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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0일 금요일

Generation Left 선언

 

코로나 재앙이 드러내 보인 것·보이지 않게 한 것
김종익 | 2020-11-20 13:41:48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사이토 고헤이齋藤幸平
1987년생. 오사카시립대학 경제학부 연구과 교수. 전공은 경제 사상. 베를린 훔볼트 대학 철학과 박사 과정 수료. 「Karl Marx’s Ecosocialism : Capital, Nature, and the Unfinished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로 역대 최연소 Isaac Deutscher상 수상. 공저로 『노동과 사상』, 편저로 『자본주의의 종말인가, 인간의 종언인가? 미래로의 대분기점』이 있다.

■ 코로나 재앙이 드러내 보인 것·보이지 않게 한 것

수습이 보이지 않는 신형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사태를 야기하고 있다. 먼저 이번 팬데믹은 선진국에서 생겼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적 관심을 단숨에 독점해 버렸다. 다른 위기적 문제의 존재를 가려버렸다. 가장 두드러진 예가, 기후 변동 문제이리라. 2019년 말에는,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등의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 세계적으로 성행하고,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Green New Deal의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감염증 억제와 경기 회복이라는 절박한 과제를 앞에 두고, 기후 위기 대책의 우선순위는 후퇴하고 만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편 팬데믹에는, 이제까지 존재하면서도 주변화되어 있던 위기를, 확실하게 사회에 드러내 보였다는 측면도 있다. 심각한 양극화·빈곤 문제도 그렇지만, 과도한 글로벌 자본주의가 기후 변동이나 팬데믹을 야기하고, 사회의 번영 조건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요컨대, 팬데믹의 양의성兩義性은 이렇다. 코로나 재해는 많은 문제를 주변화하는 한편, 동시에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팬데믹보다도 근원적인 문제의 존재를 떠오르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글로벌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환경 위기 그 자체는, 신형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이 개발되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끝없이 계속 확대되는 이 경제 시스템의 폭주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 한, 환경 위기의 악화는 멈추지 않는 것이다.

■ ‘반긴축파’와 계급 중심주의

문명 생활을 유지하고 싶다고 하면, 환경 위기를 이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현재의 코로나 쇼크로 인한 경기 후퇴를 앞에 두고, 단순한 경제의 V자 회복을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

경기 회복은, 팬데믹 전의 ‘정상 작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고 경고하는 것은, ‘C40’으로 불리는 가장 야심적인 기후 위기 대응 정책을 약속, 실시하는 대도시 네트워크이다. 왜냐하면, 팬데믹 이전의 상태로는, 3℃의 기온 상승을 허용하는 세계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기온 상승은, 이번 팬데믹 이상의 파괴적 영향을 초래하게 된다. 그 때문에 이번 팬데믹을 계기로 삼아, 더욱 지속 가능한 사회로 전환해야만 한다. ‘build back better’, 이른바 ‘green recovery’를 목표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C40 Cities-Climate Leadership Group

C40 기후 리더십 그룹은 세계 대도시들이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구성한 협의체로써 지구 면적의 2%에 불과한 도시들이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를 80% 이상 배출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 이에 구체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2005년 Ken Livingstone 前 런던시장의 제안으로 영국의 런던에서 출범했다. 서울은 2006년 7월에 가입, 활동하고 있다.

명칭 : C40기후리더십그룹(C40 Cities-Climate Leadership Group)
위치 : 영국, 런던
설립 : 2005년. Ken Livingstone 前 런던시장 주도하에 C20 그룹 설립, 2007년 C40로 확대
목적 : 기후 변화 대응을 약속한 대도시들의 모임

C40의 코로나 대책 task force의 좌장을 맡은 인물은, Giuseppe Sala[1958년생] 밀라노 시장인데, 밀라노는 이번의 팬데믹을 계기로, 시의 35㎞나 되는 도로에 대해, 자동차의 진입·과속 제한을 도입하고, 보행자와 자전거를 위해 도로를 개방했다. 이것은 길거리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촉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동차 의존 생활 그 자체를 재검토하는 것을 목표로 한 ‘green recovery’의 일환이나 다름없다.

