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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31일 일요일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홍암 나철 100주기 ①> 도제사언문을 찾아서
김치관 기자  |  ckkim@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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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01  08: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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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 100주기 연재를 시작하며
홍암 나철과 대종교, 항일무장투쟁 외에 우리 사회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과 민족종교지만 우리가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큰 인물과 중요한 종교다.
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 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 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 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미국의 노골적 패권 재구축이 맞부딪치고 있는 격변의 시기에 홍암 나철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할 이유는 충분한다. 구월산 삼성사에서 이 순례를 마무리할 수 있길 바란다. /필자 주

  
▲ 홍암 나철 100주기 첫 순례길 벌교 생가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딸에게 남긴 친필 유서.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열네해동안 네 얼굴을 못 보고 오늘 천고영별은 네 마암에 매친 한이 잇슬듯 하고 내눈에 항상 걸일듯 하나 이 길은 곳 영생하는 한울길이니 부대애회를 두지 말고 아비를 생각커든 대종교 큰 도를 정성으로 밋고 아비를 만나랴거든 공부를 통하야 한울길로 오라 임종에 두어자 유탁 잇지 말라. 친부 자필”
스스로 ‘한오리 목숨을 끊음’에 앞서 딸에게 보내는 유서에는 아비로서의 ‘애회(哀懷)’가 묻어나지만 ‘한울길로 오라’는 큰 당부도 담겼다.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3~1916),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6년 음력 8월 보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제천의식을 가진 뒤 시자들을 물리치고 ‘절식수도(絶食修道)’에 들어가 유서 여러 장을 남기고 스스로 숨을 멈췄다.
다섯 아들에게 준 유서에 “너의 무리 가운데 혹시 내 뜻을 이어서 몸을 종문에 바치는 자가 있으면 참으로 내 아들이다 누가 할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바람은 실제로 1942년 임오교변으로 중국 목단강 액하감옥에서 순교한 임오십현(壬午十賢)에 맏아들 정련, 둘째아들 정문이 포함됨으로써 실현됐다.
최후의 항거수단 자결, ‘스스로 숨을 멈추다’
  
▲ 1916년 음력 8월 초 닷새, 경성역을 출발해 사리원역에 도착한 홍암 나철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미 순명을 결심한 상태였으리라. [사진출처 - 대종교]
  
▲ 사리원역 앞 대기사진관에서 시자들과도 사신을 남겼다. 앞줄 왼쪽이 김두봉.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홍암 나철의 죽음을 되돌아보는 것은 단지 그의 비감한 가족사를 떠올리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대종교를 위하여, 한배님을 위하여, 천하를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해 순명(殉命)했기 때문이다.
“순명하신 자취를 살피면 (북쪽을 향하여) 곧바로 누워서 두 손을 드리웠으니 시체(尸體)를 거두지 아니하였으되 머리로부터 발까지 곧기가 먹줄을 놓은 것 같은지라. 어리석은 생각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얼이 되시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일본헌병대 의사가 와서 살피고 저희끼리 말하기를 『그 목숨 끊음을 연구하건대 아무런 물건도 쓰지 않은 것을 증변(証辨)할 수가 있으니 참으로 선생님, 참으로 선생님이시다』라고 공경하며 탄식하더라 합니다.” (홍암신형조천기, 96쪽)
대종교(大倧敎)에 대한 일제의 극악한 탄압에 맞선 최후의 수단으로 자결(自決)을 선택한 것도 한 인간으로서 결행하기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폐기 절식(閉氣 切息)’이라는 자결 방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폐기 절식은 쉽게 말해 숨을 쉬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말한다. 대종교의 삼법수련 중 호흡법에 해당하는 조식법(調息法)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종교의 항일무장투쟁 책임자였던 백포 서일 역시 폐기 절식으로 자결했다는 것이 대종교의 입장이다.
우리 전통 수련법에 조예가 깊은 한 인사는 “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도록 하는 근원적인 기관을 닫는 것”이라며 “우리 역사상 그 같은 경우는 적지 않다”고 말했다.
방문을 잠근 뒤에는 먹(墨)가는 소리밖에
  
