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9년 2월 12일 화요일

“그들이 내 아이를 불구덩이에 던졌어요”

[단독]“그들이 내 아이를 불구덩이에 던졌어요”


최초 공개 ‘로힝야 학살 보고서’
수백명 난민들 심층 인터뷰 통해 세계 첫 마을 단위 종합·분석 작업
미얀마 정부의 조직적 범죄 증거로
로힝야 여성이 지난해 6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집단학살을 증언하다 괴로워하고 있다. 이 여성이 살던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쿠텐콱 마을에선 최소 148명의 로힝야 주민이 미얀마 군인들에게 숨졌다. 10세 미만 희생자도 33명으로 추산됐다. ⓒ조진섭
로힝야 여성이 지난해 6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집단학살을 증언하다 괴로워하고 있다. 이 여성이 살던 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쿠텐콱 마을에선 최소 148명의 로힝야 주민이 미얀마 군인들에게 숨졌다. 10세 미만 희생자도 33명으로 추산됐다. ⓒ조진섭
2017년 8월25일 오전 3시쯤 빗소리에 섞인 총성을 처음 들었다. 미얀마 서쪽 라카인주 북부의 로힝야족 거주지 쿠텐콱 마을 주민 안다르(60·가명)는 딸에게 말했다.
“군인들이 여자에겐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남자들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모두 마을을 떠나면 저들(군인)이 집을 불태울 테니, 일단 남자들은 도망가고, 여자들은 집을 지키는 게 나을지도 몰라.” 
안다르는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아들과 함께 마을 동쪽 숲으로 도망쳤다. 몸을 피한 뒤 멀찍이서 마을을 바라봤다. 마을 남쪽에서부터 군인들이 몰려왔다. 군인 400~500명은 초록색 군복을 입었다. 카키색 복장의 경찰도 보였다. 군인들은 총알을 퍼부었다. 총성이 멈추지 않았다. 그때 안다르의 딸, 손자, 아내가 죽었다. 
쿠텐콱 마을뿐이 아니었다. 2017년 8월 말, 미얀마 소수민족인 로힝야가 모여 사는 라카인주 북부 마을 곳곳에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총성이 울린 마을에선 주민들이 자취를 감췄다.
살아남은 사람 중 돌아온 이들은 없다. 삶을 일구던 마을을 떠난 로힝야는 지금까지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다. 모두 미얀마 정부와 군대, 이슬람교도인 로힝야를 탄압하는 불교도들을 피해 마을을 떠났다. 
유엔 자료를 보면, 로힝야 난민은 8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지금도 매달 수천명이 미얀마 정부의 핍박을 피해 국경을 넘고 있다. 
경향신문이 입수한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의 ‘로힝야 학살 보고서’는 온통 핏빛으로 얼룩져 있다. 학살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로힝야 난민들은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학살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어머니는 안고 있던 젖먹이를 빼앗겨도 막지 못했다며 울먹였고, 숲속에 피신한 주민들은 이웃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학살 보고서는 로힝야에 대한 체계적인 심층 인터뷰를 담았다. 로힝야 학살을 마을 단위로 종합·분석한 작업은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다. 
■ “우리는 정의를 원한다” 
로힝야 학살 보고서 -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2017년 9월13일, 나프강을 건너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많은 로힝야 주민들이 미얀마 군인의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인근 방글라데시로 넘어왔다.  EPA연합뉴스
2017년 9월13일, 나프강을 건너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로힝야 난민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 많은 로힝야 주민들이 미얀마 군인의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작정 인근 방글라데시로 넘어왔다. EPA연합뉴스
