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케인즈도 죽이는 신자유주의 : 오래 사는 마르크스
필자 : 이스마엘 호싸인-자데흐 / 역자 : 정성희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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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30 15: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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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이스마엘 호싸인-자데흐 미국 드레이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역자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출처 :
2014년 8월 26일자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결과라며 뉴딜-사회민주주의 개혁정책으로 특징되는 케인즈주의 처방이 만병통치약인양 주문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오바마 정부를 비롯해 자본주의 나라 그 어디에도 케인즈주의 처방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진단하고 ‘공평과 존엄’에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글이다/역자 주
많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케인즈주의의 부활을 생각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명백하게 많은 기대를 모았던 케인즈주의 처방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왜? 케인즈 경제학자들은 레이건 대통령 시기에 그 유래를 찾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반대로 케인즈 경제의 신자유주의 경제로의 전환은 단순한 이데올로기보다 더 깊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논할 것이다.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오래 전에 신자유주의로 넘어갔다. 수요관리정책을 통해 경제를 조절하고 회복시키는 정부의 능력에 대한 케인즈주의자들의 믿음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는 희망에 찬 인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희망적 인식과는 다르게 공공정책은 단순한 행정적 기술적 선택 그 이상이었다. 계급정책이 훨씬 중요했다.
또한 이 글에서 신자유주의의 잘못된 정책으로 실업의 전염병이 돈다고 보는 케인즈주의보다 노동예비군론에 기초한 마르크스의 실업론이 만성적 고실업을 더 잘 설명해주고 있음을, 마찬가지로 높은 고용과 임금을 확장적 경제순환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보는 케인즈주의 개념보다 마르크스의 최저생계비론이나 빈곤임금론이 어떻게 왜 궁핍의 일반적 우세와 가난을 탈피할 수 없고 높은 이윤과 부의 집중을 가져다주는지 더 설득력 있게 해명해주고 있음을 논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보다 더 깊은 것
케인즈주의자의 총수요관리전략에 의문을 갖고 서서히 포기한 것은, 많은 급진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단지 우익=공화당의 이데올로기적 경향이나 레이건의 개인적 선호 때문이 아니다. 국내외 경제와 시장의 조건이 실제 구조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뉴딜-사회민주주의 정책은 대공황의 여파로 추진되었는데, 경제적 조건이 양보했을 때, 그리고 노동자, 농어민들이 정치적으로 각성되었을 때 그 효과를 발휘했다.
그 양호한 경제적 조건이란, 전 세계에 걸쳐 2차 대전 이후 경제 재건에 투자가 요구되었고 미국 공산품에 대한 거의 무한대의 국내외 수요가 있었으며 미국의 자본과 노동 모두에 경쟁자도 없었던 것을 말한다. 이러한 안성맞춤의 상황에 아래로부터의 압력까지 동반되어 미국 노동자들이 괄목상대한 임금과 소득을 얻고 높은 고용율을 자랑할 있었다. 그 다음 높은 임금과 강한 수요는 공정한 방법으로 전쟁 직후의 장기적인 확장적 경기순환을 촉진하는 유쾌한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말~70년대 초에 이르면, 미국의 자본과 노동 모두 이제 더 이상 세계시장에서 비경쟁적이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2차 대전 직후 확장적 장기 순환 동안 미국 제조업체들은 고정자본이나 공장 증설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해왔고-주로 공장과 설비 부문에서 거대한 양의 이른바 "잠겨있는 비용"이 너무 많아 1960년대 말부터 이윤율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세계화로 케인즈주의 정책 거부”
그 무엇보다도, 실제 생산조건의 이 같은 중요 변화, 그에 따른 세계시장의 재조정이 케인즈주의 경제를 서서히 보류하고 결국 거부하게 되는 계기였다. 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 지지자들의 되풀이되는 불만과는 반대로, 뉴딜 개혁을 해제시키는 계획 뒤에 놓여있는 것은 로널드 레이건의 생각이나 술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이상 자본가의 이윤추구에 매력이 없다고 케인즈주의 경제정책을 단념하게 한 것은 먼저 자본의 세계화, 나중에 노동의 세계화이다. 그 이후 레이건과 신자유주의 긴축경제가 나왔다.
2차 대전 직후 금융규제, 자본통제와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이 브레턴우즈에서 창설되었을 때도 국제 금융 및 신용 시장이 효과적으로 유지되지 않았다. 미국 달러와 약간의 금이 국제 무역과 신용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신용은 주로 국제통화기금(IMF)과 여기에서 돈을 빌리고 갚는 통절 가능 국가의 중앙은행을 통해 일어났다.