▲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삼성각. 2003년 개천절, 남북해외 대표단은 평양 단군릉에서 천제를 지낸 뒤 삼성사를 찾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당시는 순천시 낙안면) 금곡부락에서 태어난 나철은 과거에 급제해 공직생활을 하다 스스로 물러나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4차례 일본을 방문해 외교활동을 벌이고, 을사5적 처단투쟁을 벌이다 실패한 뒤 1909년 단군교(2010년 ‘대종교’로 개칭)를 중광(다시 일으킴)한 뒤 8년만인 1916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단통치의 도를 더해가던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해 대종교를 철저히 불법화하고 탄압했다. 일본 신도(神道)를 퍼트려 식민통치를 완성하려는 일제에게 우리민족 고유의 신교(神敎)와 단군을 내세워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있는 대종교는 그야말로 양립불가능한 눈엣가시였던 것.
대종교의 도사교(교주)인 홍암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4일 김두봉, 엄주천 등 시자들을 대동하고 수백 교우들의 환송을 받으며 경성역을 출발해 사리원역에 도착했고, 사리원역전 대기(大崎)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자결을 결심한 행동이었으리라.
구월산 삼성사에 도착한 홍암 일행은 쇠락한 삼성사를 수리했다. 단군이 승하한 곳으로 알려진 상섬사(三聖祠)는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사당이지만 돌보는 이가 없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홍암은 추석인 음력 8월 대보름에 천제를 지낸 뒤 시자들을 물리치고 수도에 들어갔다.
“말씀을 마친 종사는 사당옆 언덕에 올라서 북쪽과 남쪽을 향해 망배한 후 곧 수도실로 들어가시어“자(自)금일 상오3시위시 3일간 절식수도 절물개차문(切勿開此門)”의 21자를 써서 문중방에 붙이고 안으로 방문을 잠근 뒤에는 먹(墨)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익(翌) 16일 상오 5시경 겹친 피로에서 깨어난 시자들은 늦잠 잔 것을 걱정들 하면서 수도실에 나아가니 고요하고 아무 동정이 없거늘 의아하게 생각 하고 “선생님”을 네번이나 불렀으나 응답이 없는지라 불안한 예감에 급히 문 을 떼고 들어가 보니 종사께서 미소를 띠운 얼굴로 손, 발을 펴시고 반듯 하게 누우시어 조천하신지 이미 오랬고 책상에는 여러개의 봉한 글월과 봉하지 않은 유서 두장이 있었다...” (홍암신형조천기, 44~45쪽)
“날이 저물고 길이 궁(窮)한데 인간이 어데메뇨?”
  
▲ 홍암 나철이 순명 조천한 삼성사 삼성각 내부. 지금은 단군을 가운데 모셨고, 좌우에 환인, 환웅을 모셨다. 당시 홍암은 환인을 가운데 모셨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만큼 극적인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이도 드물겠지만, 그만큼 많은 유서를 남긴 이도 거의 없을 것이다.
대종교의 법통을 이을 무원 김종헌 종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비롯해 따로 봉하여 신규식에게 전달케 한 <순명삼조> <전수도통문> <밀유> <공고교도문> <유계장사칠조>가 있고, <이세가> <중광가> <일본총리 대외에게 준 글> <조선총독 시내에게 준 글>이 있다.
또한 개별적으로 <집안에 준 글> <소운 황병욱에게 준 글> <보본 엄주천에게 준 글> <유증: 무원종사에게 보낸 유서> 등이 있다.
홍암 나철은 <순명삼조(殉命三條>에서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한배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한 오리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신도들에게 준 <공고교도문(恭告敎徒文)>에서는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비․바람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窮)한데 인간이 어데메뇨?”라고 한탄하고 “내가 간 뒤에 대종교의 일은 오직 여러분 형제자매의 힘씀으로써 이 세상에 행복될 것을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밀유(密諭)>에서는 “삼법(三法)을 힘써 행하여 욕심 물결의 가라앉음을 도모하며, 한 뜻을 확실히 세워 스스로 「깨닫는문」이 열림을 얻게 하라”고 지감, 조식, 감촉의 삼법수련을 통한 깨달음을 권유했다.
<유계장사칠조(遺誡葬事七條)>에는 “지금 조선에 이 몸을 묻을 곳이 없으니 반드시 화장(火葬)으로써 깨끗하게 할 것”과 비단과 상여, 부고, 상장 등을 금하는 청빈한 장례절차를 미리 못박아두었다.
홍암의 유서에는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보내는 글도 포함됐다. 일본 총리에게는 “슬프다. 대종은 온갖 교의 조종이어늘 도리어 무리한 업신여김을 받아서 우리 한님께 욕됨은 철의 허물이요... 철이 마땅히 한님-한배의 곁에 모시어 인간의 선악부를 살피고 천하 만대의 공론을 기다리리니 빌건대 각하는 짐작하라”고 경고했고, 조선총독에게는 “각하가 우리 대종인을 학대하려 하는가. 철의 머리는 가히 끊을지언정 三十여만 무리의 믿는 마음을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30만 신도를 내세워 압박했다.
대종교는 일제의 집중적 탄압으로 2014년 음력 5월 총본사를 백두산 북쪽 기슭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옮기고 만주지역에 동도본사(책임자 서일), 북도본사(이상설), 서도본사(신규식.이동녕)를 설치하고, 한반도에 남도본사(강우)를 둬 세를 확대했고, 이는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가 됐다.
본격화되는 대종교 무장투쟁의 전통
  
