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된 정의조차 없는 비핵화, 이젠 비핵지대로 바꿔야
마차가 말을 끄는 방식에서도 벗어나야
8월 한미연합훈련 유예로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길로 다시 나서야
수정 2025-05-05 08:34등록 2025-05-05 08:08
차기 정부가 국민과 함께 짊어질 가장 무거운 짐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 핵문제’이다. “머리 위에 이고 살 수 없다”던 북핵은 나날이 커지고 많아지고 있고, 이게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게 하겠다며 펼쳐진 ‘미국 핵우산’을 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도통 미덥지가 않다. 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은 “불가역적인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지고 있고,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체념적인 정서가 강해지면서 국내에선 자체 핵무장론이나 핵 잠재력 확보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이게 도전적인 측면이라면 기회의 측면도 존재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김정은 정권과의 “관계 재구축” 의사를 지속적으로 피력하면서 북미 대화 재개를 위한 내부 검토에 들어갔다. 6월 4일에는 한국에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심기일전해서 한반도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다시 내디딜 수 있는 정치적 환경이 존재하는 셈이다.
당위성을 떠나 비핵화는 종언을 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당성을 떠나 자체 핵무장론도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한국의 비약적인 군사력 강화와 미국의 확장억제 강화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대안처럼 추구되어왔지만, 한미동맹이 군사력을 강화할수록 조선의 핵과 미사일 능력도 강해져왔다는 점도 톡톡히 경험한 바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나는 우리가 휴전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70년 넘게 미국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살아왔다는 역사적 사실부터 환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두려움의 공감은 두려움의 소비보다 우리를 훨씬 이롭게 하면서 문제 해결의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다. 공유된 두려움은 군사적 안정에서부터 군비통제와 군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접근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반도 핵문제의 새로운 해법으로 비핵무기지대(비핵지대)를 차분하게 검토해보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주장을 내놓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최근 국내외 환경의 변화는 비핵지대를 공론화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문일답 형식으로 꾸며봤다.
- 비핵화와 비핵지대는 어떤 차이가 있나?
일반적으로 비핵화와 비핵지대는 특정 국가나 지역에 핵무기가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반도를 놓고 본다면, 30년 넘게 추구되었던 비핵화에는 정작 합의된 정의가 없는 반면에 비핵지대는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지만 명확한 정의가 존재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이 주장했던 ‘조선반도 비핵화’는 자신의 핵무기 포기뿐만 아니라 미국 핵위협의 근본적인 해결을 의미했다. 반면 미국은 자신의 핵정책에는 손을 대지 않고 조선의 핵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폐기로 국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의 경우에는 정권에 따라 달랐다. 이러한 비핵화를 둘러싼 동상이몽은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에 반해 비핵지대는 하나의 국제 규범으로 자리잡으면서 보다 분명한 정의가 존재한다.
- 한반도 비핵화에는 합의된 정의가 없다고 했는데,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있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1992년 공동선언의 합의 주체는 “남과 북”이다. 핵심은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 핵문제의 핵심적인 당사자에는 미국도 있고, 또 비핵화 협상은 북미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한반도 비핵화의 정의에 대한 합의 주체는 남북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거 6자회담 협상에서 미국은 비핵화 합의가 한국에 핵무기를 재배치할 미국의 권리까지 제약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또 트럼프 행정부 1기 때에도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은 “한반도 비핵화의 당사자는 남북한이기 때문에 미국의 의무는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적도 있다. 이렇듯 남북미가 공히 합의한 비핵화의 정의는 부재한 상황이다.
- 그럼 한반도 비핵지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
1999년에 유엔 군축위원회가 제정하고 유엔총회가 승인한 가이드라인에 기초하면 된다. 이 가이드라인에도 “핵무기의 개발, 제조, 실험, 보유, 배치, 접수, 반입 등을 금지”하는데,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비핵화의 개념과 같다. 그런데 비핵지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식 핵보유국들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인 미국·중국·영국·프랑스·러시아가 해당 지대 국가에 대한 핵무기의 사용 및 사용 위협을 안 한다는 소극적 안전 보장을 약속하고, 해당 지대에는 핵무기 배치도 금지한다는 핵보유국들의 의무도 담겨 있다. 따라서 한반도 비핵지대는 한국과 조선이 조약을 체결하고 5대 공식 핵보유국들이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 의정서를 체결하는 형태이다.
- 비핵화는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비핵지대는 실현 가능성이 있나?
물론 어렵다. 그런데 몇 가지 주목할 점은 있다. 우선 현재 세계 면적의 50%가 넘는 지역이 비핵지대인데, 여기에는 중남미, 아프리카, 남태평양,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일국 비핵지대인 몽골 등이 속해 있다. 유엔 회원국이 193개국인데 115개국이 비핵지대에 속해 있다. 이렇듯 비핵지대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실현되어왔다는 점은 한반도 핵문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또 비핵화는 30년 넘게 가봤지만 실패한 길이고, 비핵지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한반도 비핵지대로 바꾸자는 것인가?