그러나 국제 신용 및 금융 시장의 모습이 1960년대 말~1970년대 초부터 점차 변했다. 이들 시장이 수천억 달러의 규모로 성장함으로써 국제신용거래가 IMF-중앙은행 채널 밖에서 이뤄졌다. 국제 금융시장의 급팽창을 심대하게 야기한 2가지 주요 요인은 1) 컴퓨터를 이용한 국제신용, 2) 유로 달러, 즉 해외은행에 예치한 미 달러의 끝없는 증식이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자유자재로 글로벌 금융과 신용이 그렇게 커져서 국내 또는 국가의 통제와 조절이 사실상 효과가 없어졌다.
통제와 조절을 통한 보호 장치의 약화나 와해는 명백히 어떤 정치인들이나 정책입안자들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성향 때문이 아니다. 실제 국제금융시장 변화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다.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가기 오래 전에
신자유주의 정책이 좋아 케인즈주의 정책을 거부한 것은 레이건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간 1980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다. 명백한 증거가 확인하는 바, 케인즈주의 처방은 적어도 그 보다 12년 전에 만료되었다. 수요관리를 통한 경제 확장이라는 케인즈주의 정책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김이 빠졌으며, 레이건이 조타석에 앉았을 때 갑자기 끽 소리를 내며 멈추지 않았다.
에버그린주립대 알랜 낫세르 교수가 지적했듯이, "경제적 공평 정책은 효율이란 측면에서 비싸게 교환된다."는 주장은 레이거노믹스가 그런 논리를 펴기 오래 전에 민주당 정부의 경제자문역이 한 것이다. 아더 오쿤과 찰스 슐츠가 민주당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공평과 효율 : 큰 교환>(오쿤, 1975년)에서 "더 큰 공평을 위한 정부 간섭주의자들의 목표로 인해 민간경제에 손해를 끼치는 비효율적 대가를 지불해왔다". 똑같이 슐츠도 "공정과 공평이란 이름으로 시장에 충격을 주는 정부 정책은 필연적으로 비효율적이다"고 주장했다. 또 그런 정책은 "그 대단한 민중정책 입안자들을 지키려다 민간경제의 안정을 깼다."고 비판했다.
제롬 카루르도 "정부의 규제와 조절을 없애려는 상업-영업 원탁회의 방의 시도는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최소 9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기업의 법정 대리인, 루이스 포웰은 그 원탁회의 방에서 지금 잘 알려져 있는 비망록 '미국 자유기업제도 공격'을 설파했다. 포웰이 노동과 규제 표준을 법적으로 공격하면서 대기업은 재빨리 노조 조직화를 방해하고 미국기업연구소(1972년), 헤리터지 재단(1973년), 카토연구소(1977년) 같은 싱크탱크 선전기관이 봇물처럼 분출했다.
그 이전부터 민주당의 선각자들이 뉴딜-케인즈주의 경제에서 180도 이론적 방향 전환을 하면서 카터 정부에서 그 이론의 정책적 이행이 시작되었다. 레이건은 신자유주의의 점진적 아젠다에 관한 민주당의 복사판을 정돈해 추진함으로써,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라는 미사여구를 탐욕과 이기심을 촉발하는 험악한 개인주의라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표현으로 바꾸어놓았다. 클린턴은 레이건의 공급 일면의 경제정책을 완화하지도 못했고 오바마는 그런 정책의 집행을 망설이지도 않았다.
국가의 역할 : 희망, 신화, 환상
정부가 재정과 금융 정책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을 유지하도록 경제를 조정할 수 있다는 케인즈주의 입장은 자본주의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거나 조절될 수 있고 정부 부문의 경제전문가에 의해 모든 이해관계가 관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다. 그러므로 케인즈주의 모델의 유효성은 주로 희망이나 환상에 의존하고 있다. 왜냐하면 실제 국가와 자본주의 시장의 힘 관계는 언제나 다른 방향이기 때문이다. 케인즈주의자들의 인식과 대조적으로 경제정책 입안은 행정적 기술적 선택의 문제 그 이상이다. 국가와 정책 생산기관의 계급적 본질과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사회정치적 문제가 더 중요하다.
