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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2일 화요일

신조어, 소통의 장벽을 넘어서 - 김창균 빛고을고등학교 교장


벌써 재작년 일이 되었다. SNS를 등에 업고 직장인 사이에서 널리 퍼진 신조어로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 있었다. 실제로 퇴사하지는 않지만 정해진 시간과 업무 범위 안에서만 일하고 초과근무를 거부하는 노동 방식을 뜻하는 말로, 미국의 엔지니어 자이들 플린(Zaidle ppelin)이 틱톡에 올린 영상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이전에도 주위에는 비슷한 맥락의 신조어가 있었다. 일과 일상의 균형을 찾으려는 ‘워라밸’, 일에 따른 성취보다는 일상의 작은 만족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뜻하는 ‘소확행’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신조어의 유행에 편승한 바탕에는 직장 생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한다. 일이 곧 삶이 아니며, 본인의 가치가 직장에서의 성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출발하여 승진과 과로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코로나 팬데믹과 맞물린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조어가 특정 세대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 말하듯 언어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이기에 시대와 계층의 삶을 아우르는 생각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대외 접촉이 단절되었을 때, ‘확진자’에 대응하여 꼼짝없이 집에 갇혀 살만 찌우고 있다는 ‘확찐자’가 시류의 한 단면을 표상했듯이 말이다.

그런데 신조어로 인해 소통의 난항을 겪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 방송에서는 자칭 트민남(트렌드에 민감한 남성)을 자처하는 모 진행자가 ‘드르륵 칵(편의점)’이라는 신조어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문 닫는 소리라고 추측하여 주위의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었다. 이쯤은 가볍게 웃고 지날 일이지만, “안 보면 껄무새(후회) 됨. 보면 롬곡(눈물)”에 이르면 신조어가 아이와 부모의 소통을 막는 외계인의 음모라는 말이 맞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본격적으로 사귀기 전 친근한 단계를 흔히 ‘썸탄다’고 하는데, 사(4)귄다에서 유추하여 ‘삼귄다’로도 표현하는 젊은이의 머릿속에서 플라스틱 의자가 땅에 끌리는 소리로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당혹스러운 인터넷 밈이던 이른바 야민정음(野民正音)은 이제 익숙하게 다가서기도 한다. ‘댕댕이 커여워요’라고 쓰고 ‘멍멍이 귀여워요’로 이해하는 사람이 제법 늘어났는데, “집 앞에 있는 편의점 드르륵 칵에서 보자.”가 일상 대화로 쓰이는 세상이 머지않아 올지도 모르겠다.

한편 사이버 공간과 정보에 대한 활용 능력이 뛰어난 MZ의 특성과 맞물려 줄임말도 늘고 있다. ‘구취’(구독 취소),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를 보면 ‘별다줄’(별 것을 다 줄인다)이라 할 만도 하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기 청소년 은어에 이미 ‘아더매치’(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하다)가 있었고, 역세권(驛勢圈)에 빗대어 대형 프랜차이즈가 가까운 아파트를 일컫는 ‘스세권’, ‘맥세권’과 함께 ‘초품아’(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는 성인들 사이에서 뜬 신조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조어는 시대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기존 언어를 넘어 새로운 사회 현상을 정확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말의 다양성에 기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반면 신조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언어 규칙을 파괴하고 세대 간 소통을 저해하는 데 있다. 맞춤법을 간략히 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던 습관이 자기소개서에 버젓이 등장한다. 방송 자막에도 가끔 등장하는 ‘탈룰라’, ‘리즈 갱신’의 맥락적 의미를 읽어내는 기성세대는 얼마나 될까.

신조어의 순기능을 십분 이해하지만, 세대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도 중요 함을 알아야 한다. 손가락이 왕자(공주)여서 스스로 정보를 찾으려 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질문만 하는 사람을 ‘핑프’(핑거 프린스/프린세스)라고 한다는데, 기성세대의 완루한 모습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조어에 능숙한 세대도 ‘고인물’(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라 ‘뉴비’(어떤 분야에 미숙한 초보자)의 처지에서 의사소통의 중요성과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2024년 01월 03일(수)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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