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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5일 토요일

[만물상] 부부의 반말

[만물상] 부부의 반말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1.12.24 03:18 외국에서 유학하다 만나 결혼한 어느 부부는 서로 존중하자는 의미로 평소 존댓말을 쓴다. 그런데 부부싸움만은 영어로 한다. 존댓말로 다투자니 아무래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반말로 싸우자니 자칫 험한 말을 주고받을 위험이 있어서 영어를 쓴다고 했다. 반면 아내가 평소 안 하던 존댓말을 쓰면 긴장된다는 남자도 있다. 반말할 때는 다정하고 친밀하던 아내가 갑자기 정색하고 높임말을 쓰며 다가오면 십중팔구 싸움 거는 신호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가 부부는 서로 존대했다. 그러나 평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법·겸양법·공손법 등 세 가지 방식의 극존칭 경어로 대했다. 반면 남편은 ‘이러하오’ ‘저러하오’ 등 예사높임말을 썼다. 평민들처럼 아내에게 반말하지는 않았지만, 존중해서라기보다는 체통을 지키자는 취지였다. 소수서원을 세운 조선 중기 문인 주세붕의 시조 ‘지아비 밭 갈러 간 데 밥고리 이고 가/ 반상을 들오되 눈썹에 맞초이다(...)’는 부부간 언어조차 불평등했던 시대의 단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국어에서 존댓말은 주로 연장자나 낯선 이에게 쓴다. 불어에선 그 쓰임이 우리와 사뭇 다르다. 불어의 ‘tu’는 ‘너’, ‘vous’는 존칭인 ‘당신’으로 해석되는데, 엄밀히 말해 ‘tu’는 반말이라기보다 관계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손자가 할머니를 부를 때 ‘tu’라 하는 것은 불손해서가 아니라 친해서이다. 프랑스 직장에서 상사가 부하에게 “나를 tu라 부르라”고 한다면 맞먹어도 된다는 게 아니라 서로 익숙해진 사이라는 의미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엊그제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실세는 김건희씨로 알려져 있다. 김씨가 사석에서도 윤석열 후보에게 반말을 한다”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대통령 부인이 권력을 휘둘러선 안 된다는 송 대표의 발언 취지는 타당하다. 하지만 김건희 실세론의 근거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반말’이라고 한 데서 많은 이가 고개를 저었다. 한 시사평론가는 “요즘 반말 안 하는 부부도 있느냐”며 “어설프게 프레임 작전을 짰다”고 비판했다. ▶존댓말을 한다면 아내만 남편에게 존대하기보다 부부가 함께 쓰는 게 타당하다. 근래에 부부 사이 반말이 보편화하고 있다. 부부간 친밀함을 강조하는 세태이기도 하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며 부부 관계가 평등해진 시대 변화도 반영됐을 것이다. 존댓말이든 반말이든 그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고 부부가 선택할 문제다. 물론 부부는 서로 존중하면서 평등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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