케인즈주의자들의 환상은 두 가지 신화에 의해 키워지고 은폐되고 있다. 첫째 신화는 케인즈의 재능으로 대공황과 2차 대전 이후 뉴딜과 사민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한 데 따른 인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증거들이 보여주는 바, 그러한 개혁 추진과 두드러진 케인즈의 부각은 결렬한 계급투쟁의 산물이며 케인즈와 같은 전문가들의 두뇌보다 민초들의 불가항력적인 압력의 결과이다. 사실 케인즈는 협소한 아카데미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고 뉴딜정책 대부분이 구사된 미국의 상황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둘째 신화는 1948~1968년 케인즈주의 수요관리 경제정책에 의한 미국의 장기적 경제 확장에 따른 인식에서 비롯된다. 이 시기 확장적 정부정책이 그 시대 환상적인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부가적인 양호한 조건이나 요인도 확장정책을 도왔다. 세계적으로 황폐한 전후 경제재건 투자 필요, 자본상품은 물론이고 소비자를 위한 전후 방대한 글로벌 수요, 세계시장에서의 미국 상품-자본의 경쟁 미약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간단히 말해 전쟁 직후 성장과 확장을 위한 어마어마한 여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케인즈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신화와 환상을 숨기고 2008년 금융위기와 이어지는 대불황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의 새로운 부활이라는 밝은 희망만을 상상했다. 지난 6년 가까이 아주 명백하게 케인즈주의 해법은 귀머거리 장애자로 전락하고 있다. 케인즈주의자들의 희망과 환상은 실망과 분노로 바뀌고 있다. 예를 들어 파울 크루그만 교수는 <뉴욕 타임>지 칼럼에서 오바마 행정부가 케인즈주의 경제 확장과 일자리 창출 정책을 모른다고 자주 빈정대고 있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의 낙담과 실망의 중심에는 경제정책은 지적 산물이고 정책생산은 본래 기술적인 전문분야와 개인적 선호의 문제라는 비현실적인 이해가 있다. 이들 경제학자들은 경제정책 수립이 좋거나 나쁜 것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계급정책의 문제이다.
선한 마음이나 인정어린 배려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공공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놓치지 않는 것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레이건을 사악한 왕으로 혹독하게 거듭 비난하고 루스벨트를 현명한 왕으로 칭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왜 지배계급이 현명한 왕을 내쫓았고 사악한 왕을 받아들였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런던 메트로폴리션대학의 페터 고안 교수는 "케인즈주의자들은 규제와 조절에 심취되어 국가와 월스트리트의 동일성을 보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거짓 주장을 한다고 지적했다.
성장과 고용 : 케인즈 대 마르크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현실의 경제발전을 설명하면서 케인즈주의의 종말과 부정확한 신자유주의의 부활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실업문제와 경제침체를 진단하고 있다. 케인즈주의 지지자들은, 정상적인 자본주의 대신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실업을 집요하게 비난함으로써 실업문제의 구조적 체계적 원인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끊임없이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자본주의 생산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추세는 상당한 규모의 실업군, 즉 마르크스가 얘기한 '노동예비군'을 양산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기본법칙은, 마르크스가 주장했듯이, 정례적으로 노동예비군이나 "잉여인구"을 양산하는 시장의 힘에 의해 무겁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노동예비군은 자본주의 생산에서 노동현역군 만큼이나 중요하다. 마치 관개 댐에서 수량을 정기적으로 때맞추어 조절하는 것이 물의 원활한 흐름을 안정화하듯이, 적정한 규모의 실업군은 자본주의 생산에 유리한 것이다.
생산과 고용의 세계화 시대에서는 노동예비군은 국경을 넘어 크게 확대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최근 보고에 따르면, 1980년~2007년 세계화된 노동력이 63% 증가했다. 또한 전 세계 도시화 또는 탈농화로 인해 실제 노동예비군의 비율은 50%에 육박하여 일자리를 찾지 못한 세계화된 노동력의 절반이 넘는다.
“1980년~2007년 세계화 노동력 63% 증가, 그 중 실업자 50% 이상”
이는 세계 어디든 생산의 이동에 쉽게 따라갈 수 있는 엄청난 유용한 실업군이며, 노동계급, 특히 자본주의 중심국의 노동계급에게 임금-소득 격감, 해고와 노조 탈퇴, 시간제 임시직 노동 등의 혹독한 내핍과 굴종을 강요하고 있다. 많은 케인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우익 공화당이나 사악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악한 의도가 조금도 아니다.
경기침체를 끝내고 실업율을 줄이기 위한 케인즈주의 패키지 처방에 대한 최근 몇 년 거듭되는 요청이 왜 계속 공허하게 들리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일국 단위에서 세계로 생산조건이 변화된 조건에서, 노동자와 민초들의 불가항력적인 정치적 압력도 결여되어 있는데,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국가 단위의 환경이나 프레임에서 추진된 케인즈 박사의 처방을 다시 채워 넣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이론적으로 높은 성장과 고용의 선순환에 대한 케인즈 전략은 간단하고 합리적이다. 심각한 경기하강에 직면하여 대규모 정부지출은 고용과 임금을 끌어올리고 구매력을 높인다. 차례대로 생산자의 투자와 고용을 자극하고, 다시 고용, 임금, 수요, 공급을 무한히 끌어올린다. 그 전략이 비교적 단순하고 아주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많은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케인즈주의 정책의 결함
첫째, 고용주와 정부정책 입안자들이 완전고용 구현에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데, 아무도 이 목표를 어떻게 실현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완전고용은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이거나 이윤극대화에 반드시 필요한 게 아니다. 기업이나 정부정책 입안자의 실제 목적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정한 실업자들은 자본주의 이윤추구에 일정한 고용노동자들 만큼이나 필수적이다. 자본주의는, 가능한대로 노동비용을 줄이고 노동계급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게 필요하기 때문에, 저실업과 고임금 보다 고실업과 저임금을 선호한다.
