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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7일 토요일

용산구 이촌동이 겪은 '참 치사한' 차별

18.07.08 10:50l최종 업데이트 18.07.08 10:50l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인들은 여름철 장마 때도 차별을 당했다. 특히 서민층인 경우에는, 노골적 민족 차별로 자연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은 입으로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선전했지만, 재난피해로 큰돈을 써야 할 때는 한국인을 대놓고 박대했다. 이런 피해를 당한 대표적 지역이 지금의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이다. 

이촌동은 원효대교·한강철교·한강대교·동작대교 4개 대교가 강변북로와 만나는 곳이다.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도 여기 속한다. 이촌동과 맞닿은 위쪽은 용산이다.  

강변북로를 따라 원효대교에서부터 동작대교 구간을 달리다 보면, 중산층 아파트를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이렇지만, 일제강점기까지는 빈민가였다. 장마 피해가 유난히 심한 상습 침수 지대였기 때문이다.   
 1927년 지도에 실린 이촌동. 이 지도는 <정도 600년 서울지도>에 수록돼 있다. 붉은 글자는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  1927년 지도에 실린 이촌동. 이 지도는 <정도 600년 서울지도>에 수록돼 있다. 붉은 글자는 이 기사의 필자가 첨가한 것이다.
ⓒ <정도 600년 서울지도>

이곳의 한자 이름이 이촌(二村)인 이유도 여기 있다. 이촌의 '이'는 처음엔 二(두 이)가 아니라 옮길 이(移)였다. 二가 移로 바뀐 것과 관련해 서원대학교 지리학과 송호열 교수의 <한국의 지명 변천>은 이렇게 말한다. 

"원래 이곳은 한강변 모래벌판으로 여름철에 홍수가 들면 강 가운데 섬마을(노들섬)에 살던 주민들은 강안(江岸, 강가 언덕)으로 옮겨 살아야만 했기 때문에 원래 지명은 이촌동(移村洞)이었는데, 나중에 한자가 바뀐 것이다."

장마 때면 옮겨 살아야 했다. 그래서 '옮길 이'를 써 이촌동이라 불렸던 이곳은 빈민가라는 이유로 일반 한국인보다 더 심한 차별을 당했다. 차별이 심했던 것은 인근에 용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시민항쟁인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가 남대문 밖 용산에 주둔한 게 계기가 돼 훗날 일본군도 이곳에 주둔하게 됐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용산 땅 300여 만 평이 일본 군사기지로 조성됐다. 조선주둔군 사령부를 비롯한 대규모 군사시설이 이곳에 건설됐다. 

용산 일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게 된 사연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용산역
▲  일제 강점기 당시의 용산역
ⓒ wiki commons

용산은 교통 면에서도 요지였다. 대한제국 멸망 6년 전인 1904년, 지금의 용산역이 세워졌다. 그랬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는 군부대와 철도역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이 용산 일대에 대거 거주하게 됐다. 

여의도와 한강 이북을 잇는 세 다리 중 하나가 원효대교다. 원효대교 북단은 욱천(만초천)이라는 하천과 이어진다. 복개돼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원효대교 북단에서 2km 안 되는 곳에 욱천고가도로가 있다는 사실에서 과거의 욱천을 느낄 수 있다. 바로 그 욱천을 경계로 서쪽은 구(舊)용산, 동쪽은 신용산이다. 이촌동은 신용산 남쪽과 닿아 있다. 일본인들은 구용산과 신용산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일본이 한국을 빼앗은 지 2년 뒤인 1912년, 이촌동과 용산 일대가 대규모 홍수 피해를 겪었다. 그러자 구용산의 일본인들은 총독부에 제방 건설을 청원했다. 이 요구를 수용해 총독부는 1914년 8월부터 공병대를 동원해 구용산 제방을 건설했다. 인근의 이촌동이 한강과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장마 피해도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이촌동에 제방을 건설하는 게 더 시급했지만, 총독부는 이쪽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1920년, 이촌동과 용산 지역이 또다시 홍수 피해를 입었다. 그러자 총독부가 내린 판단은, 구용산 제방을 보강해주는 동시에 신용산에도 제방을 세워줘야겠다는 것이었다. 신용산 서쪽에서부터 제방을 세워 신용산의 서·남·동쪽을 제방으로 막아주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신용산 서쪽은 욱천과 닿아 있지만, 남쪽은 이촌동과 닿아 있다. 한강물과 닿아 있는 게 아니라 이촌동이라는 거주 구역과 맞닿아 있다. 총독부의 결정은, 이촌동과 신용산 사이에 담장을 쌓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강이 범람하면, 이촌동과 신용산 경계에서 물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촌동에 설치하면 될 제방을 굳이 이촌동-신용산 경계에 세우고자 했다. 이촌동 장마 피해에 대해서는 '알 바 없다'는 식이었던 것이다. 신용산 제방 공사는 1923년 착공됐다. 그러자 이촌동에서 항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2012년 <한국사 연구> 제157호에 실린 김종근의 논문 '일제하 경성의 홍수에 대한 식민정부의 대응 양상'은 이렇게 설명한다.

"신용산 제방에서 제외된 서부 이촌동민은 우선 용산의 다른 지역(구용산·신용산)에서 대처했던 방식대로 치수위원회를 조성하고 한인 김용범과 함께 일본인 부전병장(富田兵藏, 도미타 효우조우)을 대표위원으로 선임하여 총독부의 토목부 및 경성부를 찾아가 제방을 쌓아줄 것을 요구하는 진정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의 비판... "총독부를 양해할 수가 없도다"

총독부는 이촌동에 제방을 만들어주지 않은 이유로, 제방이 세워지면 배를 대기 어려워져 이촌동 어민들의 생계가 힘들어질 수 있고, 또 제방 때문에 건너편 영등포가 위험해진다는 점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한테 이런 말은 변명으로만 들렸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총독부가 이촌동을 무시하기 때문에 제방을 세워주지 않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비판했다. 

