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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4일 목요일

이미 다 하던 걸? 윤 대통령과 용산의 네덜란드 순방 성과 부풀리기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1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공군1호기에 올라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윤석열 대통령과 용산 대통령실은 이른바 ‘엑스포 참사’ 직후 네덜란드 국빈 방문에 나선 데 대한 비난 여론을 의식한 듯, 네덜란드 순방 성과 홍보를 쏟아내고 있다. 다소 과장된 내용들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것이 반도체 협력에 관한 내용들이다. 윤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네덜란드 마르크 뤼터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네덜란드와 이른바 ‘반도체 동맹’으로 관계를 격상시켰다고 하면서, “반도체 동맹은 초격차를 유지하고 최첨단의 기술을 함께 구축해 나가기 위해서 중요한 과학 기술적인 문제들을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고 정보를 긴밀하게 공유한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동안 한국과 네덜란드의 반도체에 관한 관계가 긴밀한 협력 관계였다고 하면, 이번에 저의 방문을 계기로 협력 관계를 동맹 관계로 끌어올렸다. 동맹은 중요한 정보를 긴밀하게 공유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와는 반도체 분야에서 밀접한 협력 관계였는데, 이번 국빈 방문을 계기로 ‘반도체 동맹’으로 격상됐다는 것이다.

문제는 기존의 협력 관계와 윤 대통령이 말하는 ‘동맹’이 내용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한국과 네덜란드가 ‘반도체 동맹’을 맺는 것 자체가 현재의 국제질서나 미국이 추진하고자 하는 공급망 재편 구도에서 어떤 의미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미 한국과 네덜란드는 미국 주도의 반도체 칩4 동맹 구상에 강하게 종속돼 있는 국가다. 한국은 칩4 동맹 구상의 직접 당사국이고, EUV 노광장비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국가인 네덜란드는 미국 칩4 동맹 구상의 핵심 수단이다. 결국 동맹 질서의 주도권은 미국이 쥐고 있고, 그 구상에 따라 한국과 네덜란드는 움직이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 주도 동맹 구상에 종속돼 있는 한국과 네덜란드가 맺는 동맹이 독자성 및 실효성을 지니는 건 비현실적이다.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은 14일 ‘민중의소리’와 통화에서 “미국이 구상하는 반도체 동맹은 경제안보 논리상 미국이 이익을 가져가는 의미에서의 동맹인데, 네덜란드도 한국과 비슷하게 지금 미국이 만들어놓은 중국 디커플링의 망 속에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원리적으로 양국 관계의 위상이 ‘반도체 동맹’이라는 것을 매개로 변화된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양국이 ‘반도체 동맹’을 명목으로 새롭게 하겠다고 발표한 내용들이 기존에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일까?

현실에서 이미 삼성전자는 ASML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삼성전자는 11년 전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개발을 위해 ASML 지분 3%를 매입하는 등 오래 전부터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재용 회장은 작년에도 ASML을 찾아 EUV 장비 수급 및 기술협력 방안 등을 논의한 바 있다. 우리가 나서서 네덜란드 정부를 움직여 ASML을 통해 공급망 안정화를 확보한다는 식의 대통령실의 성과 홍보가 매우 부자연스러운 배경이다.

더구나 ASML이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러한 성과 홍보가 지나치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의 반도체 관련 공급망 재편 추진에 따라 네덜란드는 2019년부터 ASML의 EUV 노광장비 중국 수출을 금지했다. 최근엔 DUV(심자외선) 노광장비 역시 미국의 대중국 수출 규제 품목에 새롭게 포함됐다. ASML로서는 최대 거래처인 중국 수출길이 차단돼 삼성전자나 대만의 TSMC와 같은 파운드리 강세 기업들을 타깃으로 장비를 팔아 매출을 보전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우리의 성과 홍보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김준형 전 원장은 “반도체 장비 시장은 셀러스 마켓이 아니라 바이어스 마켓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몇 년간 갑이 되는 관계인데 오히려 우리가 구하는 모습을 하고 우리가 저쪽을 띄워주는 모습을 하니,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손해 볼 일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삼성전자는 이미 ASML과 5년짜리 EUV 노광장비 구매 계약을 체결해놓은 상태다.

