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영연구소의 '自由人'] "복지는 세금 환원, '공짜' 개념 불성립"
"Denn Armut ist ein großer Glanz aus Innen." 가난을 모욕하지 마라. 가난은 내면에서 비치는 위대한 빛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시에 나온 구절이다. 돈과 권력이 인간의 먹을 것을 위협할 수 있을지라도 인간의 내면의 빛을 가리지는 못한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소년 이재명. 초등학교 졸업 후 동년배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할 때 그는 더러운 회색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 프레스에 팔이 끼여 비틀어졌지만, 가난하고 무능한 자신의 탓이지 사회의 구조적 잘못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좀 더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관리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대학 4년 내내 교련복을 입고 다니며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그러던 그가 평생을 함께할 공동체를 만났다. 사법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선후배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미래의 희망을 함께 꿈꾸기에 충분했다. 경기도 성남에서 인권변호사와 시민사회 활동가로 불의와 맞서 진흙탕을 밟을 때 공동체의 변함없는 지지와 도움으로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복지를 비롯한 모든 사회서비스는 시민이 내는 '세금'을 '행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환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공짜'라는 개념이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득권과 권력층이 '복지'를 시혜적이고 소비적인 것으로 왜곡하며 스스로 정부의 역할을 외면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킨 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기본적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공적 재산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막아 시민들에게 환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그가 삶을 통해 경험한 복지의 개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가 되겠다고 나온 사람들에게 시민이 표를 주는 것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 수 있도록 불의한 세력의 힘을 조정하라는 의미다. 아울러 이를 거슬렀을 때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다.
"망가진 시스템 안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계속 무시당하고 배제당하고 박탈당한다.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중략) 지는 것도 습관이다. 지기만 하는 것은 진영 전체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철저하게 준비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대충하지는 않을 거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댓글에 가감 없이 '핵 직구'를 날리는 이재명. 그가 앞으로도 늘 시민들과 소통하며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찬란하게 밝은 빛을 비추는 일을 계속하길 바란다.
- 유년시절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본인과 가족 모두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공장 생활을 하는 중에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선택한 건가.
당시 대부분이 가난했다. 가난의 유일한 탈출구는 공부라고들 했다. 공장에서 생활하며 보낸 유년시절은 괴롭고 암울했다. 폭력이 일상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나를 두들겨 패던 공장 관리자가 고졸인 것을 보고, '나도 고졸이 되면 때리는 관리자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이후, 드디어 길이 열렸다. 81년에 본고사가 없어지면서 전국 모든 학생이 학력고사를 보게 됐고, 1등부터 64만 등까지 매겨진 점수에 따라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등 이상부터는 대학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장학제도도 생겼다. 이때 '죽도록 공부해서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이듬해 82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이게 다 전두환 장군 덕이다.(웃음) 스스로도 '전두환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다고 얘기한다.
- 초등학교 이후 오랜만에 한 공부였을 것 같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서울에 올라와 6년간 공장 생활을 했다. 1976년 딱 중고등학교 과정인 나이에, 친구들은 학교로 향할 때 나는 공장을 전전했다. 공장 생활 2년쯤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가지게 됐다. (두 팔을 뻗으며) 나는 지금도 차렷 자세가 안 된다. 한쪽 팔이 휘어서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은 해야 했으니, 불편한 몸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서 1978년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대입검정고시를 봤다. 그리고 1년간 대입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했다. 운이 좋았다.
당시 아버지, 어머니와 7남매가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형제들도 다 공장에 다녔는데, 한 데서 같이 얽혀 살면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장에서 돌아와 밤에 공부하면 식구들이 잠을 설친다고 해서 불화도 좀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그 어렵던 시기에 대학을 다니다 중퇴했는데, '공부해서 뭐하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데 별로 협조적이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에 간 뒤에야 조금 바뀌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되네?' 하고 생각한 것 같다.(웃음)
-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동안 공부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아버지도 아들이 법대에 입학했을 때는 좋아했을 것 같다.
처음부터 법대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돈을 제일 많이 주는 대학에 간 거다. 의대와 법대 중 합격선이 가장 높고 최대한 손해를 덜 보는 과를 택했다. 의대는 실습비 등 자기 돈이 많이 드는데, 법대는 그렇지 않다더라. 당시 공장 월급이 8만 원 정도였는데, 법대에 들어가면 등록금 면제에 한 달에 20만 원씩을 더 받았으니, 엄청 많이 받은 것이었다. 그 돈으로 집 생활비도 보태고, 공장 다니던 형님의 입시 공부까지 도왔다. 나름 입신양명(立身揚名)했다.
- 소위 정상적으로 열심히 공부만 해서 서울 소재 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과 다른 이력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다. 외롭지는 않았나?
외로웠다. 대학 4년은 물론 사법연수원을 마친 후에도 나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중앙대 법대는 가난해서 온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퇴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난 중·고등학교 연고도 하나 없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대학 시절을 반항적으로 보냈다. 교련복에 코트 한 벌을 걸치고 고무신 신고 4년을 다녔다.(웃음) 졸업할 때까지 사회가 낯설었다. '남의 세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에게 사법고시와 행정고시가 있다고 들은 후, 그렇게 판검사와 고위직 공무원이 되는 구나를 알게 됐다. 당연히 처음부터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법대에 간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시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 대학은 그동안 속했던 환경과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어떤 충돌을 경험했나?
