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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30일 토요일

"미국은 중동에서 빠질 때 늘 최악의 순간을 골랐다"

[프레시안 books] <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


1990년대 초 옛 소련이 작은 공화국들로 나눠지고 동서 냉전체제가 사라진 뒤, 미국은 유일 초강국으로 떠올랐다. 미국은 전 세계 국방비 총액의 40%를 넘나드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부어 만든 강력한 군사력과 자본력을 배경으로 세계를 정치·경제적으로 압도해 왔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2019년 연감 자료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국가들이 지출한 국방비 총액 1만8220억 달러 가운데 35%는 미국 몫이다(중국은 15%로 2위). 

세계를 6개로 나누어 군 사령부를 두고 해외에 군대를 주둔시킨 국가는 오로지 미국 하나뿐이다. 미주 대륙을 남북으로 아우르는 북부사령부와 남부사령부, 유럽의 유럽사령부, 아프리카의 아프리카사령부, 아시아의 아시아-태평양사령부, 그리고 중동지역의 중부군사령부는 각기 맡은 지역의 군사적 우위를 이어감으로써 미국의 이익을 지켜내고 있다. 특히 중부군사령부는 9.11테러를 겪은 뒤 벌인 아프간 침공(2001)과 이라크 침공(2003)을 주도적으로 이끌었고, 지금 이 시각에도 중동의 긴장 상황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돌이켜 보면, 오래 전부터 미국은 중동 지역 세력과 결탁하거나 대립하면서 이익을 챙겨왔다. 독재 정권 뒤에서 군부를 움직여 교묘하게 쿠데타를 조작하기도 했다. 중동 국가 내부 문제를 이용하거나 개입함으로써 이권을 챙기고 패권적 지배력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지금도 이어지는 미국의 중동 전략이다. 

신간 <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장피에르 필리유 지음, 다비드 베 그림, 권은하 옮김, 다른 펴냄)은 △미국이 지난날 어떤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 중동 지역에 진출했는지 △중동 석유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미국은 어떤 밀실 야합과 음모로 중동 독재자와 손을 잡았는지 △중동의 반미정서를 키우는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가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 등을 만화의 형식을 빌려 실감나게 보여준다.  

글 작가 장피에르 필리유는 프랑스 외부무 고문역을 맡아 중동 현지에서 전문가로 활동한 이슬람 전문 역사가다. 프랑스의 비판적 지성인답게 제3자 입장에서 미 정부와 중동 국가의 배반과 모략의 역사를 균형 잡힌 시작으로 전한다. 그림 작가 다비드 베는 프랑스 독립만화의 기틀을 다진 작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특유의 강렬한 흑백 그림 스타일로 미국, 중동의 지도자들을 정치 성향에 따라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

군함 위에서 만난 대통령과 국왕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강대국으로 차츰 발돋움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21세기의 미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이지만, 19세기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대서양과 지중해 일대에서 세력을 떨치던 이슬람 무장 세력을 상대로 힘든 전투를 벌였다. 일부 미군 장병들은 포로로 잡혔고, 미국 정부는 거액의 몸값을 치르곤 했다.  

19세기 끝 무렵인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이겨 쿠바와 필리핀을 차지하기 전까지 미국은 강대국이라 보기 어렵다. 19세기 후반 많은 국방예산을 들여 이른바 '철선' 건조에 힘을 쏟은 덕에 미국은 스페인 해군을 무찌르고 강대국 반열에 가까이 나아갔다. 

1부 중반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 대통령이 수에즈운하 근처의 미 군함 위에서 사우디 국왕을 만나는 대목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돌이켜 보면, 20세기 미국의 중동 정책에서 한 축은 사우디 석유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1945년 초 미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뇌출혈로 죽기 직전에 사우디 국왕 이븐 사우드와 만나 이렇게 합의했다.

"미국이 사우디 석유에 대한 특혜적인 접근을 허가 받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 왕조를 안팎의 도전으로부터 지켜 준다." 그로부터 70년 넘는 동안 사우디의 친미 독재왕정은 미국에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약속하고 왕권의 안보를 보장 받는 유착 관계를 이어왔다. 

석유 이권 노린 쿠데타 개입 

1부 후반부는 1953년 이란 석유 이권을 노린 미국의 비밀공작을 다루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두 정보기관(CIA와 MI6)이 '아작스 작전'이란 이름 아래 이란 석유 이권을 챙겨가는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비화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이란 석유를 이란인의 손에!"라는 구호 아래 석유 국유화를 추진하던 민족주의자 모사데크 총리를 몰아내는 친위 쿠데타를 성공시킴으로써, 미국은 이란 석유 이권 40%를 챙겼다(나머지 40% 이권은 영국이, 20%는 이란 모하메드 레자 팔레비 독재왕정). 미국의 쿠데타 개입은 이란 사람 반미 정서의 출발점이다. 