‘반도체 동맹’의 근거로 포장되고 있는 3건의 MOU(양해각서) 역시 내용상 성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양국 정상 임석 하에 체결된 반도체 관련 MOU는 ▲삼성전자- ASML의 차세대 반도체 제조기술 R&D 센터 건립 ▲SK하이닉스-ASML의 EUV용 수소가스 재활용 기술 공동개발 ▲한국 산업부-네덜란드 통상개발협력부 간 한-네덜란드 첨단반도체 아카데미 협력, 이렇게 3건이다.

일단 MOU가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양해각서라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R&D 센터나 EUV용 수소가스 재활용 기술 개발의 경우 아웃풋이 확실한 생산과 직결되는 시설이 아닌 데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입장에선 실익 측면에서 크게 의미가 없다는 평가가 많다.

김 전 원장은 “ASML이 아시아에 투자하는 게 우리한테는 R&D인데, 생산과 관련해서는 대만의 TSMC 쪽이다. 대규모 생산공장을 그쪽으로 옮기는 것”이라며 “대만에 넘어갈 걸 R&D와 더불어 우리가 끌어왔다는 정도는 되어야 가는 게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네덜란드는 장비 기술밖에 없으니 합작 연구를 하면 오히려 자기들이 가져갈 게 많다”고 했다.

또한 반도체 관련 교육을 위한 아카데미와 같은 사업은 이미 ASML이 한국에서 하고 있다. ASML은 2010년 한국에 자사 장비 설치 및 업그레이드를 담당하는 엔지니어의 역량 개발과 숙련된 엔지니어 배출을 위한 교육 시설인 ‘핸즈 온 아카데미’를 개소했고, ASML 코리아는 2018년 동탄 본사에 글로벌 트레이딩 센터를 개소했다. 올해 5월에는 용인에 새 트레이딩 센터를 또 열었다.

박춘섭 경제수석은 “인재를 같이 키우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은 진정한 반도체 동맹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는데, 박 수석의 말대로면 한국과 네덜란드는 이미 2010년부터 ‘반도체 동맹’이었던 것일까.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벨트호벤 반도체장비 생산기업인 ASML 본사에서 빌럼(왼쪽 두번째) 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과 클린룸을 시찰하며 크리스토프 푸케(왼쪽 세번째) ASML 최고사업책임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3.12.12. ⓒ뉴시스

윤 대통령이 ASML ‘클린룸’을 방문한 세계 유일한 정상이라는 사전·사후 홍보 역시 다소 궁색하다.

윤 대통령의 클린룸 방문이 마치 보안 수준이 높은 구역에 가는 것인 양 ASML이 특별 대우해주는 일인 것처럼 홍보했다. 박춘섭 경제수석은 순방 1일차 현지 브리핑에서 “양국 정상은 차세대 EUV 장비를 생산하는 ASML 클린룸을 시찰한다. 윤 대통령 방문에 맞춰 처음으로 대외 공개하는 것이며, ASML과 한국 반도체 기업들과의 깊은 신뢰 관계와 전략적 협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ASML은 자사 공식 유튜브 계정에 클린룸 내부를 세세하게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고 있다. 해당 영상에는 엔지니어가 클린룸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클린룸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이재용 회장도 이미 작년 6월 ASML 본사를 방문했을 때 직접 클린룸을 살펴봤다. ASML이 클린룸을 처음으로 대외 공개한다는 박 수석의 말은 사실관계조차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동맹’이라는 의미 부여가 최소한 인정을 받으려면 상호 같은 표현을 쓰며 비슷하게 의미부여를 해야 할 텐데, 정작 네덜란드 정상은 공동기자회견에서 ‘반도체 동맹’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뤼터 총리가 모두발언에서 반도체를 언급한 부분은 “어제 ASML을 방문하셨다. 한국에서 생산하는 마이크로칩을 위한 기계를 이 회사에서 만들고 있다. 이제 우리 양국은 이 분야에서 협력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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