 미국이 현대 제국주의국가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절차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여전히 세계 각지에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국제정치 무대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과 상호이익의 기초위에서 세계분할에 대한 암묵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었다. 이 점에 있어 영국은 당시 국민당 장개석 정권의 통치하에 있던 중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권리를 인정해 주었으며, 그 대가로 미국은 영국의 인도와 인도네시아에 있어서의 정책과 행동을 지지하는 식의 타협이 이루어졌다.10)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지중해의 세력범위를 분할하는데 있어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지중해는 전통적으로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 열강의 세력범위에 속하였는데, 미국의 독점자본은 근동지역(터키를 중심으로 한 중동지역 일대)에 진입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 경우 특히 영국자본은 가장 크고 완강한 경쟁 상대가 되었으며, 만약 미국 해군이 지중해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대영제국의 이익과 장차 크게 충돌하게 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배경과 관련하여 당시 독일 자본의 근동지역 진출을 둘러싸고 이 지역에 기득권을 갖고 있던 영국 자본과 대립이 발생했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때마침 이러한 곤란한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주어졌는데, 이하에서 소개하는 1947년2월에 발생한 그리스사태가 바로 그것이다.11)
그리스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앞서 일찍이 1944년10월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나치 점령 치하에서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공산당이 거의 전역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옛 종주국인 영국의 군대가 진주하면서 자신의 대리정권을 내세웠으며, 이에 따라 내부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격화하면서 마침내 1946년 전면적인 민중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듬해 봄 영국은 4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고 또 전쟁 피해로 여의치 않은 자국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선 거액인 4.6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였지만 여전히 사태의 발전을 통제하지는 못하였다. 영국정부는 이로써 국내적으로 커다란 재정과 정치 양면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할 수 없이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1947년2월21일 영국정부는 마침내 정식으로 미국정부에 각서를 보내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3월31일 이후 그리스에 경제와 군사원조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이 중임을 맡아줄 것을 희망한다는 공식 의사를 표명하였다. 당연히 미국이 이 같은 요청을 거부할 리가 없다. 미국정부는 이것은 영국이 '세계의 영도력'을 자신에게 건네준 것과 마찬가지라고 간주하였으며, 기꺼이 이 역사적 임무를 감수하겠다고 선뜻 회답하였다.12) 미국정부는 장차 이 사태에 대한 개입으로 부터 얻게 될 다음 세 가지 전략적 이익에 주목하였다. 첫째, 대영제국의 기반을 접수하여 자신의 세력범위를 확대하고 그 세력을 중동과 지중해까지 넓힐 수 있다. 이는 미국이 꿈에도 그리워하던 숙원이었다. 둘째, 자신의 세력을 소련의 변경지대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유럽의 허약한 복부(腹部)인 중근동지역에 있어 소련에 대한 '억제정책'을 펼 수 있는 전초기지를 세울 수 있다. 셋째, 원조의 제공자요 자유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공산주의 확장에 대항하는 중임을 떠맡을 수 있는 자유세계 지도자로서의 형상을 수립할 수 있다.
1947년은 잘 알려지다시피 '마셜플랜'이 발표되는 등 유럽에서 냉전체제가 본격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한 중요한 한 해이다. 우리는 이 같은 해의 년 초에 발생한 그리스사태의 새로운 진전과 그 이후 동서 간 냉전적 대립을 촉진시키는 일련의 사태발전이 긴밀한 인과 관계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유럽에서 시작된 냉전을 동아시아에까지 확대하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의 군사력이 비교적 일찍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지역에 진출하였던데 반해 중동지역에의 진출은 약간 늦어졌다. 이 역시도 주요하게는 영국이 여전히 2차 대전 이후에도 자신의 식민지였던 중동 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실력의 지속적인 상승에 따라 영국은 점차 중동지역에서도 철수하게 되는데, 1956년 수에즈운하 위기 이후 영국은 완전히 이 지역을 포기하고 대신 미국은 영국군이 사용하던 일련의 군사시설을 포함하여 영국의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고스란히 접수하게 된다.13) 1968년이 되면 미국은 월남전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대한 간섭이 그 정점에 이르게 된다. 이 시기 월남전에 참여한 54만 명의 미군을 포함하여 100여만 명의 미군이 유럽과 아시아 대륙 및 인근 도서에 주둔하였으며, 30만 명의 미군은 본국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군함에서 생활하였다. 미국은 이 무렵 전 세계에 2000여 개의 군사기지를 설치하였으며, 40여개 국가와 지역에 대한 정식 보호 의무를 떠맡았다.14)