미 중동정책의 이중 잣대 

2부는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 사이에 벌어진 제3차 중동전쟁(1967)과 제4차 중동전쟁(1973), 이란 이슬람혁명(1979), 레바논내전(1975-1990) 등 중동의 유혈 분쟁에서 미국이 어떤 모습으로 대응 또는 개입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1965년 처음으로 무기를 실은 미국 배가 이스라엘을 향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장해준 미국의 군사적 지원 덕으로 이스라엘은 1960년대 중반에 이미 주변 아랍국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게 됐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6일 만에 빛나는 승리를 이루었던 배경으로 흔히 이스라엘의 기습 선제공격을 꼽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빼고 말하기 어렵다.  

1960년대 중반 이스라엘은 핵무기 비밀 공장을 남부 네게브 사막 한가운데 세우고 핵개발에 나섰다. 훗날 알려진 바로 1969년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투명성을 요구하지 않기로 비밀협정을 맺었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핵확산금지조약(NPT)에도 가입 안 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도 받지 않았다. 핵개발 논란과 관련, 엄청난 압박을 받았던 이란과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의 중동정책이 이중 잣대를 지녔다는 비판이 따른다. 

2부 중반부에선 이집트와 시리아가 기습전을 벌여 이스라엘을 위기에 빠뜨렸던 제4차 중동전쟁을 다루었다. 이 전쟁을 이스라엘이 막판 뒤집기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끈 것도 미국이다.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를 무기로 보복에 나섰고, 세계적인 유가 폭등 탓에 한국도 애꿎게 피해를 봤었다.  

2부는 이란 이슬람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도 잘 풀이한다. 이란 시아파 성직자 아야톨라 호메이니(1900-1989)를 지도자로 한 이슬람 혁명의 성공은 오랫동안 외세가 챙겨가던 석유 이권을 이란 민중의 품으로 돌려주는 것을 뜻했다. 미국이 무슨 이유로 이란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지난 40년 동안 경제제재를 비롯한 여러 압박 정책을 펴왔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후세인의 오판 이끌어 전쟁판 벌인 미국 

3부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서 비롯된 걸프전쟁(199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1993), 그리고 오사마 빈 라덴의 9.11테러(2001)와 그에 따른 미국의 아프간 침공, 미국의 이라크 침공(2003), 시리아전쟁(2011-현재) 등을 실감 나게 다루고 있다. 이 모두 미국이 중요한 행위자(actor)로 깊숙이 관여한 사건들이다. 저자는 미국의 최근 중동정책들을 하나씩 비판적으로 짚어본다.  

3부에서 눈여겨볼 대목 가운데 하나는 1990년 이라크-쿠웨이트 긴장 상황이 커질 무렵 "미국은 아랍 내 분쟁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것을 분명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980년대에 8년을 끌었던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 사담 후세인을 지원했다. 쿠웨이트를 이라크 영토에 합병시키고 싶어 하던 후세인은 "미국은 내가 무력으로 쿠웨이트를 접수해도 눈감아줄 것이야"라고 오판했다. 정치학자들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미국의 무력개입을 불렀고(1991년 1차 걸프전쟁), 12년 뒤 미국의 이라크 침공(2차 걸프전쟁)으로 후세인의 몰락을 가져온 출발점으로 여긴다.  

3부의 후반부는 2011년 민중의 민주화 요구가 중동지역에 불어 닥친 '아랍의 봄'과 그에 따른 리비아와 시리아에서의 유혈충돌을 그려냈다. 시리아 독재자 아사드가 화학무기를 사용해 민간인을 죽인 범죄행위를 짚으면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유대인 정착촌 둘러싼 갈등 

아울러 3부는 오바마와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사이에 유대인 정착촌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보여준다. 오바마는 정착촌이 중동평화를 어지럽히는 암초라 여겼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이스라엘 건국 70주년을 맞이한 날(2018년 5월14일) 국제사회의 반대에도 아랑곳없이 미 대사관을 예루살렘에 옮겨 이스라엘 극우강경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는 더욱 노골화된 모습이다. 2019년 봄에는 국제법상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이 이스라엘 영토라고 주장하더니,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유대인 정착촌이 국제법상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억지 주장마저 편다. 국제법의 상식을 깨뜨리는 그런 발언들이 나올 때마다 중동 사람들의 반미정서도 커진다. 사려 깊은 일부 유대인 지식인들은 "트럼프의 정책이 중동평화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걱정한다.  

"미국은 빠질 때 늘 최악 순간 골랐다" 

저자 장피에르 필리유는 "미국이 언제나 좋은 의도로 중동문제에 개입한 것도 아니며, 문제에서 빠질 때는 늘 최악의 순간을 골랐다"는 결론으로 책을 마무리 짓는다. 나는 그 결론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프랑스 지식인의 비판적 시각에 동감하면서...

미국을 바라보는 중동 사람들의 눈길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친미 독재자들과 손잡아 석유이권을 챙겨온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기억이 중동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국은 중동에서 전쟁 중이다. 한국은 중동에서 필요한 석유의 85%가량을 수입해온다. 따라서 중동 평화는 한국에도 소중하다. 지구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중동 분쟁의 원인과 문제점, 아울러 강대국인 미국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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