지옥에서 탈출한 사람들 
2017년 8월 미얀마 정부군 습격
로힝야 마을 400여곳서 학살 자행 
목숨 걸고 방글라데시로 피란
학살 명분은 ‘테러리스트 토벌’이다. 2017년 8월25일, 로힝야 반군인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 미얀마 경찰 초소와 군영 등 30여곳을 습격했다고 알려진 뒤 미얀마 정부의 군사작전이 시작됐다. 대테러 작전이라던 군사행동은 민간인들이 살던 로힝야 마을 약 400곳에서 집단학살과 방화·강간·약탈로 이어졌다. 
아디는 2017년부터 난민캠프에 거주 중인 로힝야들을 출신 마을별로 분류한 뒤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향신문은 아디가 지난해 12월 우선 제작한 인딘·돈팩·춧핀·쿠텐콱·뚤라똘리 등 5개 마을의 학살 보고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아디와의 인터뷰에 응한 이들은 5개 마을 출신 203명이다. 아디는 심층 인터뷰에다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진행해 학살 피해 상황을 통계화했다. 그 결과 마을별로 80% 이상의 주민들이 직계가족의 사망을 경험했고, 학살 피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디는 올해 15개 마을의 학살 보고서를 순차적으로 제작해 발표한다. 이 프로젝트는 내년까지 이어진다. 인터뷰를 완료한 로힝야 난민은 780여명이다. 이들의 인터뷰가 담긴 보고서는 학살 증거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출된다. 
■ 동시다발적 군사작전, 조직적 집단학살 
쿠텐콱 마을에 총성이 울린 2017년 8월25일 미얀마 라카인주 서북부 해안마을 인딘에도 포탄이 잇따라 떨어졌다. 아이를 안고 있던 한 남성은 폭격을 피해 달렸다. 나무로 만든 가옥에 포탄이 떨어지면 불이 붙었다. 한가로이 돌아다니던 닭들도 도망가기 시작했다. 길옆으로 포탄이 떨어졌다. 아이들이 타오르는 불길 사이를 소리치며 뛰었다. 뛰지 않으면 죽었다.
인딘마을 주민인 50대 여성 하디마(가명)는 이날 남편을 잃었다. 하디마는 소에 풀을 먹이던 남편을 집에서 바라봤다. 군인이 갑자기 마을에 몰려오자 남편은 숲속으로 피했다. 결국 붙잡힌 남편은 군인들 앞에 섰다. 군인들이 남편을 발로 차 쓰러트리고는 총의 개머리판으로 때렸다. 그리고 머리에 총을 쐈다. 군인들에게 섞여 있던 라카인주 민간인이 총에 맞은 남편에게 칼을 휘둘렀다. 다리를 잡아 뒤집어 보더니 죽은 것을 확인했다. 군인들은 남편 시신을 강에 던졌다. 하디마는 “남편을 구할 수 없었다”고 자책했다. 
이날 인딘마을에서 죽은 이들은 모두 147명으로 추산된다. 사망자 중 33명은 18세 이하였고, 90세가 넘는 노인도 1명 포함됐다. 
보고서에는 미얀마 군대와 경찰, 소수민족 탄압에 가담한 수많은 라카인주 출신 민간인들이 저지른 잔혹한 학살도 담겨 있다. 로힝야 마을 400여곳에서 며칠 사이 이뤄진 학살은 패턴으로 나타났다. 이른 오전 군경이 로힝야 마을을 사방에서 포위한다. 마을로 들이닥쳐 민가를 수색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인다. 학살이 끝나면 민가를 태우고 약탈한다. 학살자들은 시신은 땅을 파서 묻기도 했지만 대부분 내다 버렸다. 마을은 폐허가 됐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학살을 피해 수일에 걸쳐 맨발로 국경을 넘었다. 
아디가 제작한 ‘로힝야 보고서 - 춧핀’ 표지.
아디가 제작한 ‘로힝야 보고서 - 춧핀’ 표지.
■ 최악의 군사작전 벌어진 뚤라똘리 마을 
2017년 8월30일 오전 8시, 라카인주 북부의 마웅도 지역 뚤라똘리 마을 상공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마을 북쪽에서부터 이어진 강이 뚤라똘리 마을을 감싸듯 동쪽과 남쪽으로 흐른다. 마을 북동쪽 강변 백사장을 두고 사람들은 ‘데저트’라고 불렀다. 이날 데저트에는 1500~2000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마을행정관이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도망가지 말고 데저트로 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군인 공격을 피해 뚤라똘리 마을로 피신해 온 이웃마을 와이꽁과 디오똘리의 주민도 데저트로 갔다. 하지만 데저트에는 곧 총알이 쏟아졌다. 눈치 빠른 이들이 먼저 강에 뛰어들어 도망갔다. 수영할 줄 모르거나 아이를 돌봐야 했던 주민들은 꼼짝할 수 없었다.