사실은, 자동차 주행 제한은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실시되고 있었다. 바르셀로나시의 Ada Colau[1974년생] 시장이, 올해 1월부터 연비가 나쁜 차가 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처음에는 재계와 시민으로부터 반대 의견도 강했다고 하는데, 실시하고 보니, 자동차가 줄어, 공기가 개선됨으로써, 긍정적인 견해가 확대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코로나 재난 상황에서 여행자 격감을 경제적 손실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과잉 관광overtourism, 집세 상승, 대기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지역 주민의 생활을 위한 재정 지원을 해야 한다고 Ada Colau 시장은 호소한다.

여기에는 목표로 삼아야 할 사회에 대한 비전의 전환이 있다. C40에 따르면, 팬데믹 후의 세계에서는, 주민의, 특히 사회적 약자와 필수 근로자의 안전과 건강이야말로 중시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공공서비스, 공적 투자, 커뮤니티의 회복력resilience 강화가, 가장 효과적인 회복의 기초가 된다”라는 것이다.

일본의 좌파·리버럴의 ‘반긴축론’이 소비세 삭감 같은 정책안案에 얽매어버린 현상과 비교하면, 바르셀로나와 밀라노의 구상과 다름은 뚜렷할 것이다. 확실히 ‘소비세 제로’는 대담한 정책안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생활 부담을 가볍게 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 쪽의 정책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정상 작동’의 생활로 돌려준다, ‘경제를 돌린다’라는 소비세 감세의 목적은, 바로 코로나 이전의 ‘파멸의 길’로 되돌아가는 것에 공헌하고 만다. 사실은 그런 한에서, 자민당의 ‘Go To Travel campaign’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반긴축파가 안고 있는, 계급 중심주의, 경제 결정론이라는 문제가 뻔히 보인다. 반긴축파에 따르면, 어떤 문제 해결에 임하더라도, 우선은 경제 성장을 지향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의 경제 문제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반긴축의 언설에서는, 인종, 자연환경, 젠더, 인권과 같은 문제가 경시되게 된다. 만약 경제 외의 문제가 이야기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제 성장 수단으로만 이야기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도지사 선거에서도 복수의 후보자가 언급하게 된 ‘Green New Deal’도 경제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왜소화되어 버리는 위험성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이 위험성을 ‘경제’, ‘환경’, ‘민주주의’라는 ‘환경 위기의 삼중고trilemma’ 구도를 사용해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세 가지 가운데 두 가지까지를 선택할 수 있지만, 세 가지 모두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삼중고’이다. 예를 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선진국에서 보여졌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짝은, 환경을 희생으로 삼아 발전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이상 환경을 희생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짝 그 자체조차도 위태롭게 만들지도 모른다. 요컨대 이 삼중고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곳에 우리는 와 있다.

위기를 앞에 둔 주류파의 답은 무엇일까? 삼중고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기술 혁신으로, ‘경제’와 ‘환경’과 ‘민주주의’라는 모든 것이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녹색 경제 성장’이 천연덕스럽게 읊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언설이 좌파·리버럴 사이에서도, 미래의 자본주의의 가능성으로, 호의적으로 논해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녹색 경제 성장’의 발상은, 반긴축 Green New Deal과도 상성이 좋다.

하지만, ‘녹색 경제 성장’ 노선은, ‘환경 위기의 삼중고’를 무시하는 한에서, 충분한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제 성장과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분리decoupling를, 1.5℃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충분한 속도로 달성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으로 경제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극적인 효율화를 진행하지 않으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딜레마도 있다.

더욱이 생산이라는 물질적 과정의 효율화에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 성장이 석유와 석탄과 같은 화석 연료의 대량 소비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던 사실을 생각하면, 장기 정체에서 선진국의 경제를 구하면서, 2050년까지 탈탄소화를 실현하는 것이, 탁상공론인 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녹색 경제 성장’론의 문제점은, ‘정상 작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파괴적이라면서, 전기 자동차와 재생 가능 에너지 같은 기술만으로, ‘환경 위기의 삼중고’를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그러면, 생활 내용은 ‘정상 작동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큰 차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달콤한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잘 안 풀린다.

■ 좌파 포퓰리즘이란 뭘까?

