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20일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회원들이 인천 남구 인천지검 정문 앞에서 끈에 묶인 굴비를 든 채 “검찰은 안상수 인천시장을 구속수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왼쪽). 1992년 14대 대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씨가 1993년 4월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법원에서 ‘부산 기관장 모임 사건’(초원복국집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첫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4년 10월20일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회원들이 인천 남구 인천지검 정문 앞에서 끈에 묶인 굴비를 든 채 “검찰은 안상수 인천시장을 구속수사하라”고 요구하고 있다(왼쪽). 1992년 14대 대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씨가 1993년 4월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법원에서 ‘부산 기관장 모임 사건’(초원복국집 사건)과 관련해 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첫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방통제·공안통치 목적으로 만들어
‘초원복집 사건’, ‘굴비상자 사건’ 등 잡음
박남춘 인천시장 탈퇴…해체 논의 가속화
정례회의 불참 이재명 지사도 탈퇴 주목
박정희 군사정권이 지방통제와 공안통치를 위해 전국에 조직한 비공식·비공개 모임인 ‘(권력) 기관장 모임’이 이름만 바꿔 수십년째 운영되고 있다. 민주화 이후엔 기업 대표들까지 대거 합류하면서 선거 운동이나 로비의 창구로 이용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인천시를 필두로 ‘부패의 온상’으로 꼽히는 이 모임을 해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 인천시, ‘군부 잔재’ 기관장 모임 탈퇴 선언 박남춘 인천시장은 지난달 29일 자신이 당연직 회장인 ‘인화회’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박 시장은 “인화회가 시민의 자리에서, 시민을 대변하는 모임이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는 마음으로 회장직 사퇴와 모임 탈퇴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박 시장과 함께 당연직 운영위원장인 허종식 정무경제부시장도 탈퇴했다. 박 시장이 탈퇴 의사를 전달한 뒤 열린 첫 인화회 월례회의엔 다수의 기관장들이 불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화회는 다른 지방기관장들까지 모두 탈퇴하면 민간 중심의 사교 모임으로 바꾸는 것을 검토 중이다.
인화회는 1966년께 박정희 정부 시절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지방의 기관들을 통제하려고 만든 ‘(인천지역)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시작돼 50년 넘게 활동해왔다. 처음엔 시장과 군수, 구청장, 지방법원장, 지방검찰청장, 지방경찰청장 등 공공기관장들로 이뤄져 있었으나, 민주화 이후 기업·언론사 대표, 병원장 등으로 확대돼 현재는 회원이 180여명에 이른다. 매달 1번씩 모임을 열어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취임 뒤 열린 경기도 기관장 모임인 ‘기우회’에 2차례 모두 ‘일정상 이유’로 불참했다. 특히 8월엔 당연직 운영위원장인 이화영 평화부지사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 지사는 법률이나 조례에 의한 공식 기구가 아닌데도 경기도가 주관하는 방식으로 이 모임을 운영하는 것에 부정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지사는 도민 의견 수렴과 자체 검토를 거쳐 기우회 탈퇴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지사는 지난 6·13 지방선거 전후로 배우 김부선씨와의 스캔들 의혹, 폭력조직과의 관계 의혹 등이 불거져 여러 건의 고소·고발 사건에 얽혀 있다. 따라서 이 지사가 기우회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 중엔 지방경찰청장, 지방검찰청장 등 수사기관장들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려는 뜻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 ‘인맥 연결고리’ 통한 유착 잡음 끊이지 않아 3일 <한겨레>가 확인한 결과, 전국 17개 광역지방정부 가운데 서울, 광주, 전남, 제주를 제외한 13곳에서 인화회, 기우회와 같은 지방기관장과 지역 유지들의 모임이 여전히 존재했다. 모임 이름과 운영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지역 주요 인사들의 사교와 의견·정보 교환 등 모임 내용은 별 차이가 없었다.
대전·충남·세종 기관장 모임인 ‘일수회’는 지역 언론사들의 요구로 비교적 최근에 새로 만들어졌다. 애초엔 이 지역에도 기관장 모임이 따로 있었으나, 민주화 이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언론매체 대표들이 지역 기관장들에게 모임 구성과 활동을 요구해 기관장, 기업인, 언론인 모임으로 부활시켰다. 인천의 한 기업인은 “인화회의 경우 500만원이나 하는 가입비를 내고서라도 회원이 되려는 기업인들이 줄을 섰다. 회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지역 권력층이라는 권위를 갖는데다, 인맥을 통해 다양한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정치, 행정, 경제 권력층들의 비공식·비공개 모임의 폐단은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났다. 2004년 8월 당시 안상수 인천시장은 지역의 한 건설업자로부터 현금 2억원이 든 굴비상자를 전달받았다가 며칠 만에 신고했다. 그런데 당시 이 사건 피의자였던 안 시장이 수사 책임자였던 당시 인천지방경찰청장과 인화회 모임에서 만나 장시간 대화를 나눈 사실이 알려졌다. 당시 ‘부적절한 만남’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기관장 모임이 가장 악용된 사례로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발언으로 유명한 ‘초원복국집 사건’이 있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2년 부산의 복어요릿집에서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이 지역의 권력기관장들을 모아놓고 “김영삼 후보를 밀어야 한다”며 선거운동 지원과 지역감정 조장 등을 주문한 사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관장 모임은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각 지역 지부장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에서도 2016년 해운대 엘시티(LCT) 비리 사건 때 지방 기관장들과 기업인들의 모임이 논란을 일으켰다. 부산의 ‘부산발전동우회’는 2008년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뒤 시장과 지방경찰청장, 지방검찰청장, 지방법원장 등 권력기관장들을 특별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그런데 인허가를 위해 온갖 로비가 난무했던 엘시티의 시행사 회장이던 이영복씨가 2016년부터 부산발전동우회 회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당시 이씨와 권력기관장들의 사적인 접촉이나 로비는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으나, 이 논란으로 부산발전동우회는 사실상 해체됐다.
■ “필요하다면 공식 기구로 투명하게” 인천이나 부산과 달리 기관장 모임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없는 다른 지역에선 이 모임에 긍정성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기관장 모임 관계자는 “지역의 주요 인사들이 정기적으로 만나 현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눈다. 여론을 청취하고 정책을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유명 강사 초청 강연이나 당연직 회장인 광역단체장의 현안 설명을 듣는 등 유익한 점이 많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이 모임의 구성에 매우 비판적이다. 이광호 인천평화복지연대 사무국장은 “이런 모임을 통해 권력층으로 불리는 기관장들이 주요 정보를 선점하고,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구조가 더욱 강화된다. 노동자와 농민, 서민 등 단체가 배제된 이런 모임이 과연 사회 전체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겠느냐”고 지적했다.
전문가들도 군사정권의 잔재인 이런 비공식·비공개 모임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형익 한신대 교수는 “과거 온갖 권력형 범죄로 얼룩진 기관들의 장들이 법적 근거도 없는 사적인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런 비공식 모임에서 주요 현안을 다뤄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면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하 홍용덕 김영동 김일우 기자 jungha98@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