그렇다. 비핵화라는 용어를 계속 쓰면서 내용적으로 비핵지대를 추구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아예 용어를 바꾸는 게 더 낫다고 본다. 존재하지도 않고 합의하기도 힘든 비핵화의 정의를 놓고 더 이상 헤맬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비핵지대를 정의와 목표로 삼는 게 실용적이다. 또 조선은 비핵화라는 표현에 반감부터 표하는데, 비핵지대는 조금이나마 공감을 이룰 수도 있다. ‘조선반도 비핵지대’의 최초 제안자는 조선이고 비핵지대가 보다 공정한 문제 해결 방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 결국 비핵지대도 조선의 핵폐기를 목표로 하는 것인데, ‘불가역적 핵보유’를 천명한 조선이 비핵지대라고 받아들이겠는가?
당분간은 기대하기 힘들다. 다만 비핵화보다는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비핵화를 향한 접근은 대북 경제제재와 무력시위 등 압박에 치우쳤고, 조선이 핵을 포기하면 이것저것 해주겠다는 설득은 ‘그림의 떡’ 수준에 머물렀다. 반면 비핵지대는 조선이 과거에 제안했고, ‘조선반도 비핵화’와 친화성이 있으며, 공정하고 균형적인 핵문제 해결을 포함하고 있다. ‘강압’에 의한, 그래서 실패를 되풀이해온 방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시도되지 않은 ‘공감’을 통한 접근이라는 뜻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친북적인 주장이라고 비난하지만 비핵지대는 하나의 국제 규범이자 거의 모든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핵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이다. 그래서 조선의 수용성을 높일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조선의 ‘명예로운 선택’과 한미일의 ‘공감을 통한 압박’ 사이에 긍정적인 화학작용을 만들어내야 한다.
- 미국은 동의할까?
과거의 미국은 부정적이었고 현재와 미래의 미국의 입장은 알 수 없다. 1990년을 전후해 조선이 비핵지대를 제안했을 때,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 이를 반대했었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에선 주한미군 감축이 더 이상 ‘금기어’가 아니다. 더 중요한 점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핵보유국”이라고 칭하면서 미국·러시아·중국이 먼저 핵군축을 하고 조선 등 다른 핵보유국도 여기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세계의 핵군축’은 조선의 오래된 화법이다. 그래서 세계의 핵군축의 맥락에 조선의 핵군축도 담아내고 장기적으로는 한반도 비핵지대를 추진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트럼프 임기 내에 한반도 비핵지대 완성은 불가능하겠지만 ‘한반도나 동북아 비핵지대 창설에 합의한다’는 첫발은 대딛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 비핵지대도 주장하는데, 중국이 핵을 포기할 리 없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동북아 비핵지대는 중국의 핵 폐기를 포함하지 않는다. 한국·조선·일본이 비핵지대 조약을 체결하고 중국을 포함한 5대 핵보유국이 의정서를 체결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제한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나의 견해로는 한반도 비핵지대를 먼저 추진하면서 적절한 시점에 ‘비핵 3원칙’을 내세워온 일본도 포함하는 방식이 어떨까 한다.
- 미국의 핵우산도 없어지는 건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일단 핵보유국이 비핵국가를 상대로 핵무기 사용 및 위협을 하지 않는다는 게 비핵지대의 핵심 내용이기 때문에 핵우산의 필요성은 크게 줄어든다. 하지만 어떤 핵보유국이 이러한 국제법적 의무를 저버린다면 다른 핵보유국이 동맹국을 상대로 핵우산을 제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 우리에게도 이점이 있나?
당연하다. 비핵지대에 다가설수록 핵전쟁의 위험과 북핵 대처 비용 및 한미동맹 강화 비용이 줄어들어 우리의 안보와 민생경제에 도움이 된다. 또 비핵지대가 창설되면, 한국에 대한 핵보유국의 위협도 국제법적으로 크게 줄어들게 된다.
- 그럼 비핵지대 실현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
우리에겐 아직 이 방식이 생소한 만큼, 우선 공론화가 필요하다. 또 북미대화가 재개되면 ‘군비통제’나 ‘핵군축’으로 진행될 가능성을 우려하기보다는 이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지혜도 요구된다. 어떻게 표현하든 단박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군비통제→핵군축→비핵지대’로 이어지는 프로세스를 짜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차가 말을 끄는 방식’에서 ‘말이 마차를 끄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대북 제재 해결, 평화협정 체결, 북미 수교 등을 북핵 해결 막바지나 그 다음으로 상정할 것이 아니라 북핵 해결 앞에, 혹은 그 과정에 두어야만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를 향한 마차가 움직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차기 정부가 트럼프 행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올해 8월로 예정된 연합훈련 유예를 선언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끝의 시작’을 도모할 수 있다.
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 겸 평화네트워크 대표 wooksi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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