다만, 이하에서 논하고 싶은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일본형 ‘반긴축’ 논의에서 사라진 것은, 리먼 쇼크 이후, 세계에서 대두되고 있는 ‘좌파 포퓰리즘’이 지닌 진정한 정치적 가능성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좌파 포퓰리즘’이란, 그리스의 SYRIZA[급진좌파연합. 시리자는 그리스의 정당이며, 반자본주의, 사회주의, 세속주의를 표방한다. 2004년 그리스의 좌파, 급진좌파 정당의 연합체로 시작했으며, 2015년 1월 총선에서 승리해 집권당이 됐다], 스페인의 Podemos[포데모스는 2014년 1월 16일에 창당된 스페인의 극좌 정당이다. 이 정당은 스페인 내의 차별과 억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인 15-M 운동의 여파로, 스페인의 정치 과학자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 창당했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와 영국의 제러미 코빈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일본에서 소개되는 방식의 특징이, 그들의 포퓰리스트 정책 가운데 ‘반긴축’이라는 측면, 일면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 결과, “경제를 얘기해 오지 않았던 좌파”라는 허수아비 때리기[상대방의 이야기를 곡해하여, 그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허수아비’를 정해 놓고 그것을 공격하는 오류]가, 이번에는 거꾸로 좌파·리버럴은 경제 문제만을 우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으면 되는 듯한 언설로 이동해 간다. 하지만 그런 단순화의 대가로, 유럽과 미국의 새로운 사회 운동이 지닌 잠재력이 사라져 버린다.

애당초 요 몇 해, 유럽과 미국의 좌파에 의해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경제라는 영역을 특권으로 여기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Radical Democracy’론이 제기한 개념이다. 결국 ‘좌파 포퓰리즘’이란, 원래 경제 이외의 요소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적 프로젝트인 것이다.

예를 들면, 포데모스의 정책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정치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1943생. 벨기에 출신 정치학자]는, ‘좌파 포퓰리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방을 요구하는 다양한 투쟁이, 다양한 사회적 행위자와 그 투쟁의 복수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사회적 대립이라는 영역은, 노동자 계급 같은 ‘특권적인 행위자’에 집중되어 있던 것에서, 확장되게 되었다. …좌파 정치에 필요한 것은, 어떤 투쟁도 선험적a priori으로 중심화하지 않고, 다양한 종속 형태에 맞서는 여러 투쟁을 접합하는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은, 다양한 투쟁의 ‘복수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말소함이 없이 접합해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좌파 포퓰리즘’은 ‘반긴축 포퓰리즘’보다 범주가 넓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빈번하게 ‘좌파 포퓰리즘’이 ‘반긴축 포퓰리즘’으로 왜소화되고, 모든 것은 경제 문제로 환원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러면 좌파 포퓰리즘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 世代論으로서의 좌파 포퓰리즘

좌파 포퓰리즘의 대두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유익한 것은, ‘세대’ 문제이다. 왜냐하면, 좌파 포퓰리즘을 주로 떠받치는 존재는, 젊은이들이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 분석에서는, 종종 도시화와 지방의 대립이나 계급적 대립이 지적되었다. 말하자면, 리버럴하고 다문화주의적인 도시 쪽의 부유층과 산업이 쇠퇴한 지방에서 경제적 곤궁에 허덕이는 대중이라는 대립이다.

그러나 점점 중요하게 되어 오는 요소가 ‘세대’라고 지적하는 인물이, 레스터Leicester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케어 밀번Keir Milburn이다. 한 예로, 2019년 영국 총선거에서 나이별 투표 행동을 분석한 다음의 그래프를 보시기 바란다.

1 : 2019년 영국 총선거에서 나이별 투표 행위      2 : 보수당과 노동당이 바뀌는 점 = 39살
3 : 10살을 먹을 때마다 보수당에 투표할 확률은 9%씩 상승
4 : 10살을 먹을 때마다 노동당에 투표할 확률은 8%씩 하락

젊은 세대일수록 코빈의 노동당에 투표할 확률이 높고, 나이가 들수록, 보수당에 투표할 확률이 상승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영국만이 아니다. 젊은이의 좌경화가 특히 현저한 곳이 미국이다. 당시 20대로, 하마평을 뒤엎고, 뉴욕주에서 민주당 의원으로 선출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 코르테즈Alexandria Ocasio-Cortez는 유명하지만, 그녀는 원래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DSA)’라는 정치 단체의 회원이었다. 현재 DSA는 많은 젊은 신입 회원을 얻고 있으며, 2016년 6월에는 6,500명이었던 회원이, 2018년 9월에는 50,000명이나 되었고, 그들의 평균 연령도 2013년 68살에서 2017년에는 33살까지 낮아져 있다고 한다.

