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373인 "세월호 트라우마, '진실 규명' 없이는 못 벗어나"
성현석 기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4.08.28 01:50:09
심리학자 373명이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해야만, 유가족과 국민이 입은 심리적 상처 치료 역시 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참사 트라우마 치료와 밀접한 분야 전문가들이 집단적으로 낸 목소리라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깊다.
심리학자들이 단체 행동 나선 이유…"反치유적 상황 묵과할 수 없다"
심리학자 373명은 27일 오후 세월호 유가족들이 엿새째 농성중인 서울 청운동 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진실만이 치유할 수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날 성명에는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학자로서, 유가족을 비롯한 국민들의 비통한 심정에 깊이 공감한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정부와 정치권의 무책임하고 성의 없는 태도로 인해 유가족들의 슬픔과 분노, 좌절감이 커져만 가는 상황을 목도하며, 이러한 반(反)치유적 상황을 더 이상 묵과하기 힘들다”라는 문장도 있었다. 심리학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성명에 동참한 한 연구자는 “심리학자들이 사회 문제에 집단적으로 개입한 최초의 사례”라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는 일이, 심리학자들에게 그만큼 절박하다는 이야기다.
"죽음의 원인 밝혀야 살아남은 이들의 죄책감도 줄어든다"
심리학자들은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로 크게 세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비극적인 현실의 이유를 밝히고자 함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라는 이유다. 납득되지 않는 경험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진실을 캐내게 위한 장치, 즉 수사권과 기소권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일은 살아남은 이들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첫 걸음이라는 이유다. 가족을 잃고도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가족들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생존학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사회는, 그리고 상담 전문가들은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거듭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위로가 힘을 가지려면 명백한 ‘사실’에 기반 해야 한다. ‘사실’이 없는 ‘빈말’로 던지는 위로는 힘이 없다.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이 납득할 만한 사실을 건져내려면 수사권과 기소권이 필수다.
세 번째는 불안과 무력감, 좌절을 떨쳐내기 위해서다. 심리학자들은 이날 성명에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는 (…) 과거와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참사의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으면, 언제 또 비극이 닥칠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 세월호 참사 이후 막대한 심리적 대가를 치렀음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유가족과 상당수 국민은 무력감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대통령이 약속 지켜야 갈등과 불신 잦아들어"
이 같은 이유를 열거한 뒤, 심리학자들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는 참혹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유가족의 처절한 몸부림이자, 거대한 희생과 맞바꾼 ‘안전을 향한 절박한 바람’”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이들은 “이미 대통령은 유가족과의 면담을 통해서, 진상규명에 유가족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노라 약속한 바 있다”며 “이 약속이 지켜질 때야 비로소, 유가족의 고통과 좌절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불신 역시 잦아들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 다음은 심리학자 373명이 발표한 성명 전문.
수사권과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을 제정하라
진실만이 치유할 수 있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가 서서히 바다로 가라앉던 장면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세월호의 침몰은 유가족들에게 어떠한 고통과도 견줄 수 없는 심리적 외상을 남겼으며, 이를 지켜본 국민들 역시 유가족에 버금가는 직접적인 외상의 형태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채 피지도 못한 생명들의 죽음 앞에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뼈아픈 반성을 떨칠 수 없었으며, 대통령 또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며 철저한 진상조사와 대대적인 개혁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사고 발생 4개월이 넘은 지금, 우리는 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이 침몰하는 상황을 마주한 채, 다시금 절망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학자로서, 유가족을 비롯한 국민들의 비통한 심정에 깊이 공감한다. 또한, 우리는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유가족과 국민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요구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쟁점으로 흘러가는 지금의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자식이 죽은 이유를 밝히기 위해 40일이 넘도록 곡기를 끊고 처참하게 말라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유가족들에게 위로는커녕 더 큰 고통과 절망을 가하는 불통(不通)의 현실에 깊은 참담함을 느낀다.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정부와 정치권의 무책임하고 성의 없는 태도로 인해 유가족들의 슬픔과 분노, 좌절감이 커져만 가는 상황을 목도하며, 이러한 반(反)치유적 상황을 더 이상 묵과하기 힘들다. 이에, 373명의 심리학자들의 뜻을 모아,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력히 표명하는 바이다.
첫째, 비극적인 현실의 이유를 밝히고자 함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납득되지 않은 경험은 계속되는 고통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왜?” 라는 질문은 인간이 현실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자,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가장 적극적인 노력이다. 하지만, 우리는 세월호 침몰 후 130일이 다되도록 거대한 비극의 원인에 대해 아무런 답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 “왜, 세월호가 침몰하였는가?”, “왜, 사고 초기에 더 많은 생명을 구하지 못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현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한 현실을 극복하기란 단언코 불가능하다.
둘째, 진상규명을 통해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유가족의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덜고, 고맙게도 사고에서 살아 돌아 온 생존학생들의 고통을 줄이는 출발점이다. 유가족과 생존학생들은 소중한 가족과 친구를 잃은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으로서 극한의 상실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유가족과 생존학생들이 겪는 상실의 고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중한 가족을 잃고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가족들은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생존학생들은 곁에서 죽어간 친구들이 떠오를 때 마다 혼자 살아 남았다는 죄책감에 평생 시달릴 것이다. 우리는 이제 유가족과 생존학생들에게 “당신들의 잘못이 아닙니다”라고 거듭 말해야 한다. 또한, 세월호 사고로 깊은 외상을 입은 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스스로를 탓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 진정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명백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라는 우리의 위로는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셋째,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는 과거의 과오를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거와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참사의 인과관계를 밝히고 재발을 막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 이러한 사고가 다시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다. 이토록 끔찍한 참사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크나큰 불안과 긴장을 야기한다. 또한, 수많은 희생자를 떠나보내고 형언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안전한 사회를 갈망하게 되었다. 이는 생존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요구이자,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위대한 노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대가를 치르고도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우리의 미래는 언제 일어날지 모를 참사에 대한 불안과 함께 무력감과 좌절감이라는 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해 수사권, 기소권을 보장하라는 유가족의 요구는 결코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없다. 특별법을 통해, 우리는 다음 세대가 살아 갈 이 사회에 정당한 제도와 시스템이 정착되도록 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무참히 희생된 아이들이 아무 의미 없이 잊혀져 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아이들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의무를 다 하고자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나 이 사회의 정의와 함께 계속 살아 갈 것이다.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는 참혹한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유가족의 처절한 몸부림이자, 거대한 희생과 맞바꾼 ‘안전을 향한 절박한 바람’이다. 이미 대통령은 유가족과의 면담을 통해서, 진상규명에 유가족의 여한이 없도록 하겠노라 약속한 바 있다. 이 약속이 지켜질 때야 비로소, 유가족의 고통과 좌절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불신 역시 잦아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정부와 정치권이 이제라도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통해, 유가족과 국민의 요구에 책임 있게 응하기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2014년 8월 27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심리학자 373명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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