대학에서 충격받은 게 하나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1980년 공장에서 일할 때 일어났는데, 당시 동료와 선후배 모두 '전라도, 나쁜 놈들이다. 폭도다. 북한과 짜고 대한민국을 폭력적 방법으로 뒤엎으려는 용공분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비난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 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하니, '내 자신이 원래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닌데, 정보의 왜곡으로 내가 나쁜 놈이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말 나쁜 짓이다.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것도 나쁜 짓이지만, 국민에게 온갖 거짓말로 속이는 것 또한 나쁜 일이다. 국민 대부분은 그렇게 왜곡된 정보 속에서 문제의식 없이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 가지는, 그동안 공장에 다니면서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돼도 피해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다른 세계에서 넓은 시야로 보니 이것 또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잘못된 사회 구조에서 개개인이 억울한 경우가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의식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내 경험을 잘 활용해 살아온 환경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 계속 공장에 있었으면, 이런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렇다. 만약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쯤 일간베스트 회원으로 살고 있을지도….(웃음) 그동안 인생을 위험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만약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면, 타고난 반항 기질 때문에 깡패가 됐을 것이다.(웃음) 물론 공장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다치고 잃은 것도 많지만, 그 짧은 시간이 오히려 인생의 자양분이 된 것 같다.
-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선후배 덕에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개인의 입신양명을 넘어 타인을 돕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계기 있나.
대학 입학이 내 인생의 제일 큰 전환이었다면, 사법연수원에서는 또 다른 변화를 겪었다. 그곳에서 '세상은 너무 이상하다. 이 이상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삶이 많이 구체화됐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하는 친구를 보며 '이건 너무 소모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중에 역량을 키워 사회 운동을 하겠다'는 (일종의 기회주의적인) 생각이 있었는데,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고 나서 새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1986년에 사법고시 합격해서 87~88년 2년 동안 사법연수원을 다녔다. 당시는 격변기로, 소위 87년 체제가 만들어지던 때였다.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함께 사법연수원 생활을 한 18기 동기들이 가장 격렬했다. 사법연수원에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량 서클' 같은 것이 있는데, 내가 좀 쓸 만해 보였는지 그 그룹에 차출당했다.(웃음) 지금 새정치민주연합 문병호 의원, 정성호 의원 등과 함께 '우리가 이 사회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자'고 결의하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지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성남으로, 문병호 의원은 부평으로, 정성호 의원은 의정부로 갔다.
- 지역에 갔을 때 준비된 게 있었나.
전혀 없었다. 다만 동기들과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고 지역에 내려갔을 때는 이미 그 지역에 자체적으로 조직된 모임이 있었다. 세미나 등 각종 모임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여러 관계가 만들어졌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노동상담소 지원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장명국 선생(현(現) <내일신문> 대표), 최영희 전 의원(구(構) 민주통합당) 등과 성남에서 첫 지역 활동을 시작했다.
- 비슷한 뜻을 가진 동료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덜 외롭다'는 뜻이다. 혼자였다면 두렵고 불안했을 텐데, 동료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때 '변호사 하면 최소한 밥은 먹고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런 자신감에 1988년 사법연수원 시절 학회에서 기수들끼리 '정기승 대법원장 인준 반대 서명 운동'을 했는데, 성명서를 내가 썼다. 잘릴 각오를 하고 쓴 건데, 다행히 잘리지는 않았다.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조직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많은 힘이 되고 있다.
-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성남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의 위협, 따돌림, 비난, 오해, 경제적 어려움 등을 감수해야 했을 텐데, 그럼에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
한번 시작했는데, 자존심이 있지 중간에 멈출 수는 없지 않나. 흔히 쓰는 말로, '곤조(일본어로, '근성(根性)'에서 나온 말)'라고 해야 할까? 고집이 셌던 것 같다. 끝을 보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면 그동안의 삶이 너무 허망해질 것 같았다. 내가 좀 집요한 면이 있다. '뒤끝 작렬'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책임에 관해서는 끝까지 묻고, 받은 건 (좋은 쪽으로) 반드시 갚아 준다'는 게 내 신념이다. 주변 관계도 그렇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시민운동을 할 때는 실질적인 위협이 있었다. 2002년 분당 파크뷰 개발 특혜를 폭로했다고, 첫 번째로 구속됐다. 그 뒤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6연발 가스총을 소지하고 다닌 적도 있다. 물론 총기 소지 허가를 받았다. 가스총을 아주 비싼 값에 사서 양복 뒷주머니에 차고 다녔다. 새벽마다 전화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은 '눈감아주면 20억 원을 주겠다'고 회유하더라. 그때마다 불안하고 힘들었지만, '하던 일은 마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끝장을 봤다. 결과적으로 나도 감옥 가고 저들도 감옥 갔다. (웃음). 나는 잠깐 가고 저들은 길게 가고.(일동 웃음)
이 과정에서 결국 '사회적 부(副)'라고 하는 것이 '누군가가 대규모의 이익을 취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조용히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진짜 노동을 해서 부가가치가 생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공짜'란 없다. 내게 20억 원을 주겠다고 회유한 사람들의 사업을 계산해보니, 그들이 얻은 이익만 약 3~4000억 원이더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등 재벌 3세들이 겨우 몇백 억 원의 세금을 내고 몇조 원의 이익을 얻는데,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이런 일을 용서하면 안 된다. 돈은 곧 '마귀'다. 이런 이야기를 평소에도 한다. '돈과 업자는 천사의 얼굴을 한 마귀다.' 평소엔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은 성완종과 같은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이게 바로 돈의 본질이다.