‘민주사회주의’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젊은 세대는 자본주의를 의문시하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보다도, 사회주의를 바란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쪽이 많다는 자료도 있다. 그 때문에 ‘밀레니엄 세대’(1981~1996년에 태어난 세대)와 ‘Z세대’(1990년대 이후부터 2000년 이후 출생)는, ‘Generation Left’(좌익 세대)라고 불릴 정도다. 반자본주의의 움직임은, 소련 붕괴 후에 장기에 걸쳐 크게 정체되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소련을 모르는 젊은 세대가 일어나 새로운 사회 운동과 정치 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 하나를 가지고도, 유럽과 미국의 ‘좌파 포퓰리즘’과 일본의 ‘반긴축 포퓰리즘’을 둘러싸고, 중요한 차이가 두드러진다. 먼저 일본의 반긴축파는, 사회주의를 전혀 지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위기를 앞에 두고, 사회주의 같은 ‘공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경제 성장의 최대화를 목표로 한다.

나아가 일본의 반긴축파는, 밀레니엄 세대보다도 한 단계 이상 윗세대, ‘취직 빙하기 세대’에 가깝다. ‘Generation Left’가 아니다. 이 세대는, ‘소련 붕괴’와 ‘버블 붕괴’라는 이중 경험을 젊은 시절에 하고 있고, 그 후의 ‘신자유주의’의 최전성기를 살아온 세대이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회주의’ = 소련이며, ‘경제’라고 하면, 버블 붕괴 이전 시대의 기억이 강하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대체안은 없다(TINA)고 각인한 채 살아왔다. 그 결과가 반긴축파의 반사회주의·경제 성장 노선이다.

이것에 비해, 해외에서 ‘좌파 포퓰리즘’의 사회주의 노선을 떠받치는 ‘Generation Left’는, 더욱 아래 세대이다. 그들의 정치적 의식 형성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2008년 리먼 쇼크이다. 금융자본주의의 폭주가 일으킨 버블 붕괴는, 일본에서도 파견촌[파견이나 고용 해지 등으로 직업과 주거를 상실한 실업자를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된 숙소]이라는 형태로 비정규 노동자 문제를 가시화시켰듯이, 전 세계에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젊은 세대에게 안정된 생활을 보증해 주는 정규 직원의 고용은 계속 사라졌다. 더욱이 등록금 인상으로, 그들의 대다수가 많은 액수의 학자금 대출을 안고 있다. 게다가 경제는 장기 침체 중. 부모 세대보다도 풍요로워진다는 가망이 없다는 냉엄한 현실에, 그들은 직면해 있다. 실제 밀레니엄 세대는, 최근 수백 년 동안 처음으로 앞 세대보다도 생애 수입이 낮아지는 세대라고 얘기된다.

한편, 그들의 부모 세대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금융자본주의하에서 자산 형성을 이루어 왔다. 연금과 부동산 소유 등, 그들은 자신의 자산을 적극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주가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주의와 이해를 공유한다.

그러나 아무리 주가가 호조를 보인다고 해도, 실물 경제의 정체를 젊은이들은 체감하고 있다. 그 때문에 애당초 운용하기 위한 자산을 갖지 않은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만든 시스템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고 있다. 요컨대,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에서는, ‘실물 경제’와 ‘금융 시장’이라는 전혀 다른 경제를 보면서 사는 것이며, 그 다름이 ‘세대 분열’을 낳고 있는 계급적 조건이다, 라고 케어 밀번은 주장하는 것이다.

■ Generation Left와 ‘사건’

그러나 왜 밀레니엄 세대와 Z세대는 ‘보수화’가 아니라, ‘좌경화’한 것일까? 밀번에 따르면, 각 세대가 ‘사건’을 어떻게 경험하는가가, 그 분기점이 된다.

