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는 우리들의 삶이 달라졌으면 한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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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틈나는 대로 하늘을 보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왜 사는가? 그래 내 임무는 인문 정신을 고양시키는 인문 운동가이다. 그 답을 문학 평론가(전영규)의 칼럼에서 찾은 적이 있다. “문학의 역할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각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고통받는 타인을 향한 위안과 공감을 불러내 보이지 않는 연대를 이루는 일이다.” 그리고 박경리 작가의 말에서도 찾았다. “작가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작가의 본질, 인류의 운명을 고민하는 게 작가가 가는 길이다.” 문학이 타인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문학을 업으로 삼는 작가에겐 생존만큼이나 치열한 고뇌와 각성을 필요로 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별 볼일 없는 내 문장들이 나와 무관한 자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작가를 꿈꾼다. 더 나아가 그 위안이 삶-죽음이 아닌 살림-을 향한 연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바람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명성이 곧 능력인 시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미국이 “할리우드가 헤겔을 압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 가운데, 오프라 윈프리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모셔야 한다는 기사를 봤다. 그러나 인문정신의 측면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건 대통령이 되는 능력과 대통령을 잘 하는 능력 사이의 간극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대통령직은[정치 리더의 역할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여기서 균형감각이다. 영어로 말하면, 밸런싱이다. 밸런스(균형)은 명사이고, 밸런싱은 동명사이다. 그러니까 밸런싱은 균형감각을 유지하려는 행위로 실제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다.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를 잘 하기 위해서는 자질도 훈련도 필요하다. 특히 공공성과 민주주의-국민주권의식-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지니고, 공적 서비스 경험이 있어야 한다. 사익을 위해서만 일한 사람은 더 특별한 공적 서비스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초연결된 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래서 선거 능력과 정치 능력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오히려 정치공학적으로 만 움직이는 선거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명성이 능력이 아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문 운동가이다. 올해부터는 우리들의 삶이 달라졌으면 한다. 어떻게? 하나는 안전, 또 하나는 평화로, 또 하나는 ‘저녁이 있는 삶’과 ‘사람이 먼저’인 세상으로. 이런 휴머니즘이 우리 사회에서 구현되려면 두 축이 돌아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정부의 제도 변화를 촉구하고, 정부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적폐 관료들을 청산하고, 사회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또 하나는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위대한 개인’으로, ‘위대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 “내 삶이 달라지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회사 간부들은 부하 직원을 저녁에 붙잡거나 육아 휴직에 눈치주지 말고, 직원들은 근무시간에 열심히 일하고, 남편들은 부인의 경력이 단절되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고, 여성은 과감히 다양한 직종에 도전하는 것이다. 각자 위치에서 할 일을 일하는 시간만큼은 충실하게 하고, 나머지 시간은 네 가지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가족, 친구, 건강 그리고 영혼(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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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이니, 선거 막판에 이르니 수구 언론들이 시중여론을 호도하는 ‘죽기 살기’로 하고 있다. 수구 언론들의 발악이 인터넷 뉴스 포털로 노골적인 여론 조작을 하고 있다. 저들의 의해 변질된 여론조사결과를 전부 무시해야 한다. 특히 최근 통합 분위기에 편승해 중도 언저리에서 민주당을 기웃거리던 부류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고 이 시대의 “참 언론인” 송광석 페친이 담벼락에 쓰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들은 철저한 기회주의자들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엄중을 강조해 천금 같은 개혁의 기회를 무산시킨 부류들이다. 눈을 부릎뜨고 감시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탕평이니 통합이라는 이유로 득세를 하는 형국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언론이 일부 ‘기레기’들로 무너졌다. 언론 개혁이 절실하다. 물론 개혁은 어렵다. 개혁 ‘개(改)’는 ‘몸 기(己)’와 ‘때릴 복(攵)’으로 이뤄져 있다. 모름지기 개혁하려는 자는 자기 몸부터 때려서 바로잡는 법이다. 마루를 닦으려면 먼저 걸레를 깨끗이 빨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오물이 묻은 채로 청소한다면 마루가 깨끗해지겠는가 더 추해 질 것이다.
기능적 정치, 즉 정치 공학을 운전하는 일은 가능해도 정치 자체의 복원은 힘들다. 정치공학으로는 이 사람을 저 사람으로 바꾸고, 저 사람을 이 사람으로 바꾸는 일은 가능하다. 또 이 진영이 저 진영을 대체하거나 저 진영으로 이 진영을 대체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이 새 세상처럼 보이지만, 새 세상이 아니다. 정치처럼 보이지만, 아직 ‘진짜’ 정치는 아니다. 선거를 잘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오늘 시처럼, “하지 않은 죄”를 고백하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한다. 세상이 진영으로 너무 나뉘어 갈등한다.