이상의 종전 후 미국이 주도하는 현대제국주의가 건설되는 과정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전후에 미국의 경제와 군사력은 서유럽제국과 소련 등 다른 경쟁국들에 대해 상당한 우세를 점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현대제국주의가 필요로 하는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패권구축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할 때 서유럽이 지니고 있던 경제‧정치‧정신상의 영향력과 군사상의 잠재력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는 미국의 지구적 전략을 실현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였다. 미국의 독점자본과 지배집단은 종전 후 서유럽경제의 침체와 사회동란 그리고 서유럽국가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냉전 구도를 설계하고 추진하였으며 최종적으로 그것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을 통해 서유럽제국과의 정치와 경제 및 군사방면을 포괄하는 동맹관계를 결성하고 이에 기초한 새로운 제국주의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냉전체제를 배경으로 성립되고 존속한 현대제국주의는 기본적으로 '동맹적 제국주의'의 성격을 갖는다. '동맹적 제국주의'는 이후 미국이 지역차원의 강대국에서 진정한 세계적 패권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덧붙이자면, 이렇게 성립된 '동맹적 제국주의'는 내부관계에 있어서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냉전시기 내내 그 구성주체 간의 관계에 있어 '동맹'적 성격의 틀을 끝까지 유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동맹' 성격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비록 이들 간의 관계에 있어 미국의 리더십이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종적인 복종관계 보다는 횡적인 평등관계에 가깝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형식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등한 '파트너 관계'임이 공식적으로 천명되었으며,15) 내용적으로도 비록 미국이 간혹 패권적 행동을 보일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원래의 파트너 관계로 복귀함으로써 그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종전 직후의 제국주의가 그 내부관계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맹'적 성격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냉전체제 자체의 성격과 구속력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보여 진다. 미국은 종전 후 자신이 패권국가로 성장하기 위한 전략으로 '냉전체제'의 구축을 구상하고 적극 실천하였는데, 이러한 냉전적 국제질서는 이후 반대로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이 상호 장기간 '동맹'적 성격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였다.
첫째, 냉전체제는 동서진영 간에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대립'을 기본으로 삼는다. 이 경우 유럽은 근대문명의 출발지로서, 인류문명에 대한 기여도나 역사의 유구함 그리고 학문적 전통과 이론적 깊이에 있어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다른 한편,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강고한 독일파시즘을 패망시키는데 있어 결정적 기여를 한 소련과 그 제도인 사회주의가 세계 인민으로부터 높은 위신과 기대를 모으고 있었던 사정도 고려하여야만 하였다. 때문에 미국은 냉전체제 하에서 계속해서 이념적 우세를 점하기 위해선 반드시 서유럽의 정신적·도덕적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둘째, 냉전체제가 요구하는 직접적인 군사적 대결의 측면에서 볼 때도 그러하였다. 종전 후 미국이 아무리 초군사강국이고 막강한 공업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병력을 보유한 소련과 그 사회주의 동맹국들을 혼자서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미국의 핵 독점은 1949년 소련이 원자탄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일찍이 무너졌으며, 1960년대 중 후반에 이르러선 미소양국의 핵전력은 비슷한 수준으로 전반적인 균형에 이르게 되었다. 또 1957년과 1959년에 소련이 미국보다 한발 앞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과 유인 우주선을 각각 지구궤도에 쏘아 올린 데서 볼 수 있듯이, 과학기술면에 있어서도 소련은 첨단 강국에 속했으며, 그 경제력 역시도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던 데서 볼 수 있듯이 만만치 않았다. 냉전 후기인 1980년대 초에는 소련 경제는 한때 미국 GDP의 2/3에 이를 정도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렇듯 소련 하나만 가지고서도 미국은 상대하기가 벅찼으며, 여기에 사회주의권 전체를 적으로 삼아야 하는 냉전적 대결구도를 전 지구적 범위에서 형성하기 위해서는 미국은 반드시 서유럽과 일본의 힘을 빌려야만 하였다. 