무사히 강을 건넌 주민들은 많지 않았다. 물가에 아이들 시신이 떠다녔다. 젊은 남자들이 머리가 터져 죽은 갓난아이 시신을 물가로 건져냈다. 물가에 시신이 늘어섰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강을 건넌 주민들은 서둘러 물가를 빠져나왔다. 살아남은 이들은 강 건너 마을에서 벌어진 살육을 목격했다. 
뚤라똘리 마을주민 마리즈(30·가명)는 이날 목숨을 건졌지만, 생후 2년6개월 된 아이를 잃었다. “어떤 아기들은 총에 맞아 죽었고, 칼에 찔리거나 강에 빠져 죽었습니다. 저는 아이를 안고 있었는데, 군인이 제 아기를 빼앗아가 (시신을 태우기 위해 파둔) 불구덩이에 던져버렸습니다.” 아이를 죽인 뒤 군인들은 5~6명씩 여성들을 민가로 끌고가 성폭행했다. 
지옥을 증언하는 사람들 
인딘·돈팩 등 5개 마을 출신 203명
진술로 확인된 사망자만 1265명 
80% 이상 “직계가족의 죽음 경험”
로힝야에 대한 학살이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곳은 뚤라똘리 마을이었다. 아디는 뚤라똘리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을 “미얀마 군부가 주도한 군사작전 중 최악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이 마을 주민 증언을 종합해 아디가 내놓은 사망자 숫자는 451명이다. 여성이 248명, 18세 이하 청소년과 아동은 251명이다. 이 중 10세 이하 아동이 169명으로 전체 사망자 중 37%를 차지했다. 이마저도 최소치의 추산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을을 떠난 로힝야 사람들은 며칠씩 걸어 국경을 넘었다. 음식과 물이 없어 피란 중에도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돈팩 마을에 살던 에나울라(20·가명)는 총탄에 맞아 부상당한 뒤 방글라데시로 피신을 가기로 했다. 숲속을 나흘 동안 걸었다. 가족들이 에나울라를 부축했다. 그는 “강가를 지날 때 물 위에 시신들이 떠다녔다”고 했다. 
같은 마을 주민 나빌라(44·가명)도 고향을 떠나기 싫었지만, 이웃마을에서 학살이 벌어지자 피란을 결정했다. 도망가는 동안 먹을 게 없었다. 나빌라는 “아직도 피란 가며 느꼈던 슬픔과 어려움이 생각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숲속을 걸을 때 피 흘리는 로힝야들과 시신이 보였다. 국경을 완전히 넘기 위해선 배를 얻어 타야 했지만, 그와 가족들은 빈털터리였다. 나빌라는 “돈이 없어 몸에 있는 모든 장신구를 뱃사공에게 줬다”고 했다. 
그들은 왜 우리를 죽였나 
보복 두렵지만 증언 결심한 건
국제사회의 ‘정의’를 원하기 때문 
내년까지 보고서 완성해 ICC 제출
아디 인터뷰에 응한 로힝야 피해자들은 난민캠프에 거주하면서도 자신의 신원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했다. 혹시 모를 불이익을 겪게 될까,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 고향에 돌아가서도 보복을 당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아디와의 인터뷰에 응한 건 자신들의 증언이 로힝야에게 벌어진 학살을 고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층 인터뷰에 응한 로힝야 피해자들은 “국제사회에 말하고 싶은 것”을 묻는 질문에 하나같이 “정의를 원한다”고 했다. 뚤라똘리 마을의 한 30대 여성은 “내가 살던 집과 정의를 되찾길 원한다. 왜 이런 폭행을 당해야만 했고, 그들은 우리를 왜 죽였을까. 국제사회의 정의를 원한다”고 말했다. 다른 남성은 “내 부모를 죽이고 아내와 여동생을 성폭행하고,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아간 데 대한 정의를 원한다”고 했다. 
학살이 벌어진 지 이미 500일이 지났다. 정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2017년 9월13일, 미얀마 군부의 군사작전을 피해 고향을 떠난 로힝야 난민들이 라카인주 북부 부티다웅의 마유강변을 따라 걷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사진 크게보기
2017년 9월13일, 미얀마 군부의 군사작전을 피해 고향을 떠난 로힝야 난민들이 라카인주 북부 부티다웅의 마유강변을 따라 걷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 ‘로힝야 학살 보고서’ 만들기까지 

