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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25일 화요일

배우지도 않고 치르는 시험 수능 왜 강행하나?

 

김용택 | 2020-08-26 09:58:29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진퇴양난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교육부가 발표한 수능이 100일 앞으로 다가 왔다. 정부가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로 격상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수능 예정대로… ’ 방침은 요지부동이다. 새 학기와 함께 찾아 온 반갑지 않은 손님 코로나 19가 학교의 문을 닫게 하고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 사실상 공부 같은 공부를 하지 못한 채 수능일을 100일 남겨놓고 교육부는 ‘강행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청소년 50여만 명을 한 줄로 세우는 거국적인 행사, 수학능력고사. 솔직히 말해 대한민국에서 수능이란 시합 전에 승부가 결정 난 게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명분 쌓기 과정’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거국적인 이 연례행사는 ‘어느 대학 출신’으로 차별을 정당화시키는 행사다. 헌법에는 평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법 앞에..’에서 만일 뿐, 현실에서의 평등은 수능이 만든 운명론 앞에 무력화되고 만다.

‘강행’ 외에 다른 방법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강변한다면 누가 감히 한 세기 가까운 운명론을 명분화시킨 이 행사에 반기를 들 것인가? 자연재해를 어떻게 예상하고 대비해 그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승복케 만들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버스는 지나갔고 지나간 버스에 손을 들어 본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코로나 19라는 자연의 섭리는 파괴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사람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그 고통을 몽땅 고 3학생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고 있다.

대비하지 못한 결과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의 몫이라는 질서에 누가 반기를 들 것인가? 하지만, 코로나 19가 밝힌 수능의 실체는 그것이 공정하지 못한 게임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만 것이다. 1학기는 개학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면서 온라인 수업이라는 기상천외한 공부를 했지만, 온라인수업이라는 게 교육인지 시험에 대비한 명분 쌓기인지는 모호하다. 저항능력이 없으니 불공정을 정당화시키는 과정에 순종하는 길 뿐이라고 체념하면 끝인가. 코로나 19로 운명이 달리 고 3학생들의 등교와 3단계 거리두기 격상을 놓고 고민하는 상황에서도 ‘고 3만은 예외’라는 원칙은 요지부동이었다.

1학기 내내 온라인수업과 등교수업의 반복으로 공부 같은 공부를 하지 못한 채 코로나 19의 눈치만 보다 보내고 2학기 수업은 자습으로 시간을 보내다 이제 100일을 남겨 놓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교육당국은 “고교 3학년 학생들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는 궁여지책만 반복하는 것을 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배우지도 않고 치르는 시험을 정당화한 ‘억지수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교육’이 ‘줄 세우기’라는 공식이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에는 정당성을 부여받았지만 자연재해 앞에 대안 찾기에 한계에 직면하고만 것이다.

자연재해(사실은 인재이지만...)는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손을 들어 준다. 거의 1년을 방황으로 보낸 대부분의 수능준비생들과는 달리 경제력이 있는 집안의 자녀들은 손 놓고 있는 서민의 가정 학생과는 달리 착실하게 준비해 왔다. 어차피 프로가수와 씨름선수가 겨루는 ‘샅바 없는 게임’같은 ‘미스터 트롯’이 되고 만 수능이다. 진퇴양난의 선견지명이 있어서일까 일찍이 박정희는 제 5차개헌에서 헌법 10조에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은근슬쩍 삽입해 넣었다.

시합 전에 승부가 결정 난 게임, 대한민국의 수능은 정당하다, 그것은 헌법 제11조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고 31조 제1항에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해놓았는가 하면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34조에는 대학의 ‘공정한 경쟁에 의한 선발’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앞에 평등’이니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는 공정하지 못한 게임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현령비현령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헌법 제 31조의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인지, ‘부모의 경제력’인지를 ‘실질적 평등’을 무시한 두루뭉술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러야 하는 수능과 같은 시험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혜안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앞을 내다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후보시절 누구나 하나같이 ‘교육대통령’이었다가 취임을 하고 나면 ‘나 몰라라’다. 어차피 결자해지다.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수많은 교육 사회시민단체들이 내놓았던 일류대학문제 하나만 해결했더라면 이런 곤욕을 치르지 않을 것이 아닌가? 문재인대통령이 복이 많아서(?)일까? 들통난 수능의 부정당성을 혼자서 독박을 쓰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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