아래 표4-1은 미국이 1970년대 중반 들어 군사비지출 면에서 소련에 오히려 뒤처진 상황을 보여주며, 표4-2는 나토의 집단적 힘을 빌려 비로소 소련과 그 동맹국에 대항할 수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자신과 동등한 동맹국 지위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의 요인 때문에 냉전기간 현대제국주의의 내부관계는 기본적으로 '동맹'적 성격이 유지되었다. 물론 이러한 동맹적 관계가 순탄하게 저절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사적영역의 독점형태인 카르텔과 마찬가지로, 현대제국주의 내부 주체 간의 동맹 역시도 상호 역관계의 변화, 미소관계, 제3세계권과의 관계 등 주변 조건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는 동요와 갈등이 나타났다. 그 때문에 현대제국주의 내부에서 '동맹관계'라는 기본적 성격의 규정은, 상호간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 도달한 일종의 종합적 '균형'의 결과이자 표현이라 할 수 있다.18) 이리하여 이상 열거한 요인 중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츰 자연적으로 소실되거나 인위적으로 해결 짓게 된 것들이 생겨나게 됨에 따라, 현대제국주의의 성격에 있어서도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본문주석>
1) 만약 어떤 역사적 시기에 있어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 나름의 현실적 의의를 갖는다면, 오늘날의 그것은 분명 생산의 국제화와 관련된 지구화의 추진과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적 차원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예컨대 오늘날 '지구적 공급사슬'과 같은 국제 분업의 발전추세와 이를 가로막는 '지역경제 집단화'와 같은 국제독점 동맹 간의 모순은 결코 경제적 범주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현대 제국주의'라는 현실 정치역량이 객관적 요구로 떠오르게 되는 필연성이 여기서 제기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기본모순(즉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자본주의적 사적점유 간의 모순)은 지구화시대인 오늘날에 있어선 주요하게는 '생산의 국제성'과 '자본의 민족성' 간의 모순형태로 집약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상부구조로서의 현대제국주의와 관련한 문제는 이 같은 자본의 '국적성' 내지 '민족성'과 관련된 모순이 가장 고도하고 집약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본 글에서 제국주의 개념은 이처럼 주요하게는 정치적 상부구조 측면에서 파악된다. 이 같은 규정은 엄밀한 것은 아니며 편의상의 고려에서이다. 그것은 레닌이 말한 “금융자본의 기초위에서 성장한 비(非)경제적 상부구조, 즉 금융자본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라는 규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레닌전집>(제27권),1990년,인민출판사, p397. 레닌은 원래 '제국주의'를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있는 자본주의의 경제와 정치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 점은 레닌의 제국주의에 관한 '5가지 지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즉 ➀독점 형성➁금융자본의 형성➂자본수출➃경제적 세계분할➄영토분할이 그것이다. 그중 앞의 네 가지는 경제와 관련되며, 마지막 다섯 번째는 정치와 관련된다.
3) 여기서 '동맹적'이라는 개념은 현대제국주의를 형성하는 주체(서구 선진 자본주의국가들) 내부에 있어서의 상호관계를 주로 지칭하며, 그것의 외부적 표현으로서의 객관적 국제질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4) 이상 현대 제국주의에 대한 성격규정 및 관련 내용은 [中]王金存,2008년,《帝国主义历史的终结―当代帝国主义的形成和发展趋势》,pp.101-104참조.
5) <강대국의 흥망성쇠>의 저자 폴 카네기는 2차 대전 종전 무렵의 미국 군사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나 나중의 분석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미국의 군사역량은 실질적으로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강대하지는 않았으며 (미국은 단지 몇 개의 원자탄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또한 원자탄 사용이 일으킬 커다란 정치적 결과를 고려하여야만 했다), 미국은 또한 그 군사력을 이용해서 소련과 같은 멀리 떨어져 있고 의심으로 가득 차있는 수수께끼 같은 나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가 어려웠다." [英]保罗·肯尼迪,《大国的兴衰》(下卷),p92. 1945년에 미국은 유럽에 69개 사단과 아시아 태평양지역에 26개 사단을 주둔하고 있었으며, 미국 본토에는 한개 사단도 없었다. 위의 책,p93.
6) 카터 정부 하에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브레진스키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에서, 오늘날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인 소위 '미국체계'에 대해 이 같은 "미국체계의 대다수 내용은 냉전 기간에 출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美]兹比格纽·布热津斯基,《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p24-25.