- 2004년 성남시장 출마를 시작으로, 2007년 민주당 부대변인 역임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사법과 시민운동의 길에서 정치행정가로 전환한 계기는?
결정적 계기는 2002년 수정·중원구 등 본 시가지 종합병원 폐업으로부터 시작된 성남 시립의료원 문제였다.(2003.12.29 주민 1만 8595명이 성남시 지방공사의료원 조례 제정 발의) 당시 성남에 50만 명이 살았는데, 병원 두 개가 문을 닫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돈이 안 되니까 철수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공병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립의료원 설립운동을 시작했다.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정말 어렵게 시립의료원 설립조례 주민발의를 위해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싸웠는데, 시의회 의원들이 47초 만에 날치기로 부결시키고 도망갔다. 당시 방청하고 있던 우리 모두 울고불고, 책상 위로 뛰어 올라가 명패도 던지며 도망가는 의원을 잡으려고 쫓아 다녔다. 그 모습을 한 기자가 찍었고, 내가 대표로 특수공무집행방해·재물손괴·치상 등의 이유로 수배됐다.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 내 인생을 명확하게 결정한 날이었다. 수배 중이라 주민교회 지하실에 숨어 있었는데, 당시 보건의료노조 간부였던 선배와 초밥을 같이 먹으며 억울한 마음에 울다가 '그냥 우리가 시장이 돼서 직접 만들자!'고 결심했다. 내 목표는 분명했다. 성남에 공공의료원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2005년부터 조직 활동을 시작해 무소속으로 돌파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2005년 당시에는 정당공천이 없었던 시의원도 공천을 받도록 제도가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리가 열린우리당을 점령하자'며 용기백배해서, 성남에서 5300명 당원을 조직해 입당했다. 지금은 새누리당 소속인 신영수 전 성남시장 후보(현(現) 성남발전연합 상임대표)가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하려다가 중간에 포기해 2006년 출마할 때는 당에서 후보가 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가 노무현 정권 말기였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으로 나와 봤자 떨어질 게 뻔해서 다들 출마를 하지 않은 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는 '뭐, 이렇게 널널하고 쉽노?' 하면서 돌진했다.(일동 웃음) 결국 득표율 27퍼센트(%)로 떨어졌다. 우린 이 일을 지금도 '대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2010년에 시장이 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1월, 10년 만에 내 손으로 시립의료원을 착공했다. 내후년이면 완공된다. 우연인지 몰라도, 시립의료원 착공 시기가 홍준표 경남지사가 진주의료원을 없앨 때였다. 그래서 의료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성남과 진주가 자주 비교됐다.
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치적은 정치제도의 개혁을 통해 나 같은 사람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첫 번째는 '기간당원제'라는 제도를 통해 정당이 민주화된 것이다. 두 번째는 '선거공영제'로, 일정 수치 이상 득표하면 선거 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크게 손해 보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제도개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정치 부패의 고리를 하나 끊어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인권변호사 시절, '형식적으로나마 법률과 상식을 지키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도록 하자'고 결심했다. 시민운동은 그 내용을 채우는 일이었고, 정치인은 이 일을 현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자리다.
- 공공의료원 설립은 본인의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나.
법률을 전공한 사람으로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법에 관심이 있었고,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에게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인간 사회가 동물 사회와 다른 것은 '절제'인데, 욕망은 개별적 선택만으로는 절제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은 정치나 행정, 실력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다. 인간 다수를 모두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헌법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인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은 의식주 해결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의식주를 포함하여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정말, 말도 안 되는데…) 진실처럼 유통되는 신화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의료원 문제다. 의료는 당연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또 의료기관은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구성원이 최소한의 삶을 위해서는 먹고 자고 입어야 하는데, 거기에 더 중요한 것이 건강을 잃었을 때 다시 건강한 삶을 되찾게 해주는 의료 문제다. 이것은 국가의 의무다.
현 정부는 보통 사람의 건강 증진에 대해서는 열심히 연구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공원과 체육시설을 만들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일 등. 그런데 정작 국민이 건강을 잃었을 때 돈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참, 이상하다. 후자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더구나 민간에서 의료비를 커버할 수 없으면, 공공에서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의료가 돈벌이 영역으로 치환되면 안 된다.
이런 기본적인 사고로, 시립의료원 설립 운동을 시작했고 하다 보니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 유럽은 공공의료 비중이 70%가 넘고 영국은 90%다. 미국이나 멕시코 같은 국가도 30%가 넘는데, 정작 한국은 10%다. 요즘은 더 떨어져서 9.8% 정도다. 공공의료 비중이 낮아도 너무 낮다. 이제는 국민이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이 좋은 병원에 가는 것은 자유지만, 최소한의 의료는 제공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기본적인 식(食)을 제공하면서, 왜 치료는 안 해주나.
- '무상의료, 공공의료' 정책은 의료 행위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이익과 대치되는 주장이라 반대가 심하지 않나.
