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 스님 2014. 08. 07조회수 434 추천수 0
청전 스님의 아프가니스탄 기행
3.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실크로드의 유적들이 눈앞에
아프가니스탄 북쪽은 힌두쿠시 산맥의 계곡에 옥서스(아무다리야) 강의 여러 지류가 흐르는 곳으로 예전에 중국의 구법승과 카라반, 심지어 침략자들까지 가장 많이 넘나들던 주 노선이었다.
왜냐하면 파미르 고원이나 티벳은 평지가 4,000m, 고개가 5,000m급이지만 이곳은 그보다 1,000m가 더 낮은 평지와 고개로 되어 있고 박트리아 지방, 사마르칸트 등이 있어 통행에 불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천산산맥 이동(以東) 쪽에서 보자면, 1,000km 가량을 더 서쪽으로 갔다가 정남쪽으로 돌아 내려와야 되었지만 이렇게 우회하는 게 제일 안전했다. 그래서인지 7세기 경 현장법사가 인도로 오기 위해서는 바로 이 주 노선을 따라 왔다가 귀국길에는 바다크샨을 지나 ‘사막의 진주’라는 카쉬가르로 곧장 가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실크로드의 ‘사막의 길’의 쇠태하고 근대에 접어들어 정치적 불안정이 겹쳐 다만 그 유적만 옛 영광을 간직하고 있을 뿐, 시내버스 구경하기도 어려운 곳으로 전락해 있었다.
어찌되었든 옛 영광의 흔적을 찾아, 쿤두즈(Kunduz)까지 250km를 한 번, 그리고 마자레 샤리프(Mazar-e-Sharif)까지 250km 까지 또 택시를 대절하여 갔을 때는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산중에 있었을 때는 햇빛이 강렬하여 더웠으나 이곳은 이제 해가 진 이후에도 더운 게 낮은 땅에 내려온 게 확연하게 느껴졌다. 해발고도가 무려 3,000m가 떨어졌으니 더운 건 당연했다. 인도 평원은 아마 매일 40도 이상 올라갔을 5월이었으니 말이다.
옥서스 강 이남을 따라 진종일 이곳 마자레 샤리프까지 온 것은 회교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슬람교 창시자인 모하메드의 사위, 예언자 하즈랏 알리(Hazrat Ali)가 여기에 묻혀 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의 또 다른 비밀 무덤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인근의 나자프(Najaf)에 있다고 한다.
‘고귀한 성소(Noble Shrine)’라 불리는 마자레 샤리프는 푸른 모스크(Blue Mosque)로 유명한데 그 빛깔과 양식은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중앙 아시에서도 제일이라고 하여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찾아 나선 길이었다.
성지 중의 성지라는 이곳까지 올 때는 진종일 수많은 돌 자갈과 모래 무더기 사태를 지났는데 보름 전에 일어난 홍수로 2,500여 명의 사망자가 생기는 끔찍한 산사태가 일어나 아직도 흙더미 속에서 시체를 찾아내는 중이었다. 가끔씩 길가에 부서진 채로 방치된 탱크들의 잔해가 눈에 띄었다. 1979년, 구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래 현주민들이 육탄으로 탱크를 막았던 잔해였다. 막강한 군사력만 믿고 침공을 감행했던 소련은 피해만 잔뜩 입고 또 자기들도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되어 10년 후 아무런 성과도 없이 철수를 했었다.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했던 것처럼. 그 자리를 대신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자기들이 원조했던 탈레반 정권을 쫒아내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두었으나 얼마나 오래갈 지는 장담할 수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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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어디를 가더라도 길가에 부서진 탱크를 많이 볼 수 있다>
어찌되었든 찾아간 마자레 샤리프의 담청색 돔과 자그만 타일들로 이뤄진 푸른 모스크에는 참배객이 그치질 않았다. 모스크 주위엔 별의별 불구자들이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인데 신통하게도 바로 이 모스크에선 기적이 일어나곤 한단다. 어느 종교에 드러나는 현상이리라.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뚫린 네 개의 문 주위에는 하얀 비둘기만 모여 있었다. 워낙 성지라 검정색 비둘기들도 이 사원에 오면 40일 안에 하얀색으로 변한다고. (나중에 보니 인근의 비둘기들은 모두 하얀색이었다. 변해서 그런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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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레 샤리프 시내 중앙에 있는 성지가 된 모스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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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비둘기 떼, 신통하게도 하나같이 하얀색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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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 옆 길가의 골동품 선물거리 노점상 할부지가 세월 좋게 낮잠을 잔다>
다음날 20여km 떨어진 발크(Balkh)로 갔다. 『불설태자서응본기경(佛說太子瑞應本起經)』에 나오는 부처님에게 꿀과 사탕수수 공양을 올렸던 북쪽의 상인인 제위(禮謂, Trapusa)와 파리(波利. Bhahaika)가 바로 이곳 출신의 카라반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또한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알렉산더 동방 원정 때 건설된 알렉산드리아라는 인공 도시의 그리스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던 곳으로 그들의 후예에 의해서 인간의 형상을 본떠 맨 처음 불상이 제작되었다. 그들과 통혼(通婚)을 했던 남쪽의 간다라 지방의 월씨(月氏)의 후예 쿠샤나 왕조에 의해서 불상이 탄생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감회가 남다를 줄 알았으나 “빌라 하싸르”라 불리는 진흙 담만이 무상의 이치를 일깨우며 남아 있었다.
발크를 굳이 찾아가 보고 싶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곳이 ‘불을 숭배 한다’하여 배화교(拜火敎)로 불리는 배화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의 태생지였기 때문이었다. 부처님보다 100백여 년이 앞선 시대에 태어난 그의 가르침은 이후 페르시아, 즉 오늘날 이란에서 크게 번성했었다. 그의 가르침의 근거는 선악으로 나뉜 최초의 이원론적 일신교(一神敎) 사상으로 그 영향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종교는 두말할 것 없이 지금의 기독교와 회교다. 한때 중국까지 전래되어 명교(明敎)라 불리던 배화교는 지금도 내가 사는 인도 땅에 남아있다. 인도 제일의 타타그룹의 회장도 배화교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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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크의 빌라 하싸르 진흙 성이 옛날의 역사를 말해준다>
배화교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아직까지 그들의 성소를 다녀온 적이 없었다. 인도에 돌아가면 배화교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일었던 발크를 뒤로 하고 이제 대불(大佛)로 유명한 바미얀 까지 가는 길, 이번에도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이번 여행은 이래저래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었다. 하긴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얼 더 바랬을까만.
여기서 목숨을 버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를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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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어디고 식당에 가면 가장 쉽게 먹을 수 있는 케밥(양고기 꼬치구이)이란 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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