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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5일 수요일

지금, '살아있는 권력'이란 누구인가?


[기고] '살아있는 권력'의 의미
2019.09.26 08:20:32


헌정 사상 유례없는 현직 장관의 가택압색을 보면서 이른바 '조국' 논쟁의 극단적인 권력투쟁의 정점이 형성되는 상황에 대한 우려와 걱정을 감출 수가 없다. 이 상황을 보도하는 언론과 그러한 언론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일반적인 입장은 세 가지 정도로 좁혀진다. 

첫째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검찰의 엄정한 법집행의 의지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입장이다. 검찰 법집행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사들과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의 여론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둘째는 '살아있는 권력'의 상징인 조국 장관을 지지하면서, 가택압색을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하고 조속하고 변함없는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검찰의 수사방향과 과정을 비판하는 일부 기사들과 SNS 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찰 비난의 다양한 의견과 여론이 이러한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셋째는 조국 장관이 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고 결국 사퇴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가택압색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유한국당이 조국 장관의 직무정지가처분 소송을 헌재에 제출한 것은 이러한 입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가택압색을 두고 수많은 지식인들과 언론 및 시민들이 제각기 다양한 입장과 주장을 담은 글과 기사들을 쏟아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정국을 보면서 드는 의문 한 가지는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이다. 거의 모든 기사들과 대부분의 글에서 지칭하는 ‘살아있는 권력’은 현재의 집권 세력인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을 지칭하는 공통점이 있다. 필자가 드는 의문은 바로 이 점이다. 과연 ‘살아있는 권력’이 문재인 정부와 집권 여당일까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굳이 정치권력의 속성을 이야기했던 수많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의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권력은 획득하고 실행하는 순간 권력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절대적인 힘이다. 더군다나 그 권력이 '살아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그 권력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닥칠 수 있는 재앙이자 공포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직 대통령이나 집권여당을 ‘살아있는 권력’으로 지칭할 수 있을까? 아마 이렇게 부르는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지난날 독재자와 같은 대통령들이 통치했던 시대의 정치권력 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구시대 사고를 가진 이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 윤석열 검찰총장. ⓒ프레시안(최형락)

지금의 문재인 정부는 '촛불 시위'를 통해 탄생한 국민의 정부이다. 집권 2년차를 지나고 있지만 3년 후에는 국민들이 선택할 다른 대통령에 의해 정부가 바뀌는 기한이 정해진 위임 권력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은 유권자인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모든 공직과 직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속성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권력'은 현재 위임된 권력으로 정부를 구성하여 통치하고 운영하는 현 정부가 아닌 언제나 그러한 정부 구성의 기회를 부여할 국민인 것이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살아있는 권력인 국민은 현재의 조국 장관 사태를 그저 바라보고 판단하며 예상하는 수준의 사고와 행동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다. ‘살아있는 권력’인 국민을 대신하여 행정부 조직의 일부인 검찰이라는 사정기관이 이 모든 상황을 좌우하는 권력집단으로 행동하고 있다.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살아있는 권력'이 검찰이라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무엇이 검찰을 '살아있는 권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이렇게 비정상적인 '살아있는 권력'이 검찰이라는 조직으로 집중된 것일까? (이 글은 필자가 조국 장관과 가족을 옹호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원인은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제대로, 아니 전혀 쓸 생각이 없는 국회의원들(입법부)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판단된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검찰은 행정부의 일원으로 사정을 담당하고 있는 행정기관일 뿐이다. 행정부 조직의 역할이나 권한은 입법사항으로 제도적인 측면에서 규정하고 명시할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사태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치적 판단과 해석이 필요한 사건들의 최종 판단을 검찰에게 맡기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국회의원들이다. 검찰이 본연의 정치적 중립과 범죄 혐의를 소명하고 수사하는 역할에 집중하고 지나친 권력 남용이 되지 않도록 금지하는 법률과 제도를 만들 수 있는 국회의원들이 이를 방기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입법과정과 활동으로 권력 기관의 역할과 권한을 정해주어야 할 국회의원들(특히 야당 의원들)이 현재의 집권 세력의 도덕성과 위법성을 빨리 판단해달라고 검찰에게 애걸복걸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집권 여당 의원들 역시 이번 사건을 다가올 총선의 유불리나 이해득실 수준에서 판단하고 대처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권력’으로서 검찰의 위상은 견고해지고 있다.  

두 번째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언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물론 모든 언론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만, 신문이나 인터넷, 혹은 방송에서 표출되는 기사나 보도 등은 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분석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심각한 우려를 하게 된다. ‘조국 대 윤석열’ 혹은 ‘개혁 대 저항’이라는 프레임은 언론에서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는 구도이다. 그러나 작금의 사태를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구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한국 사회의 모든 구조적 결함과 모순이 작동되어 진행되고 있는 이번 사태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판단이 든다.  

실제 이번 사태의 출발에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임명으로부터 촉발되었다. 이후 전(前) 민정수석이었던 조국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되면서 임명을 둘러싼 과정에서 한국사회 기득권과 지배계급의 구조적 모순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사건이었다. 입시제도의 문제, 수저론의 확인, 기득권의 재산유지 방식, 불평등과 불공정의 문제, 비정상적이고 부패한 사회의 모순, 상위 1%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 등이 복합적으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저급하고 모순에 가득 찬 일면이었다. 따라서 언론 본연의 역할이 발휘되었다면 이번 기회는 우리 사회 모순과 불공정의 문제를 짚어보고 진지하게 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와 해법을 담아야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모습 대신에 한 가족의 모든 삶의 모습이 전국민에게 드러나도록 일조했고, 범죄 혐의의 확정 여부나 사법 처리와는 별개로 한 가정이 파괴될 수 있는 가능성(그 가능성은 주변의 혹은 조국 사태를 즐기던 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마찬가지의 가능성)을 부여했다.  

이외에도 국민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수많은 여론 조사 결과들이나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시민들 역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 사태에 대한 의견을 표명했다. 결국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조국 장관과 그 가족들의 최종적인 위법성과 잘잘못의 유무는 검찰과 사법부의 몫이 되고 말았다. '살아있는 권력'인 국민이 위임해준 권력을 일정 기간 동안 제대로 활용하여 국민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달라는 여망을 저버리고 단순한 행정부의 사정기관인 검찰에 무소불위의 '살아있는 권력'을 부여하고 휘두르게 한 이들은 이번 사태의 최종 결과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살아있는 권력'이 되어 현 집권 세력의 상징이 되어버린 조국 장관을 향하는 검찰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는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비이성적인 편가름과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의 추론이나 추측으로 검찰의 정당성을 인정해버리는 우를 더 이상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영화 <더 킹> 속의 검찰을 꿈꾸고 있는 이들이 다수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매번 반복되는 '검찰개혁'이라는 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는 현실의 정상적인 검찰로 거듭나게 할 수 있는 '살아있는 권력'의 국민을 기대해 본다.

kakir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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