하지 않은 죄 / 마거릿 생스터(캐나다 시인)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잊어버린 부드러운 말
쓰지 않은 편지
보내지 않은 꽃
밤에 당신을 따라다니는 환영들이 그것이다.
당신이 치워 줄 수도 있었던
형제의 길에 놓인 돌
너무 바빠서 해 주지 못한
힘을 복 돋아 주는 몇 마디 조언
당신 자신의 문제를 걱정하느라
시간이 없었거나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사랑이 담긴 손길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말투.
인생은 너무 짧고
슬픔은 모두 너무 크다.
너무 늦게까지 미루는
우리의 느린 연민을 눈감아 주기에는.
당신이 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하지 않고 남겨 두는 일이 문제다.
해 질 무렵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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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사법 시스템도 개혁해야 한다. 아래 그림의 왼쪽은 우리나라 대법원 중앙홀에 있는 거소 오른쪽은 정의의 여신상 디케(Dike)이다.
오른쪽 고대 그리스의 정의의 여신 ‘디케(Dike)’상의 형태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서구의 정의의 여신은 통상 입상(立像)으로, 두 눈을 안대로 가린 채, 한 손엔 천평 저울을,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있다. 눈을 가린 것은 불편부당한 재판, 공정한 재판을 의미한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재판하겠다는 것이다. 칼을 든 것은 정의의 실현을 의미한다. 천평 저울이 기우는 것은 불의를 뜻한다. 여신은 그 순간 칼을 휘둘러 정의를 실현한다. 곧, 서구의 정의의 여신상은 ‘공평한 재판과 정의의 실현’을 상징화한 것이다.
‘디케’ 여신은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공정하게 심판하겠다는 일념에서 두 눈을 붕대로 감은 채 칼과 천칭 저울을 들고 있다. 두 눈을 가린 채 저울을 든 것은 사람들의 지위나 이념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겠다는 뜻이다. 헌법도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법관들이 검정 법복을 입는 관행도 양심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이다. 옛날 영국에서는 법관들이 가발을 쓰고 재판을 했다. 왕당파와 의회파가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 17세기에 왕당파 사람들은 긴 머리카락을 가진 반면 의회파에선 짧은 머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로 인해 법관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재판 성향을 저울질하는 풍조가 생겨나자 양심에 따른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 가발로 머리 모양을 감추었다. 요즘 너희 법관들이 똑같이 검정 법복을 입는 관행도 아마 그런 의지의 표출일 것이다. 정의의 횃불도 양심 없이 타오를 수 없다. 양심은 모서리가 셋인 삼각형 모양이라 한다. 나쁜 짓을 하면 뾰족한 모서리가 콕콕 찌른다. 그래서 가슴이 따끔거리고 아픈 것이다. 누군가 비난에도 꿈쩍하지 않는 것은 그 모서리가 다 닳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왼쪽은 우리나라 대법원 청사 중앙홀 전면(대법정 출입문 위)에 있는 ‘정의의 여인상’이다. 대법원 정의의 여인상은 눈을 뜨고 있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앉아 있다. 눈을 떴으니 완벽한 공평을 기대할 수 없고, 법률만 읊조리는 책상물림 법관의 모습이다. 법전(법)이 정의를 자동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보다는 법(법관)만능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대법원 사이트에는 이렇게 써 있다. “박충흠의 작품으로 대법정 출입문 위에 위치하고 있다.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서구적인 이미지의 정의의 여신을 한국적인 느낌으로 재형상화한 것이다. 얼굴의 모습은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고운 자태가 엿보이도록 하였고, 의상도 우리 고유의 전통 복장으로 처리하였다. 한 손에는 저울을 높이 들고 또 다른 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 대법원 공식 블로그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책을 들고 있는 것은 힘보다는 지혜로 정의를 밝힌다는 뜻이며, 안대를 하지 않은 것은 두 눈을 뜨고 법전을 올바르게 일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다.” 이를 언론인 김조구는 다음과 같이 다르게 해석한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여신상은 1995년에 만들어졌습니다. 오랜 세월 사법부는 권력의 그늘 아래 있었습니다. ‘칼’은 정의로운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명령에 복종하는 무기였습니다. 죄 없는 이들을 베었고, 죽음을 판결했습니다. 그 시절 법은 진실에 눈감고 국민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맹목’으로 칼을 휘둘렀습니다. 칼과 안대가 없는 대법원 여신상에서는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부끄러움이 묻어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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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알다시피, 법관은 결국 인간과 세상을 베는 자리이다. 사람의 삶을 가르고 운명을 재단한다. 그래서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응시한 뒤 칼을 들어야 한다. 그 칼은 매번 떨려야 한다. 떨림이 고뇌이고, 그 고뇌가 바로 정의의 시작이다. 바람처럼 빠른 검법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다. 