보통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들은 동의한다. 일반 의사들은 의견이 나뉜다. 물론 그들에게는 의료 행위가 먹고사는 수단이니 이해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의료 영역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과다 확장한 게 문제다. 하다하다 안되니 원격진료다, 법인화다 하면서 다른 의료 행위마저 잠식하려 한다. 일반 환자는 물론, 극소수 자본화된 의료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의료인도 피해자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 의사들 사이에서도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시립의료원 설립 운동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오히려 일반 시민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시립의료원이라고 이야기하면 자꾸 시골의 2층짜리 회색건물을 상상한다. 싸구려 더러운 시설에 무능한 의사가 있는 곳으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공공의료가 점점 더 낙후되고 죽어간다. 이처럼 부정적 현실과 인식의 반복으로 인해 공공의료는 싸구려, 불친절, 더러운 곳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인식을 깨고 공공의료를 확충하려고 했다. 공공의료기관 의료인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고 양심에 따라 진료할 수 있게 하면, 의료인도 자부심을 가지고 하지 않겠나. 그러나 일부 공공의료의 현실은 매출을 얼마나 올리는지에만 혈안이 돼서 이틀만 먹으면 될 약을 열흘 또는 한 달 치를 처방한다. 매출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겨 의료인을 노예화하는 셈이다. 이건 비정상적이다.
-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교복, 무상산후조리원' 등 전면적인 무상복지를 실현하고자 한다. 복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설명해 달라.
복지를 비롯한 모든 사회서비스는 시민이 내는 '세금'을 '행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환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공짜'라는 개념이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득권과 권력층이 '복지'를 시혜적이고 소비적인 것으로 왜곡하며 스스로 정부의 역할을 외면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킨 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기본적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공적 재산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막아 시민들에게 환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 현재 정치, 경제, 복지, 외교, 역사, 문화, 스포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본인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인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가능한 원천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일단 주변의 조언을 많이 듣는다. 토론도 자주 한다. 뭐든지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공부한 다음, 지지 않을 싸움만 골라서 하는 편이다.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작은 승리를 많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는 것도 습관이다. 지기만 하는 것은 진영 전체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철저하게 준비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물론 불가피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준비를 잘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을 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지는 싸움은 피하고, 철저하게 준비해 이기는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대충하지는 않을 거다.
-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저지르면, 사람들이 '저 사람 혹시 사고치는 것 아냐?'라고 불안해하며 돕지 않는다. 그러나 준비를 철저히 하고 경험을 충분히 한 사람에게는 분명 '도움'이 온다.
- "부정부패의 구조를 극복하고 노력만큼의 성과가 보장되는 정상적인 사회,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가 최대한 관철되는 민주적인 사회"(이재명 시장 블로그 중)를 꿈꾼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 충분히 경험한 바 없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종교, 도덕, 법률, 정치 영역 모두 근본에서는 큰 차이 없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도 결국 '인간 존중'을 출발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인류 5000년 역사에서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통치 시스템 중 민주주의가 가장 잘 만들어진 제도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한 사람을 그 체제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데 가치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사람을 귀히 여길 뿐 아니라,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이다. 그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그런데 모두가 주권자로 정치에 참여하기 어려우니까 대리인 제도를 둔 것이고, 다수결을 택한 것이다. 대리인의 제1 의무는 구성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며, 그 사회의 최종 목표는 구성원 최대 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구성원 개개인에게 '희망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이 자원이나 부(富),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야 된다. 이는 곧, 실질적 평등을 의미한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라는 측면에서 실질적 평등이 이뤄지는 사회가 돼야 구성원도 가능성을 갖고 꿈꿀 수 있다. 개개인이 꿈과 열정을 갖고 살아갈 때 사회도 국가도 건강해진다. 자원이나 부를 소수가 독점해버리면 개인도 엄청나게 불행하지만, 그 체제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기회의 균등·실질적 평등·출발점에서의 평등이다. 물론 실현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되게 해야 한다.
- 시장이라는 행정가의 위치에서 본인의 철학을 담은 정책을 마음껏 실현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국회의원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까?
어디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 그리고 앞으로 국회의원이나 다른 공직을 맡더라도 차이를 못 느낄 것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다. '불법적인 일이나 나쁜 짓만 아니면 다 하겠다'는 말이다. 지금 시장직도 운동하듯이 한다. 정치가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가로, 모든 사람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 자체가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신 난다. 그들에게 꿈을 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보람이다.
'시장'직은 수단에 불과하다. 실제로도 시민단체 집행위원장할 때보다 조금 낫더라. 상근 근무자 한 명과 연간 예산 2500~3000만 원 정도로, 여러 일을 했다. 지금은 상근자만 3000명 이상이고 예산은 2조4000억 원이나 되니,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 이런 측면에서 '시장'직이라는 유용한 수단 하나를 확보한 것이다. 이것뿐이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손에 든 무기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생각보다 개인의 역할이 크다고 확신한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몫도 엄청 크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공장노동자로,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빽(?)도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갖고 있었던 것은 다만,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한 명이 한 명을 설득해 같이 하면 두 명이 되고, 이렇게 모여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한다. 정책 하나를 결정할 때 구성원 모두가 n분의 1로 결정 권한을 갖는 게 아니다. 다수는 무관심하지만, 소수의 관심 있는 사람들이 경합해 그 중 센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관심 있는 소수, 옳은 생각을 가진 소수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요즘 SNS를 열심히 하는 이유다. 트위터(11만여 명)와 페이스북(2만 8000여 명) 팔로워 덕에 이제는 웬만한 언론사 하나쯤의 공격은 반격할 수 있다.