7) 미국 권력층 내에서도 종전 후 수립될 국제질서와 관련하여 상당한 노선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전쟁 중 수립한 소련과의 우호적인 관계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일명 '비둘기파'가 존재하였으며, 소련을 배제하고 서유럽만으로 소위 자유진영을 구축하고 소련에 대해선 더 이상 공산주의가 확장되지 못하도록 봉쇄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매파' 진영이 존재하였다. 비둘기파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3기 집권 시 부통령을 역임한 당시 상무부장관이었던 헨리 월라스를 대표적 인물로 하였는데 대체로 민주당내 좌파세력이 집결하였다. 매파는 당시 부통령으로서 루스벨트의 후임이 된 트루만과 국무부장관인 벨라스를 대표적 인물로 하였으며, 민주당내 우파와 공화당 연합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두 노선의 대립은 1946년에 들어서면서 대충 우세가 판가름 났다. 결국 후자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1947년부터 이후 '트루만 독트린'과 '마샬 플랜' 등으로 이어지는 대 소련 봉쇄와 대결정책이 본격화 되었다. [中]刘金质,2003년, 《冷战史》(上卷),pp98-99 참조
8) 냉전은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발생과 확대 그리고 종식의 역사 과정을 밟았다. 필자가 참고한 [中]刘金质,2003년,《冷战史》(上·中·下卷) ,世界知识出版社는 46년에 이르는 냉전사를 이하 5 단계로 나누었는데 참고할 만하다. 즉 냉전의 개시(1945-1949), 냉전의 확대(1950-1962), 냉전의 완화(1963-1979), 냉전의 재현(1980-1984), 냉전의 종식(1985-1991)이 그것이다.
9) 미국의 전략가 브레진스키는 유럽이 미국 패권전략에 있어 갖는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미국의 서부 파트너 (서유럽을 지칭함-주)가 미국을 그 주변지역의 근거지로부터 쫓아낸다면, 미국은 자연스럽게 유라시아 대륙의 체스 판에서의 경쟁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유럽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유라시아 대륙의 지역정치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교두보이다. ……미일 관계와는 다르게, 대서양 동맹은 유라시아 대륙에 있어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과 군사력을 직접적으로 확립시켰다. ……유럽의 어떠한 확대도 모두 자연스럽게 미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범위의 확대로 된다. 반대로, 만약 범 대서양 간의 긴밀한 관계가 없으면, 미국의 유라시아 대륙의 주도적 지위는 곧 존재하지 않게 된다." 《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30; pp47-49.
10) 미영 양국 간의 타협 내용은 위 《冷战史》上卷, pp98-99의 내용 참조.
11) 이하 그리스사태와 관련한 내용은 위의 책, pp107-110 참조.
12) 《冷战史》上卷, pp109-110. 그 당시 트루먼정부의 고위관리였던 에치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사의 전환점이 이미 이르렀으며, 미국은 필히 용감히 나서서 몰락 중인 영국을 대신해서 자유세계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세계창조의 현장기―나의 국무부에서의 세월>,뉴욕1969년,p220. 위의 책,p110.
13) 그러나 미국이 진정으로 중동에 군사기지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영향력 확장에 나서게 되는 것은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 침입한 후의 일이다. 브레진스키는 <거대한 체스 판>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냉전의 최후 단계에 세 번째 방위 '전선' 즉 남부전선이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상에 출현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은 미국의 두 측면에서의 반응을 일으켰다. 첫째는 미국이 직접 아프간 민족항쟁을 원조해서 소련을 곤궁에 빠지게 하였다. 둘째는, 페르시아 만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건설해서 위협역량으로 삼은 것이다." 《大棋局―美国的首要地位及其地缘战略》,p6. 미국과 중동 각국의 군사관계 및 군사기지는 이후 냉전이 종식된 직후 비교적 큰 변화를 겪었다. 이때부터 미국 군사시설과 군대가 더 많은 중동국가에 진입하였으며, 이후의 10년간 미국은 중동의 군사기지를 통해 이라크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을 유지하였다. 이 밖에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은 나토의 '동쪽 확대'를 추진하였는데, 지금까지 이미 동유럽 몇 개 국가에 군사기지의 효능을 갖춘 시설들을 계속해서 설립하였다. '9.11'테러습격 이후 미국은 반테러전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계속해서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에 진출하여 반테러전쟁의 필요라는 명의를 빌려 군사기지를 설립하였다. [中]樊吉社 张帆 共著,《美国军事―冷战后的战略调整》,p70.
14) [中]刘绪贻 杨生茂 总主编,2008년, 《美国通史》(第6卷),p388.