"어느 경성부 책임자는 '이촌동민은 조금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까지 발표하였다 하니, 당국의 조치와 방침은 도저히 양해할 수가 없도다."

경성부 토목과장은 민원을 제기하는 이촌동 주민들한테 "이촌동에서 못 살겠으면 이대로 이사를 가라"는 말까지 했다. 침수 지역에 살 수밖에 없는 빈민들을 향해 그런 막말까지 내뱉었던 것이다. 

총독부는 이촌동 제방을 세워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렇지만, 주민들과 <동아일보>가 나서서 여론을 조성하고 여기에 동조자들까지 생겨나자, 완전히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경성부를 내세워 꼼수를 부렸다. 주민들한테 제방 설계비용의 부담을 요구했다. 설계사무소에 지불할 비용을 주민들이 대신 내주면 제방을 세워주겠다고 제안한 것. 황당한 제안이었다. 빈민들이 설계비용을 부담할 수 없을 거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 황당한 요구를 이촌동 주민들은 받아들였다. 그렇게라도 장마 피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들은 각지에서 모은 후원금을 보태 570만 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설계사무소에 의뢰해 설계서를 만들어서 경성부에 제출했다. 그렇지만 경성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댔다. 

주민들이 탄원서 제출과 항의집회 등으로 투쟁의 강도를 높여가고 <동아일보>의 응원 보도까지 계속되자, 경성부는 할 수 없이 공사 착수 결정을 내렸다. 이촌동 문제가 민족차별의 대명사처럼 부각되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공사 비용은 경성부가 대지만, 현장 노동은 주민들이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황당한 요구였지만, 주민들은 또다시 받아들였다. 

이제 뭔가 되는가 싶었지만, 또 마찬가지였다. 경성부의 결정은 총독부의 허가를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최종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경성부가 허가를 요청하자, 총독부는 '당연히' 거부했다. 총독부와 경성부가 합작해 이촌동 주민들을 농락했던 것이다. 

제방 하나 설치하면 끝날 문제인데, 동을 없애자던 일본
 1966년 4월 용산구 이촌동 판자집의 모습.
▲  1966년 4월 용산구 이촌동 판자집의 모습.
ⓒ 서울특별시

이대로 살아야 하나 보다 하고 이촌동 주민들이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그나마 그대로 살기도 힘들게 만드는 사정이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이촌동을 뒤덮었다. "전멸의 비운을 당한 이촌동"이란 표현을 써가며, 위 김종근의 논문은 피해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홍수로 이촌동의 경우, 노들섬에 위치하였던 동부와 중부 이촌동은 과반수의 주택이 쓸려 내려가 거의 황무지화되었고, 서부 이촌동의 경우도 다수의 가옥이 파손되었다."

이촌동 피해 상황을 접한 총독부는 이번에는 매우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 홍수 직후에 내린 대책회의에서 이촌동을 없애기로 하는 '이촌동 폐동'(廢洞) 결정이 나왔다. 총독부는 주민들한테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라고 요구했다. 주민들이 눈물과 땀을 흘려가며 수해복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요구를 한 것이다. 주민들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한강변에 있는 또 다른 지역인 송파·잠실·미사리 등지에도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지만, 이촌동처럼 폐동 조치를 당하지는 않았다. 총독부가 이 조치를 내린 이유 중 하나에 관해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서부이촌동 제방 건설과 관련된 문제는 당시 한인 차별의 전형으로 인식되던 문제이고 따라서 조선총독부나 경성부에게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문제였다. (중략) 잦은 진정 활동을 일으키며 사회불안을 일으키고 있던 소요의 근원지인 서부이촌동을 그대로 방치해둔다는 것은 이후 계속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식민정부의 입장에서는 서부이촌동민이 이주되어야만 했다."

이촌동에 제방을 건설해주지 않은 게 민족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됐기 때문에, 차제에 이촌동을 없애 논란을 차단하자고 총독부가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 이촌동 제방을 건설해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위 논문에 따르면, 당시의 이촌동은 위생상태가 좋지 않았다. 빈민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바로 위쪽 신용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이촌동을 기피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곳 일본인들은 자기네 동네와 이촌동이 한 울타리로 묶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굳이 신용산과 이촌동 경계에 제방을 쌓은 것도 모자라 이촌동을 없애기까지 한 데는 그런 심리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촌동이 물에 휩쓸리더라도 같은 제방 안에서 한 동네로 엮이기는 싫었던 듯하다. 

평소에는 일본과 조선이 하나라고 외치던 일본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큰돈을 써야 할 상황이 되면 한국인을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조선에서 거둔 세금을, 그런 상황에서는 일본인한테만 사용하려 했다. 일본 식민통치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자연재해 때 국민 일부를 차별하는 일은 일제강점기뿐 아니라 대한민국에도 종종 있다. 수도권이 집중호우 피해를 입은 1990년, 노태우 정권은 충주 쪽에서 남한강을 거쳐 한강으로 물이 넘쳐드는 것을 막고자 충주댐 수문을 늦게까지 닫아뒀다. 뒤늦은 충주댐 방류로 이 지역이 침수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기쁨과 즐거움을 남과 공유하는 것은 훌륭하지만 어렵지는 않다. 재난처럼 슬프고 힘든 일이 발생했을 때, 위험을 남한테 떠넘기지 않고 함께 감내하는 태도는 사회통합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일제강점기는 당연히 물론이고, 대한민국에서도 이 과제는 아직 충분히 성취되지 않았다. 
 충주댐.
▲  충주댐.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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