- 지난 2월 SNS에서 "여당은 권력을 이용해 제 지지층만 챙기는데, 야당이 계속 지지층을 잃어가면서 여당지지층을 배려하면 승부는 이미 끝난 거다"라며, 여야 모두를 비판했다. 양대 정당의 기득권 구조를 만든 정치제도, 특히 선거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난해 '정당공천제' 논란 당시 생각이 정리됐다. 수도권은 잘못된 정치제도의 피해가 작은 편으로, 공천받은 사람들끼리 실질적인 경쟁이 이뤄지기 때문에 공천제가 지속 가능하다. 하지만 실질적 경쟁이 없는 지역에서는 공천제를 폐지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영호남에서 특정 정당이 공천을 하면 100% 당선이 되는데, 정당 공천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기들끼리 시장이며 군수며, 마음대로 결정하는 공천은 하지 않느니만 못 하다. 이는 민의를 왜곡하는 수단이다.
현 소선거구제가 갖는 문제가 워낙 크다. 영호남 공천자는 바로 당선되기 때문에, 공천만으로 국회의원이 사실상 결정되는 정당 내 구조가 보완돼야 한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비례대표제 확대안'이 좋다고 생각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2월 국회에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제안했는데, 내 생각에는 선관위의 안보다는 전국 차원의 비례대표 방식인 독일식 선거제도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국회 차원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선관위가 제안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로라도 바꿀 생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선거제도에서 대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장점이 많은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을 반영하지 않고 당의 눈치만 본다는 것은 국민의 의사를 배반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 점을 고쳐야 하는데, 결국 (하나마나하는 소리 같지만) 국민이 해야 된다. 또 향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강력하게 쟁점화해야 실현할 수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의원과 함께 지난달 10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2017년 대선 후보군(차기 정치 지도자)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랐다. 기분이 어땠나.
미국 출장 중이었는데, 지인에게 문자가 왔더라. 그래서 '장난치고 있네!'라며 가볍게 답장했다. 그런데 귀국 후 관련 기사를 찾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좀 빨리 이름이 거론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웃음) 유권자들이 대선에 벌써 관심을 두는 건가 싶어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좋기도 했다. 대선 후보군에 이름이 올라서 좋기보다는, 내 스피커가 좀 더 커졌다는 측면에서 좋다는 뜻이다. 세상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 크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군인에게 총이 있다면, 정치인에게는 입이 있다. 정치인에게 말은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스피커가 커졌으니(영향력이 늘었으니),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일이기도 하고. 그것 말고는 변한 게 없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직까지도 민주적 마인드, 시민 의식이 상당히 부족한 것 같다. 이런 인식이 어쩌면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 부족해지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며, 자신이 무능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지. 이것이 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는지, 왜 나한테 불리하고 특정 소수에게는 유리한 시스템이 됐는지 생각 못하고 있다.
망가진 시스템 안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계속 무시당하고 배제당하고 박탈당한다.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게,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구조를 만드는 것도 개인의 몫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개인적 노력도 매우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내 삶의 조건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실망하기 전에 한 번 되돌아보고, 작은 관심과 참여를 통해 삶의 조건을 바꿔야 한다.
사실 이것은 젊은 청년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전 세대가, 특히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교육을 통해 '공공의 이익(공리, 公理)이 개인적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예기하고 토론하며 실험도 계속해야 한다.
- 어렵고 힘든 시절 자살을 기도했다고 들었다.
주변에서 이 얘기는 너무 살벌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라.(웃음) 그래도, 뭐…. 어느 순간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끼어 팔이 비틀렸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라. 암울했다. 더러운 회색 작업복이 아닌 깨끗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볼 때 너무 부러웠다. 삶이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것 같아 두 번 정도 시도했는데, 안 되더라. 진짜 죽으려고 했다면 죽었을 텐데, 덜 힘들게 죽으려고 하니까 잘 안된 것 같다.(웃음) 그 당시는 너무나 힘들어 시도한 것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축복이다.
- 인간이라 갖게 되는 열등감, 자신 없음,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 등 내적 고민은 어떻게 극복하는 편인가.
나는 열등감을 느낄 요소가 많다. 장애인이고, 중·고등학교도 못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것 하나하나가 나의 재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일은 다 양면이 있다. 음지만큼 양지가 있고, 산이 높은 만큼 골의 깊이가 있는 것이다. 나쁜 것과 비슷한 양만큼 어딘가에 좋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어떤 나쁜 상황에도 좋은 요소를 찾아 잘 활용한다.
의식 속에 존재하는 열등감만큼 무의식 속에 똑같은 크기의 우월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악조건이 닥쳐도 별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난 공격을 당하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한다. 진짜 위기는 기회다. 오히려 가능성이 더 많아지지 않나. 통상적으로 좋은 측면에는 기회가 별로 없다. 누가 나한테 '종북'이라고 하면, 나는 달려든다.(웃음)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 우리의 주력지(主力地)인 것이다. 피하지 않는다. 이게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그럼, 딴 거 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떠날 것이다.
- 이재명에게 자유란?