▲ 중국 화룡시 청파호 인근에 백두산을 향해 안장된 대종교 3종사 묘역. 홍암 나철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 가운데가 홍암 나철, 왼편이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 서일, 오른편이 대종교 2대 도사교 무원 김교헌 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대종교 서도본사 책임자 예관 신규식은 추도만장을 통해 “조선조 5백년 간 둘도 없는 선비요. 대종교 4천년 이후 제일의 종사다”라고 기렸고, 육당 최남선은 나철의 순교를 육신제(肉身祭)로 표현하고 이로 인해 지리멸렬하던 민족전선이 비로서 통일된 정신적 지주 또 구심점을 갖게되었다고 평가했다.
나철의 구월산 순교야말로 우리 민족혁명사상 최대결정이었고(이규성), 근대 한국의 지식인 저항운동사의 시조인 나철의 순교로 인해 우리의 독립운동이 들판의 불처럼 번져나갔다(이현익)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결코 과장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은 “나철의 자결을 통해 본격화되는 대종교 무장투쟁의 전통이, 그 집단의 오랜 전통이었다”며 “일제하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대내외에 천명한 일대사건으로써, 항일운동 본산으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총제적 저항의 사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실제로 홍암 나철의 자결 이후 대종교 무장투쟁 책임자 백포 서일(白圃 徐一, 1881.2.26~1921.8.28)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1920년 김좌진 장군의 지휘아래 청산리대첩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종교적으로도 홍암의 자결은 각별한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대종교는 홍암 나철이 조천한 음력 8월 대보름을 ‘가경절’(嘉慶節), 즉 ‘아름답고 경사스러운 날’로 부르고 3대 경절(개천절.어천절.가경절)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백포 서일은 당시 애도사를 통해 홍암의 순명을 신선들의 우화등선에 비유 우화(羽化)했다면서 ‘성통(性通)하여 하늘에 오른’ 조천(朝天)이라고 기렸다. 조천은 깨달은 이의 하늘과의 만남을 뜻한다. 슬픈 날이지만 기쁜 날로 기념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100년을 기다려온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찾아서
  
▲ 순례의 출발지 벌교 생가. 한여름 생가는 한적하기만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홍암 나철이 순명삼조를 비롯한 유서를 남기고 조천한지 100년이 지났지만,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의 역사적 위상에 걸맞는 추모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
미군정과 이승만,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남쪽에서 대종교는 발을 제대로 붙이지 못했고, 일제 후반기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무장투쟁 세력이 주류를 이룬 북쪽에서 일제 전반기 민족주의 계열 무장투쟁 세력은 이미 역사적으로 ‘극복된’ 비주류에 불과했다.
심지어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독립유공자 등급에서도 홍암 나철과 백포 서일 등 대종교 핵심지도자들은 6등급 중 3등급 서훈에 해당하는 ‘독립장’을 받았을 뿐이다.
대종교와 만남으로써 비로소 ‘중화 사관’(中華 史觀)을 넘어서 ‘대륙 사관’을 펼칠 수 있었던 단재 신채호는 100년 전 홍암 나철의 자결 소식을 베이징에서 전해듣고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애통한 심경을 남겼지만 아직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위당 정인보가 「잔억(殘憶)의 수편(數片)」이라는 글에서 단재 신채호의 도제사언문을 격찬한 대목이 남아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셈이다.
“그 뒤 상해서 고(故) 나철(羅喆) 선생을 도제(悼祭)한 사언문 일편을 보니까, 그야말로 웅기(雄奇)·연아(淵雅)의 치(致)를 다하여 우리네의 조예로는 도저히 그 온오(蘊奧)를 엿보기 어려울 만한 대가임을 놀랬다.”
도제사언문은 북한 인민대학습당에 보관된 단재 신채호 유고자료에 포함돼 있음이 김병민 전 연변대학 총장이 펴낸 『신채호 문학유고선집』(1994)에서 확인된 바 있다.
역사적 재조명을 기다리고 있는 홍암 나철의 100주기를 맞아 단재 신채호의 도제사언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고대하며, 남북관계가 개선돼 올해 개천절에는 평양 단군릉 천제는 물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홍암 나철 100주기 남북해외 합동추도식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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