15) 케네디 대통령은 1962년7월4일 필라델피아에서 소위 '웅대한 계획'이라 이름붙인 유럽정책에 관한 중요한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유럽을 동반자(파트너)로 간주하며, 그들과 완전히 평등한 기초위에서 함께 자유국가 공동체를 건설하고 수호하는 모든 중대하고 지난한 임무에 종사할 수 있다. " 《美国通史》(第6卷), p274.
16) 《世界经济统计简编1982》,p70에서 재인용.
17) 《世界经济统计简编1982》,p71에서 재인용.
18) 이 같은 상호간의 갈등과 투쟁은, 미국과 서유럽과의 관계를 실례로 들 경우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종전 직후에서 1940년대 말까지는 서유럽이 미국에 대해 경제와 군사상에 있어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49년4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정식 출범하였는데, 미국은 그 지휘권의 장악을 통해 서유럽을 정치와 군사상으로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초 서유럽 국가들의 전쟁피해 복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고 경제부흥이 시작되면서 양자 관계는 조정을 받는다. 그 첫 번째 상징적 사건이 1953년2월 서유럽 6개국의 '유럽석탄강철공동체'의 설립이었다. 이는 프랑스와 서독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국가들이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초기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노력은 이후 1958년1월 6개국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 건설에 대한 조약 (로마조약)이 성사됨으로써 더욱 진전되게 된다. 이 같은 단합을 바탕으로1950년대 중반부터 서유럽은 미국에 대해 자신들의 실력 향상에 걸 맞는 정치·경제·군사상의 합당한 지위를 요구하게 되었다. 1960년대 들면서 이 같은 양자관계의 조정은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되는데, 그 힘의 균형은 후반으로 갈수록 미국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한편에서, 미국은 그간 계속된 군비지출 특히 월남전의 확전으로 막대한 국지수지 적자가 발생함으로써 날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졌다. 다른 한편, 강력한 민족주의자인 프랑스의 드골이 1958년 정권을 잡은 이후 그 독자노선을 노골적으로 천명하면서, 미국의 주도권에 정면 도전하였다. 그는 핵무기를 보유하는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문제에 있어 미국과 나란히 동등한 지위를 갖기를 요구하였으며,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영국수상에게 비망록을 보내 미·영·불 3국으로 구성되는 '안전조직'을 결성하여 지구적인 정치와 전략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드골은 심지어는 미국을 현대문명의 어머니인 유럽의 '자식'이라고까지 불렀으며, 유럽이 마땅히 인류 진보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 유럽이 미국의 국제수지 균형을 유지토록 도와주는 것에 대해서도 단호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드골의 이러한 독립적인 자주정책의 영향 하에서, 그간 미국 혼자서 조종해오던 나토조직은 크게 쇠약해졌다. 미국의 이러한 곤궁은 1970년대 초 닉슨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미국은 우선 서유럽과 일본을 압박하여 달러의 금 불태환과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관철시켰는데, 이러한 국제통화체제의 변화는 날로 누적되던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이 과정에서 서유럽 동맹국들과의 관계가 한 때 상당히 악화되기도 하였지만, 이것도 1973년 중동전쟁 이후 OPEC의 석유가격 인상을 계기로 화해의 실마리가 찾아졌다. 즉 제3세계권의 새로운 도전에 맞선 공동대처의 필요성에 공감하였던 것이다. 이후 카터 대통령시기 미국과 서유럽 동맹국 간의 일정한 관계개선이 이루어 졌으며, 레이건 정부가 들어선 1980년대에 양자관계에 있어 더욱 적극적인 진전이 나타났다. 미국은 이 시기 소련과의 신 냉전을 획책하였는데, 이 과정을 통해 서유럽동맹국들과의 공동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이전의 약화된 주도권을 상당부분 만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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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작하며 ① '신자유주의 본질' http://www.redian.org/archive/133369
신자유주의의 본질, 이론·역사와 그 현대적 기원 http://www.redian.org/archive/133718
신자유주의와 후기 국독자 http://www.redian.org/archive/133878
국제독점자본과 국제분업, 지구적 경제일체화의 기초 http://www.redian.org/archive/13423
1990년 이후의 국제독점자본 http://www.redian.org/archive/134498
금융업자본의 인수합병 http://www.redian.org/archive/135010
국제 외환·채권·주식시장의 형성 배경 http://www.redian.org/archive/135325
김정호 북경대 박사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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