간절히 바라고 꿈꾸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자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유롭다. 시장직 또한 자유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에 언제든 버릴 수 있다. 대체 가능한 다른 수단이 생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현재에 미련이 크게 없다. 그러니까 용감하다. 무언가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연연하는 순간, 정상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에 뭐 할래?'라고 묻는다. 나도 모른다. 그때 가서 가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삶의 큰 방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강을 만나면 배를 타고 들을 만나면 말을 타고 가면 된다.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정한다고 내 마음대로 되나?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방향만 정하고 최선을 다하면, 길이 생기고. 그러다 죽을 때쯤 '그동안의 삶이 창피하진 않았네'라는 생각이 들면, '잘 살았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비례대표제포럼 손어진 간사가, 정리는 손어진 간사와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소년 이재명. 초등학교 졸업 후 동년배들은 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할 때 그는 더러운 회색 작업복을 입고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 프레스에 팔이 끼여 비틀어졌지만, 가난하고 무능한 자신의 탓이지 사회의 구조적 잘못이란 것을 그때는 몰랐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좀 더 높은 자리에서 사람을 부릴 수 있는 관리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대학 4년 내내 교련복을 입고 다니며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그러던 그가 평생을 함께할 공동체를 만났다. 사법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선후배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미래의 희망을 함께 꿈꾸기에 충분했다. 경기도 성남에서 인권변호사와 시민사회 활동가로 불의와 맞서 진흙탕을 밟을 때 공동체의 변함없는 지지와 도움으로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복지를 비롯한 모든 사회서비스는 시민이 내는 '세금'을 '행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환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공짜'라는 개념이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득권과 권력층이 '복지'를 시혜적이고 소비적인 것으로 왜곡하며 스스로 정부의 역할을 외면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킨 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기본적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공적 재산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막아 시민들에게 환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그가 삶을 통해 경험한 복지의 개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대표가 되겠다고 나온 사람들에게 시민이 표를 주는 것은,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고귀하게 살 수 있도록 불의한 세력의 힘을 조정하라는 의미다. 아울러 이를 거슬렀을 때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다.
"망가진 시스템 안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계속 무시당하고 배제당하고 박탈당한다.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중략) 지는 것도 습관이다. 지기만 하는 것은 진영 전체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철저하게 준비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대충하지는 않을 거다."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댓글에 가감 없이 '핵 직구'를 날리는 이재명. 그가 앞으로도 늘 시민들과 소통하며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찬란하게 밝은 빛을 비추는 일을 계속하길 바란다.
- 유년시절부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본인과 가족 모두 노동자의 삶을 살았다. 공장 생활을 하는 중에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한 수단으로, 공부를 선택한 건가.
당시 대부분이 가난했다. 가난의 유일한 탈출구는 공부라고들 했다. 공장에서 생활하며 보낸 유년시절은 괴롭고 암울했다. 폭력이 일상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나를 두들겨 패던 공장 관리자가 고졸인 것을 보고, '나도 고졸이 되면 때리는 관리자가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이후, 드디어 길이 열렸다. 81년에 본고사가 없어지면서 전국 모든 학생이 학력고사를 보게 됐고, 1등부터 64만 등까지 매겨진 점수에 따라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등 이상부터는 대학 등록금을 면제해주는 장학제도도 생겼다. 이때 '죽도록 공부해서 대학에 가겠다'는 생각으로 이듬해 82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이게 다 전두환 장군 덕이다.(웃음) 스스로도 '전두환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녔다고 얘기한다.
- 초등학교 이후 오랜만에 한 공부였을 것 같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서울에 올라와 6년간 공장 생활을 했다. 1976년 딱 중고등학교 과정인 나이에, 친구들은 학교로 향할 때 나는 공장을 전전했다. 공장 생활 2년쯤 사고를 당해 장애를 가지게 됐다. (두 팔을 뻗으며) 나는 지금도 차렷 자세가 안 된다. 한쪽 팔이 휘어서 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은 해야 했으니, 불편한 몸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서 1978년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 대입검정고시를 봤다. 그리고 1년간 대입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했다. 운이 좋았다.
당시 아버지, 어머니와 7남매가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형제들도 다 공장에 다녔는데, 한 데서 같이 얽혀 살면서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장에서 돌아와 밤에 공부하면 식구들이 잠을 설친다고 해서 불화도 좀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그 어렵던 시기에 대학을 다니다 중퇴했는데, '공부해서 뭐하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데 별로 협조적이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에 간 뒤에야 조금 바뀌었다. '기대도 안 했는데, 되네?' 하고 생각한 것 같다.(웃음)
- 1982년 중앙대 법학과에 들어갔다. 그동안 공부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던 아버지도 아들이 법대에 입학했을 때는 좋아했을 것 같다.
처음부터 법대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돈을 제일 많이 주는 대학에 간 거다. 의대와 법대 중 합격선이 가장 높고 최대한 손해를 덜 보는 과를 택했다. 의대는 실습비 등 자기 돈이 많이 드는데, 법대는 그렇지 않다더라. 당시 공장 월급이 8만 원 정도였는데, 법대에 들어가면 등록금 면제에 한 달에 20만 원씩을 더 받았으니, 엄청 많이 받은 것이었다. 그 돈으로 집 생활비도 보태고, 공장 다니던 형님의 입시 공부까지 도왔다. 나름 입신양명(立身揚名)했다.