‘사건’이란, 요약하면, 갑자기 기습적으로 다가오는 세계를 뒤흔드는 역사적 대사건이다. ‘사건’이 초래하는 쇼크는 기존의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다양한 사회 집단은, 자신의 경험과 공통 감각을 단서로, 그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를 규정함으로써, 질서를 어떻게든 회복하려 한다. 다만, 이제까지의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세대는, 쇼크를 앞에 두고, 새로운 질서를 지향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좌경화의 잠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Generation Left’의 좌경화에는, 두 가지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첫 번째는 2008년의 리먼 쇼크다. 금융 위기로 많은 사람은 직장을 잃고, 신자유주의로 삭감된 사회 보장 제도하에서, 고생스러운 생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습적으로 엄청난 쇼크를 주는 ‘수동적 사건’으로 경험했다.

그런데 이 ‘경제적’ 사건은, 또 하나의 다른 ‘정치적’ 사건으로 보완되었다. 그것이 2011년 월가 점거 운동과 스페인의 15M 운동으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항의 활동이다.

확실히 2011년의 운동은, 사회에, 직접적인 변화를 초래한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이 사건을 능동적·적극적인 것으로 경험했다. 자신들의 행동으로 신자유주의는 불가피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그러니까 점거 활동을 통해, 집단적 주체가 형성됨으로써, 자신들로 세계를 만들어 낼 힘을 확신하는 듯한 ‘능동적 사건’으로, 두 번째 사건은 경험된 것이다. 그 경험이 2014년 이후의 선거에서 좌파의 약진으로 연결되어 갔다고, 밀번은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2011년은 ‘성공’이었다고조차 할 수 있다.

물론 사건이 ‘수동적 사건’인 채로 끝나고 만 것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안 되는 현실을 앞에 두고,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보수화되어 간다. 버블 붕괴와 소련 붕괴라는 경제적 사전과 정치적 사건을, 신자유주의의 승리라는 형태로 경험한 세대에 대해서는, 그런 사태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사건이라는 분기점을 앞에 두고, 젊은 세대가 좌경화될까, 보수화될까는, 그들이 어떠한 사회적·정치적 가능성을 참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가와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회 정치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왜 의회 정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라고 하면, 의회 정치에서는, 현실의 다양한 제도적 제약에 끊임없이 직면함으로써, 타협을 도모하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타협적 태도 때문에 정치적 상상력은 좁아지고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서 정책 입안과 제도 변경을 목표로 하는 의회 정치에만 매달리는 ‘정치주의’는 위기를 돌파할 큰 비전을 낼 수 없어, 서둘러 미비한 결말을 내 버린다.

■ 신세대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위해

물론 의회 정치가 그런 제약을 안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사회 운동 같은 의회 밖 행동으로, 보완되며, 그 사회적·정치적 가능성이 주어진 것을 돌파할 것 같은 ‘잉여 순간moment of excess’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 2011년의 의회 밖 항의 활동 같은.

의회 밖 활동은 지금 바로 코로나 쇼크라는 새로운 ‘사건’을 세계가 경험하기 때문에 더욱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되었다. 팬데믹이 끌어낸 실물 경제의 하락으로, 사람들은 갑자기 일을 잃고, 또한 필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감염 리스크에 노출되면서, 나날의 일을 처리한다. 한편 금융 시장은 일시적인 혼란이 있었지만, 주가는 쇼크 이전 이상의 호가 수준이 되어 있다. 여기에는 전에 없을 정도의 실물 경제와 금융 시장의 괴리가 존재한다.

이번 사건의 경험이, 세대, 계급과 지역마다 어떤 다름을 낳고, 좌경화해 갈 것인가, 보수화해 갈 것인가, 현재 시점에서 단정할 수는 없다. 미래는 열린 상태에 있다. 그 때문에 코로나 쇼크라는 ‘수동적 사건’을 앞에 놓고, 사회적·정치적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하면, 오늘의 젊은 세대도 나이가 들어감과 함께 보수화해 갈 것이리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를 향한 큰 비전을 그리는 것이 꼭 필요하다.

다행히 희망은 존재한다. 지금 밀레니엄 세대보다도 젊은 Z세대가 팬데믹 쇼크를 극복해 가며, 한층 더 좌경화하면서 대두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Sunrise Movement[기후 변화에 대한 정치적 행동을 옹호하는 501 정치 행동 조직인 Sunrise가 조정한 미국 청소년 주도 정치 운동], School strike, Black Lives Matter, #MeToo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이 나오고 있어, 집단적 주체가 형성되게 되어 있다. 특히 이 Z세대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의 하나가 기후 변동 문제이다.