최근 우리 대법원의 빠른 칼 놀림은, 망설임과 절제가 없는 칼질이 어떻게 정의를 배반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오늘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열린다. 대법원은 소수의 특권 집단이 자의적으로 판단을 남발해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그곳은 국민을 위한 정의의 마지막 언덕이다. 이 언덕이 무너지면 국민은 기댈 곳을 잃는다. 공정하고 신속한 절차, 억울한 이들의 이야기에 법의 언어로 답하는 판결들이 쌓일 때 비로소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국민의 가슴 속에 깃든다. 대법관 증원은 단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사법 정의가 국민 개개인에게 닿을 수 있도록 하는 절박한 제도의 회복이다. 대법원에는 더 많은 손, 더 정밀한 눈, 더 넓은 귀가 필요하다. 법관 여러분은 선택해야 한다. 소수 대법관의 특권 지키기에 동참할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재판 받을 권리 확대에 앞장설 것인지를 말이다. ‘6만쪽 기록’ 문제가 대두되자 대법원은 “다른 상고심 사건에서도 대법관들이 기록을 전부 읽는 것은 아니다”고 변명했다. 대법관들이 기록도 모두 읽지 않고 자신들에 대한 판결을 내려왔다는 것을 대법원 재판에 운명을 건 수많은 국민은 알게 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 내란 사건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지귀연 부장판사의 술자리 의혹이 세간에 떠돌고 있다. 한 나라의 헌정질서를 뒤흔든 중대한 사건을 심판하는 재판장의 이름이 유흥업소 접대 의혹과 함께 언론의 활자 위를 떠도는 것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일각에서는 “판사 뒷조사를 통한 사법부 흔들기”라는 비판도 나온다. 법관들로서는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과 불안이 더 고조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직자는 누구나 늘 공적 감시의 대상이다. 청렴과 도덕, 윤리와 품위, 이런 단어들은 공직자의 머리에 씌워진 왕관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다. 그동안 숱한 공직자들이 크고 작은 비위와 추문으로 스러져갔다. 그러나 누구도 도덕성 검증을 ‘직무 방해’라고 말하지 않았다. 유독 법관의 비위 혐의 의혹에 대해서만 ‘재판 방해 의도’ 프레임을 들이대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남을 심판하는 자는 스스로를 더 가혹하게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판사의 거짓말은 한 사람의 거짓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재판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사법부 권위에 대한 냉소로 이어진다.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법의 권위는 법전이 아니라 판사의 얼굴에 있다. 그 얼굴이 정직할 때 법도 정직해진다. 판사의 정직함이 곧 법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현 사법부 위기 원인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오랜 시간 쌓아온 자기 확신, 고고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세상과의 고립, 스스로를 성역 화한 높은 담장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 이런 것들이 사법부가 마주한 진정한 위협이 아닐까?
사업부이든 누구든지 같다. 사법부의 독립은 권위가 아니라 절제에서 온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권한이 아니라 책임에서 태어난다. 그 책임의 무게를 이기는 것은 오직 겸손에 있다. 사법부의 경우, 국민이 등을 돌릴 때 독립은 허공에 흩어지는 문장이 된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권위와 독립에서 나오는 위엄(威嚴)은 우엄의 벽을 다시 쌓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엄의 기원을 성찰하는 자리에서 나온다. 담장을 허물고 담 너머 세상의 목소리와 나 지신의 야심의 소리를 마주하는 시간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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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 그 카리스마는 자신을 구별하여 자신의 깊은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고독한 묵상, 그 묵상을 통해 목숨을 바칠 만한 임무의 발견 그리고 그것을 대중에게 일관성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 그리고 자기를 무한 신뢰하는 자이다. 다음처럼 5 가지 절차를 말할 수 있다.
▪ 자신을 먹는 것, 입는 것 그리고 가는 곳을 절제하며 구별한다.
▪ 자신의 깊은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나만의 공간에서 고독하게 묵상한다.
▪ 그 묵상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 일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자신의 소명, 아니 임무를 발견한다.
▪ 그리고 일관성 있게 말만이 아니라 몸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 그리고 자기를 믿고 계속 나아간다.
그러니 매일 무리 지어 사람들과 다니지 말고, 먼저 자신을 위한 별도의 공간과 시간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헌신한다. 이 구별된 시간과 공간이 고독이다. 고독이 우리를 변모 시킨다. 매력 있는 사람으로. 평범한 인간은 고독을 통해 비범한 남다른 인간으로 다시 탄생한다. 그는 그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감지한다. 그리고 그 임무를 대중들에게 감동적으로 이야기 하고, 공동체의 최선을 찾아내기 위해 경청한다.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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