- 소위 정상적으로 열심히 공부만 해서 서울 소재 대학교에 들어온 학생들과 다른 이력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다. 외롭지는 않았나?
외로웠다. 대학 4년은 물론 사법연수원을 마친 후에도 나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시 중앙대 법대는 가난해서 온 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퇴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난 중·고등학교 연고도 하나 없이 전혀 다른 세계에서 대학 시절을 반항적으로 보냈다. 교련복에 코트 한 벌을 걸치고 고무신 신고 4년을 다녔다.(웃음) 졸업할 때까지 사회가 낯설었다. '남의 세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에게 사법고시와 행정고시가 있다고 들은 후, 그렇게 판검사와 고위직 공무원이 되는 구나를 알게 됐다. 당연히 처음부터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법대에 간 것은 아니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취직이 안 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시 공부만이 살 길이었다.
- 대학은 그동안 속했던 환경과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어떤 충돌을 경험했나?
대학에서 충격받은 게 하나 있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1980년 공장에서 일할 때 일어났는데, 당시 동료와 선후배 모두 '전라도, 나쁜 놈들이다. 폭도다. 북한과 짜고 대한민국을 폭력적 방법으로 뒤엎으려는 용공분자'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비난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 후,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하니, '내 자신이 원래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닌데, 정보의 왜곡으로 내가 나쁜 놈이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말 나쁜 짓이다. 사람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하는 것도 나쁜 짓이지만, 국민에게 온갖 거짓말로 속이는 것 또한 나쁜 일이다. 국민 대부분은 그렇게 왜곡된 정보 속에서 문제의식 없이 자신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 가지는, 그동안 공장에 다니면서 산업재해로 장애인이 돼도 피해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다른 세계에서 넓은 시야로 보니 이것 또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면서 '잘못된 사회 구조에서 개개인이 억울한 경우가 많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의식화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내 경험을 잘 활용해 살아온 환경 자체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 계속 공장에 있었으면, 이런 인식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렇다. 만약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지금쯤 일간베스트 회원으로 살고 있을지도….(웃음) 그동안 인생을 위험하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만약 정상적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면, 타고난 반항 기질 때문에 깡패가 됐을 것이다.(웃음) 물론 공장 생활을 하면서 여기저기 다치고 잃은 것도 많지만, 그 짧은 시간이 오히려 인생의 자양분이 된 것 같다.
-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선후배 덕에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개인의 입신양명을 넘어 타인을 돕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계기 있나.
대학 입학이 내 인생의 제일 큰 전환이었다면, 사법연수원에서는 또 다른 변화를 겪었다. 그곳에서 '세상은 너무 이상하다. 이 이상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삶이 많이 구체화됐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하는 친구를 보며 '이건 너무 소모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중에 역량을 키워 사회 운동을 하겠다'는 (일종의 기회주의적인) 생각이 있었는데, 사법연수원에 들어가고 나서 새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1986년에 사법고시 합격해서 87~88년 2년 동안 사법연수원을 다녔다. 당시는 격변기로, 소위 87년 체제가 만들어지던 때였다.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함께 사법연수원 생활을 한 18기 동기들이 가장 격렬했다. 사법연수원에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량 서클' 같은 것이 있는데, 내가 좀 쓸 만해 보였는지 그 그룹에 차출당했다.(웃음) 지금 새정치민주연합 문병호 의원, 정성호 의원 등과 함께 '우리가 이 사회에서 모종의 역할을 하자'고 결의하고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하기 위해 지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성남으로, 문병호 의원은 부평으로, 정성호 의원은 의정부로 갔다.
- 지역에 갔을 때 준비된 게 있었나.
전혀 없었다. 다만 동기들과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하고 지역에 내려갔을 때는 이미 그 지역에 자체적으로 조직된 모임이 있었다. 세미나 등 각종 모임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과 여러 관계가 만들어졌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노동상담소 지원 활동을 하며 알게 된 장명국 선생(현(現) <내일신문> 대표), 최영희 전 의원(구(構) 민주통합당) 등과 성남에서 첫 지역 활동을 시작했다.
- 비슷한 뜻을 가진 동료를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덜 외롭다'는 뜻이다. 혼자였다면 두렵고 불안했을 텐데, 동료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사법연수원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때 '변호사 하면 최소한 밥은 먹고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싶었다. 그런 자신감에 1988년 사법연수원 시절 학회에서 기수들끼리 '정기승 대법원장 인준 반대 서명 운동'을 했는데, 성명서를 내가 썼다. 잘릴 각오를 하고 쓴 건데, 다행히 잘리지는 않았다. 연수원에서 만난 동료와 조직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게 많은 힘이 되고 있다.