방글라데시 난민촌 로힝야족이 직접 인터뷰… 
6~10명 조사관, 현지서 보고서 작성법 교육받고 법적 효력 갖는 증언·증거 수집 ‘총력’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가 제작한 ‘로힝야 학살 보고서’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 거주하는 로힝야족 조사관들의 손을 거쳐 나왔다. 난민들이 직접 자신들이 겪은 학살 참상을 고발했다. 조사관 6~10명은 5개 마을 203명을 심층 인터뷰한 두 보고서를 작성했다. 학살이 벌어진 마을은 약 400곳이다. 

아디는 로힝야 마을 학살 보고서 제작 프로젝트를 2020년까지 진행한다. 조사관들은 최대한 많은 마을에서 학살 증거를 확보하려고 지금도 쉼없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학살 보고서의 조사관 아자쟈(40·가명)는 경향신문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로힝야에게 벌어진 집단학살을 입증하려고 조사에 참여했다고 했다. 그는 “이번 조사를 통해 미얀마 군부가 로힝야를 상대로 저지른 학살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며 “국제형사재판소에서 학살 책임자들을 기소할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조사관들은 한국과 방글라데시를 오가는 아디 관계자들에게 교육을 받은 뒤 조사를 진행했다. 인터뷰가 법적 효력을 가지려면 여러 절차가 필요하다. 우선 난민캠프를 다니며 출신 마을을 분류하고 피해자와 목격자를 정확히 구분하는 과정부터 시작했다. 대상이 선정되면 1시간30분가량 인터뷰한다. 

집단학살, 부상, 폭행, 강간, 사회제도적 탄압 등 피해 상황을 순차적으로 자세히 묻는다. 직접 목격한 학살은 피해자의 이름과 나이, 발생 장소와 시간도 확인한다. 마을주민들이 촬영한 현장 사진이나 영상, 또는 진단서가 있으면 함께 수집한다. 부상 부위는 직접 촬영해둔다. 위임장도 함께 받아둔다. 조사를 마치면 영어 녹취록을 제작한다. 

로힝야 조사관들이 자신이 경험한 학살을 조사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자쟈는 “인터뷰를 할 때면 (로힝야로서)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고 했다. 무슬림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잔혹한 상황을 수없이 마주해왔다. 조사관으로 활동하며 희생자 숫자를 들을 때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희생된 부모, 형제들을 생각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난민을 붙잡고 계속 질문해야 했다. 구체적인 상황과 희생자 숫자를 확인하려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난민캠프에서 조사활동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캠프 안 활동은 자유롭지 못하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캠프 내 광범위한 학살 조사를 허가하지 않았다. 아자쟈는 “늘 허가 없이 난민캠프를 다니며 조사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조사관 활동을 계속하는 건 로힝야 사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아자쟈는 “우리가 직접 수집한 로힝야 생존자들의 증거와 증언을 국제사회가 받아들이길 바란다”며 “이런 증거를 바탕으로 반인륜적인 범죄와 집단학살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기를 원한다”고 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