이는 예를 들어 실업률 상승 보고서가 나올 때 주식가격이 오르고 실업률 하강 보고서가 나올 때 주식가격이 떨어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또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이용해 자본주의 중심국의 독점기업과 정부정책 입안자들은 노동자를 위축시키고 노동비용을 줄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출 삭감과 공공부문 감축의 전례 없는 긴축 프로그램을 강제해왔다.
둘째, 신자유주의나 고용주의 반대만 아니라면 높은 고용, 높은 임금, 높은 성장의 선순환은 비교적 쉽게 성취된다는 케인즈주의자의 주장은, 고용주(생산자)가 자신의 이익을 아무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오직 그들의 사업에서 소문난 "포드임금"의 장점만을 신경 쓴다면, 케인즈주의자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고용주와 노동자 모두를 도와 전체를 위한 성장과 번영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클린턴 대통령 밑에서 노동비서관을 지낸 저명한 자유주의 교수, 로버터 라이히의 이 문제에 관한 시각은 다음과 같이 케인즈주의자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20세기 대부분, 미국경제 중심의 기본계약은,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자신들이 파는 상품을 구매만큼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 기본계약이 높은 생활수준, 많은 일자리와 좋은 임금의 선순환을 만들었다. 이 기본계약이 끝났다... 임금이 하락하고 회사가 고용을 하지 않아 기업의 이윤은 당장 늘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장기적으로 회사에 해가 되는 게임이다. 충분한 소비의 뒤받침 없이는 이윤 있는 날이 얼마 안 된다. 임금 삭감에 의한 이윤 증대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문제점은 미국의 생산자들은 고용은 물론이고 상품판매에서 국내 노동자에게만 의존한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마치 닫힌 경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미국 생산자들은 고용이든 상품판매든 국내 노동자들에게 점점 덜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확고하게 생산과 상품시장을 해외로 확장하고 있다. 공급(고용)과 수요, 모든 면에서 미국의 노동자이자 소비자는 긴요한 존재가 점점 아닌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주장의 둘째 문제점은 임금과 이윤이 중앙계획경제와 같이 총수요에 대한 거시적 국가적 범주의 계획이 아니라 개별 고용주나 기업주에 의한 미시적 개별적 범주의 결정이라는 것이다. 크고 작은 개별생산자들은 우선 임금과 이윤을 생각하는데, 맨 먼저 주요 생산비를 가능한 한 최소화하려 하고, 그 다음에 자신들의 상품판매에 우회적으로 기여하는 국가적 총수요를 고려한다.
마르크스는 주로 가난하고 유순한 노동계급을 만들기 위해 대규모 실업자군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의 의지와 능력을 "궁핍화"와 노동력의 굴복으로, 자본축적의 "일반법칙"에 필수적인 메커니즘 형성으로 특징지은 한 바 있다.
결론
실업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그의 노동예비군 이론에 기초해 있는데, 장기적인 고실업을 더 확고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실업병을 잘못되거나 나쁜 신자유주의 정책 탓으로 돌리는 케인즈주의자의 입장보다 말이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최저생계비 또는 빈곤 임금 이론이 궁핍의 일반적 전국적 우세는 물론, 그 빈곤 임금이 어떻게, 왜 높은 기업 이윤과 주식가격에 연동될 수 있는지 더 설득력 있게 해명해주고 있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확장적 경제순환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으로 보는 케인즈주의 개념보다 말이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의미 있고 지속적인 경제 안정화 프로그램은 오직 대중의 압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압력을 통해, 그것도 국제적 규모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견해가 세계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겪는 경제적 고통에 대한 더 논리적이고 전망 있는 해법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품위 있고 학구적이며 본질적으로 정치에 무관심한 케인즈주의자의 국가 차원의 자극제보다 말이다.
“경제 안정화는 오직 대중의 불가항력적인 압력을 통해”
일자리와 그 밖의 뉴딜 개혁을 위한 착한 케인즈주의자들의 구걸이 아무리 끈질기고 요란하고 열렬해도 그 정책 수행은 돈 많은 강력한 이해집단이 선출하고 통제하는 정부에 의해 완전히 무시될 것이다. 케인즈주의 수요관리정책이 갖는 근본적인 약점은, 그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정치구조인 계급정책이 빠진 인기 영합적 제안을 묶어놓은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노동으로 생산하는 것을 공평하게 분배하기 위해서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노동자, 민중이 참여하고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일하는 대다수의 경제적 안전과 인간의 존엄을 실현할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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