첫머리에서도 말했듯이, 베이비 붐 세대의 고도 경제 성장과 글로벌 자본주의의 ‘시간 끌기’는, 자연환경을 희생함으로써 성취되어왔다. ‘환경 위기 삼중고’에서 늘 희생된 것은, ‘환경’이었다. 그 때문에 Z세대가 직면한 것은, 실물 경제의 정체만이 아니다. 산불, 열파, 한발, 홍수, 슈퍼 태풍…. 100년에 한 번이라고 얘기되는 이상 기온이 매년처럼 계속되는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인류의 경제 활동이 지구 전체를 뒤덮어 버린 ‘인류세 시대[인류의 활동이 전 지구 규모로 영향을 미치게 된 시대]’의 ‘사건’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는 그레타 툰베리를 중심으로 코로나 후의 세계를 위해,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공동 집필한, 기후 위기에 대한 공개 서간에서 인용하고 한다.

우리는 존망이 걸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의 해결책은, 사거나, 건설하거나, 투자하거나 하는 것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기후 변동 대책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기후 위기를 필연코 촉진하고 말 경제 시스템을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어처구니없다. 우리의 현재 시스템은 ‘고장이 나 있는’ 게 아니다. 현재 시스템은 마땅히 그것이 해야 할 것, 자신에게 부과된 것을 실행하는 데 불과하다. 그래서 이미 ‘수리’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는 정상으로 기능한다. 바야흐로 그 결과로서, 환경 파괴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이만큼 명확한, Generation Left에 의한 반자본주의 선언이 있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앞에서 말한 ‘경제’·‘환경’·‘민주주의’라는 삼중고에 대한 명확한 답이 있다. 민주주의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자본주의를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구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무한 경제 성장에서 결별하고, 돌봄 노동 등 핵심 노동을 중시하는 탈성장형 사회로의 대전환이다. 물론 그런 상식 파괴적인 대안을 정치가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회 밖의 힘을 사용해, 샌더스와 코빈조차도 뛰어들지 못했던 영역으로 도약해야 한다.

앞으로 기술 혁신과 시장 메커니즘으로 기후 변동은 대처할 수 있다고 하는, 이제까지 지배적이었던 앞 세대의 ‘낙관적’ 사고는, 가혹한 현실을 앞에 두고 한층 더 타당성을 잃어 갈 것이다. 한편 그레타 툰베리들의 세대 불안과 공포는 현실이 될 것이다(아니, 캘리포니아의 산불을 보면,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알고 있기에, 환경 위기 시대의 ‘새로운 시스템’을 좌파·리버럴은 지금 곧바로 구축해야 한다.

 Generation Left는 하나의 경향성이기는 하지만, 일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동적으로 신세대의 운동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에 관한 한에서 Generation Left는 오히려 한 덩어리가 되어 그 실현을 목표로 해야 하는 하나의 ‘정치적 프로젝트’인 것이다.

그런데 예전부터 내려오는 좌파·리버럴은,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에 응할 수 없다. 목소리에 응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기본적 틀이 무효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응의 지체가 계속되면, 사회적·정치적 가능성은 좁아져 가고, 실망과 공포가 사회의 보수화를 초래하고, 분단과 배외주의를 점점 강화하고 말 것이다.

물론, 젊은이에게 기대를 위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욱이 일본에는 Lost Generation 세대[잃어버린 세대는,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및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키는 명칭] 특유의 문제도 있다. 공동 투쟁을 위해서는 세대 간의 갭을 극복해 갈 필요가 있으리라. 그것을 위해서는 환경을 희생으로 삼은 경제 성장, 국채 발행에 의한 재정 적자 증대와 같은 세대 간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해결책이 아니라, ‘common’의 확장과 basic 서비스,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 같은, 만인이 혜택을 누리는 보편적 비전을 추구해야 한다.

새로운 비전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다양한 사회 운동을 고조시키는 것이, 인류세의 환경 위기를 ‘능동적 사건’으로 전환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世界』, 202011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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