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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19일 화요일

경북대 수학교실과 《경북매스매티컬저널》

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11)경북대 수학교실과 《경북매스매티컬저널》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 1958년 봄 이학 석사학위 수여식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한 안재구 선생
1956년 3월,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대학원 첫 수업 시간. 강의실에는 역시 긴장된 표정의 동기인 최태호 형과 조용 형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문리대 수학과 강사인 서태일, 엄상섭, 배미수 선배들이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수학과 박정기 주임교수님이 들어오셨다.
“여러분의 대학원 입학을 축하합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학문의 동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신입생과 또 세 분의 선생들, 그리고 저까지 포함해서 모두 7명이 앞으로 경북대 대학원 수학과의 수학교실을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연구하고, 또 그 연구 결과를 함께 토론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수학적 성과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학문하는 우리들의 기본자세일 것입니다.”
나지막하면서도 힘이 실린 교수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그랬다. 이날의 첫 만남은 학부 시절의 수업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학부 시절에는 교수님의 강의가 중심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열심히 배우는 일방향의 수업이었다면 대학원은 달랐다. 교수님의 강의는 일절 없었다. 각자 자신의 전공 분야를 정하고, 그것에 맞춰 교재를 연구하고 발표하는 것이 주된 공부 방법이었다. 수학교실이란 이름으로 매주 세미나를 여는 것이 우리들의 수업이었다.
대학원의 목적은 학문적 창조물을 연구할 능력을 갖춘 연구자를 길러내는 일이다. 대학원에 입학한 학생들의 일은 지도교수로부터 이런 기능을 학습 전수받고 학습기간 안에 이런 기능을 갖추었다는 증거물로서 논문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일방적인 강의 수업이 아닌 세미나 방식의 학습은 학습자의 능력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꼭 필요한 방식이라 하겠다. 자신의 머리로 이해하고 정리한 학습내용을 스스로 발표하는 것만큼 학습자의 실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경북대 대학원 수학과는 상당히 앞서가는 시스템을 구축해놓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는 창조적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들을 이끌어갈 역량 있는 교수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수학의 전공 분야는 그 시대의 수학 발전 수준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당시에는 해석학, 대수학, 기하학, 응용수학의 네 분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 뒤 눈부시게 수학 분야의 학문이 발전하면서 다방면으로 연구가 확대됐다. 또 그 응용이 인접과학으로 번져나가면서 전공 분야를 다 기록하지 못할 만큼 발전되었고, 새로운 분야가 창조되기도 했다.
우리 신입생들은 제각기 전공분야를 선정하고, 세 명의 선배들과 함께 공동으로 세미나 팀을 구성해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 신입생들과 세 명의 선배들의 전공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위상수학(Topology)은 서태일 선생과 배미수 선생이 전공했다.(배미수 선생은 이때부터 전공을 확률통계론으로부터 위상수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대수학(Algebra)에는 최태호 동문, 그리고 기하학(Geometry)에는 엄상섭 선생과 나 안재구, 확률통계(Probability and Statistics)는 조용 동문이었다. 경북대 수학교실은 이렇게 문을 열었다.
외국에서 대학원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온 분들로부터 들은 바, 우리 수학교실에서 공부하는 방식이 그 대학에서도 모두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옛 서양 속담에 “로마로 가는 길은 모두 같다”는 말처럼 어느 대학을 가든 같은 전공 분야의 동문이 모여 세미나 형식으로 공동학습을 하는 방법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시 우리들은 선배들처럼 학부에서 강의를 맡고 있었다. 나 역시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부터 사범대 수학과에서 좌표기하학과 사영기하학 수업을 맡았다. 그러니 1주일에 1번씩 돌아오는 세미나 발표 준비가 여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밤을 새워 가면서 즐겁게 이를 준비했다. 그만큼 공부하는 재미, 학습하는 보람이 절로 생기던 시절이었다.
각자의 전공에서 연구 성과가 하나둘씩 쌓여가자 박정기 교수님은 또 한 번의 ‘큰일’을 벌이셨다. 그것은 세미나에서 토론하고 연구한 학습 결과물을 발표할 정기간행물을 창간하는 일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다른 나라 대학의 연구 성과물을 학술잡지와 책을 통해 어렵게 구해 함께 토론하고 학습해왔다. 앞으로는 우리 힘으로 독창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잡지를 발간해 외국의 대학과 교류하는 역사적인 작업에 도전한 것이다.
마침내 1958년 1월, 《경북매스매티컬지》(KYUNGPOOK MATHEMATICAL JOURNAL, KMJ)가 창간됐다. 《경북매스매티컬지》는 국내 대학에서는 최초로 발간되는 학술잡지로 국내 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이 수학 잡지는 전 세계의 대학과 수학 전문 연구기관에 무료로 배포됐다.
외국의 대학과 연구기관에서는 동양의 작은 나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대학에서 이러한 수학 학술잡지를 발간한다는 것에 모두 놀랐다. 잡지 발행 이후 많은 나라 대학에서 학술잡지 교류를 제안해왔고, 일본, 미국, 유럽의 연구자들이 이 잡지에 논문 기고를 요청해왔다. 또 몇몇 대학과 연구기관에서는 우리 수학교실의 빈곤한 운영을 짐작하고 잡지 값을 우리에게 송금해주는 곳도 있었다.
창간 이후 매년 두 차례씩 잡지를 발간해오는 전통은 지금까지도 경북대 수학과에 이어지고 있다. 1년에 두 차례씩 발간하다보니 경북대 수학과 대학원생이나 전임교수들은 매년 논문을 써야만 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우리 동기들과 그 뒤를 이은 후배 연구자들은 누구 하나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잡지가 있다는 것이 더욱더 연구에 몰두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마침내 2년의 학습을 끝내고 최태호 형, 조용 형과 더불어 1958년 2월, 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나의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On the Projective and Conformal Transformations in the Metric Manifold with Torsion)은 《경북매스매티컬지》 창간호에 게재되었는데, 나는 이를 지금도 한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 국내 최초의 수학 학술지로 세계 유수 대학과 교류를 맺었던 경북매스매티컬저널 창간호 표지. 안재구 선생의 석사학위 논문이 실려 있다.
안재구 선생  sonkang1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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