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15년 5월 23일 토요일

일본 덕분에 조선이 독립했다? 황당한 자화자찬


15.05.23 20:28l최종 업데이트 15.05.23 20:28l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아시아역사연대)는 국내외 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지난 4월 6일 일본 문부과학성은 2015년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아시아역사연대는 검정을 통과한 사회과(역사, 공민, 지리) 교과서 18종의 자료를 입수해 역사연구자들과 함께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아시아역사연대의 분석 결과를 몇 회에 걸쳐 전합니다. - 기자 말

전후 70년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은 끝이 났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나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전쟁을 기념한다.

패전국인 일본은 항복 선언을 한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9월 2일을 '전승기념일'로 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한국은 일제 통치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념해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명명했다.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은 때로 새로운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청일전쟁 후 조선은 처음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국 인정"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지금의 동아시아를 만든 두 전쟁이 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다. 이는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전쟁으로, 두 전쟁 모두 일본제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러일전쟁의 결과로 한반도의 지배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2015년 검정을 통과한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는 시기, 두 전쟁을 어떻게 기술하는지 살펴보았다. 교과서 분석 결과, 전반적으로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과 일본의 국제적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기사 관련 사진
▲  교과서에 실린 청일전쟁 직전의 동아시아(조선-일본-청-러시아)의 국제관계를 그린 풍자화
ⓒ 이쿠호샤

1895년 시모노세키 강화회의가 열려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는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임을 나타냈다. 이리하여 조선은 처음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이쿠호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인도와 베트남 등 구미열강의 식민지였던 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자극을 주어 민족운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일본은 새로운 제국주의국으로서 아시아 민족을 접하게 되었다.(도쿄서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기술이다. 청일전쟁은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화하려는 것에 대항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 전쟁으로 묘사되어 있다. 러일전쟁은 만주를 침략하는 러시아에 대한 조국 방위전쟁으로 설명하며, 전쟁을 단순한 방어전쟁이 아니라 아시아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을 촉진시킨 것임을 강조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유색인종의 승리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갖게 했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경향을 나타낸 교과서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한다.

'을미사변' 없애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전면에

기사 관련 사진
▲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유일한 ‘을미사변’ 기술.
ⓒ 마나비샤

일본은 청일전쟁 강화회담 이후 삼국간섭에 의해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는 정책이 좌절되자 이를 전환하기 위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역사교과서 8종 중 마나비샤 교과서 1종을 제외하고 모두 을미사변에 대한 기술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조선왕비살해사건 – 1895년 일본공사들은 러시아에 기대려는 정책을 추진하는 조선왕비를 살해하였다. 일본에 대한 비난과 반발은 강해지고, 일본의 영향력은 약해졌다.(마나비샤)

기사 관련 사진
▲  한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
ⓒ 이쿠호샤

을미사변의 기술 삭제와는 달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은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기술하고 있다. 위와 같은 서술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한국병합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처럼 이해될 소지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근대 헌법의 기초자이며, 근대국가로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일본에는 알려져 있다. 총 8종의 역사교과서 중에서 마나비샤만을 제외한 모든 교과서에서 비슷한 내용으로 기술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서 한국인 안중근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10년 정부는 한국병합을 단행하고 통치를 위해 조선총독부를 두었다. 구미열강에서도 조선반도의 문제로 일본을 간섭할 의도는 없었다.(이쿠호샤)

"36년 조선 통치로 인구 2배 되고 경작지 크게 증가"

기사 관련 사진
▲  일본어와 한글을 병용한 교과서 사진. 조선총독부는 교육 보급에 노력했음을 설명하며, 공립학교에서 일본어와 한글을 함께 가르쳤다는 설명을 덧붙임.
ⓒ 지유샤

합병 후에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철도∙관개시설을 만드는 등의 개발을 행하고, 토지조사를 실시했다. 주) 이러한 근대화에 의해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있었다. 그 외에도 조선의 전통을 무시한 여러 동화정책을 추진해 조선사람들은 일본에 반감이 강했다. 그러나 36년의 조선 통치로 인구는 2배가 되었고, 경작지도 크게 증가했다.(지유샤)

강한 권한을 가진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력으로 민중의 저항을 누르며 식민지지배를 추진했다. 주) 토지제도의 근대화를 명목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해 많은 조선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했다.(도쿄서적)

조선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한 소개와 비판을 하는 내용이다. 다수 농민의 소작인화, 해외 이주 증가를 설명하고 있지만, 토지조사사업이 근대화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기술하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드러내고 있다. 개항기 일본인 지주들의 불법적인 토지침탈과 토지조사사업 이후 일본인 토지소유가 합법화된 사실은 배제되어 있다.

2005년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과 중국의 역사 왜곡 시정 요구를 교묘하게 회피하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교과서에 담아내고 있다. 그것도 세련되고 서술의 정밀성이 높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올해 검정 통과된 교과서에서는 더욱 그 경향이 두드러진다. 전체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공과에 대한 비판의식을 겸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사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는 내용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