-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성남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의 위협, 따돌림, 비난, 오해, 경제적 어려움 등을 감수해야 했을 텐데, 그럼에도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
한번 시작했는데, 자존심이 있지 중간에 멈출 수는 없지 않나. 흔히 쓰는 말로, '곤조(일본어로, '근성(根性)'에서 나온 말)'라고 해야 할까? 고집이 셌던 것 같다. 끝을 보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면 그동안의 삶이 너무 허망해질 것 같았다. 내가 좀 집요한 면이 있다. '뒤끝 작렬'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책임에 관해서는 끝까지 묻고, 받은 건 (좋은 쪽으로) 반드시 갚아 준다'는 게 내 신념이다. 주변 관계도 그렇고, 작은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결국 '사회적 부(副)'라고 하는 것이 '누군가가 대규모의 이익을 취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 주머니에서 조용히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진짜 노동을 해서 부가가치가 생기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부당하게 이익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공짜'란 없다. 내게 20억 원을 주겠다고 회유한 사람들의 사업을 계산해보니, 그들이 얻은 이익만 약 3~4000억 원이더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등 재벌 3세들이 겨우 몇백 억 원의 세금을 내고 몇조 원의 이익을 얻는데, 절대로 '공짜'가 아니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이런 일을 용서하면 안 된다. 돈은 곧 '마귀'다. 이런 이야기를 평소에도 한다. '돈과 업자는 천사의 얼굴을 한 마귀다.' 평소엔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은 성완종과 같은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이게 바로 돈의 본질이다.
- 2004년 성남시장 출마를 시작으로, 2007년 민주당 부대변인 역임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됐다. 사법과 시민운동의 길에서 정치행정가로 전환한 계기는?
결정적 계기는 2002년 수정·중원구 등 본 시가지 종합병원 폐업으로부터 시작된 성남 시립의료원 문제였다.(2003.12.29 주민 1만 8595명이 성남시 지방공사의료원 조례 제정 발의) 당시 성남에 50만 명이 살았는데, 병원 두 개가 문을 닫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돈이 안 되니까 철수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공병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립의료원 설립운동을 시작했다.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정말 어렵게 시립의료원 설립조례 주민발의를 위해 1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싸웠는데, 시의회 의원들이 47초 만에 날치기로 부결시키고 도망갔다. 당시 방청하고 있던 우리 모두 울고불고, 책상 위로 뛰어 올라가 명패도 던지며 도망가는 의원을 잡으려고 쫓아 다녔다. 그 모습을 한 기자가 찍었고, 내가 대표로 특수공무집행방해·재물손괴·치상 등의 이유로 수배됐다.
2004년 3월 28일 오후 5시. 내 인생을 명확하게 결정한 날이었다. 수배 중이라 주민교회 지하실에 숨어 있었는데, 당시 보건의료노조 간부였던 선배와 초밥을 같이 먹으며 억울한 마음에 울다가 '그냥 우리가 시장이 돼서 직접 만들자!'고 결심했다. 내 목표는 분명했다. 성남에 공공의료원을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2005년부터 조직 활동을 시작해 무소속으로 돌파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2005년 당시에는 정당공천이 없었던 시의원도 공천을 받도록 제도가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우리가 열린우리당을 점령하자'며 용기백배해서, 성남에서 5300명 당원을 조직해 입당했다. 지금은 새누리당 소속인 신영수 전 성남시장 후보(현(現) 성남발전연합 상임대표)가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하려다가 중간에 포기해 2006년 출마할 때는 당에서 후보가 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가 노무현 정권 말기였기 때문에 열린우리당으로 나와 봤자 떨어질 게 뻔해서 다들 출마를 하지 않은 거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는 '뭐, 이렇게 널널하고 쉽노?' 하면서 돌진했다.(일동 웃음) 결국 득표율 27퍼센트(%)로 떨어졌다. 우린 이 일을 지금도 '대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2010년에 시장이 됐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13년 11월, 10년 만에 내 손으로 시립의료원을 착공했다. 내후년이면 완공된다. 우연인지 몰라도, 시립의료원 착공 시기가 홍준표 경남지사가 진주의료원을 없앨 때였다. 그래서 의료공공성을 강화하려는 성남과 진주가 자주 비교됐다.
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치적은 정치제도의 개혁을 통해 나 같은 사람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첫 번째는 '기간당원제'라는 제도를 통해 정당이 민주화된 것이다. 두 번째는 '선거공영제'로, 일정 수치 이상 득표하면 선거 비용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크게 손해 보지 않고, 정치를 할 수 있게 된다. 단순한 제도개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정치 부패의 고리를 하나 끊어낸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인권변호사 시절, '형식적으로나마 법률과 상식을 지키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도록 하자'고 결심했다. 시민운동은 그 내용을 채우는 일이었고, 정치인은 이 일을 현실에서 실행할 수 있는 자리다.
- 공공의료원 설립은 본인의 철학에 기반을 둔 것이었나.
법률을 전공한 사람으로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법에 관심이 있었고, 스스로도 사회적 약자에게 기여하는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인간 사회가 동물 사회와 다른 것은 '절제'인데, 욕망은 개별적 선택만으로는 절제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은 정치나 행정, 실력으로 제압할 수밖에 없다. 인간 다수를 모두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 헌법적인 의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인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은 의식주 해결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다. 의식주를 포함하여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정말, 말도 안 되는데…) 진실처럼 유통되는 신화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의료원 문제다. 의료는 당연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고, 또 의료기관은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구성원이 최소한의 삶을 위해서는 먹고 자고 입어야 하는데, 거기에 더 중요한 것이 건강을 잃었을 때 다시 건강한 삶을 되찾게 해주는 의료 문제다. 이것은 국가의 의무다.
현 정부는 보통 사람의 건강 증진에 대해서는 열심히 연구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공원과 체육시설을 만들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일 등. 그런데 정작 국민이 건강을 잃었을 때 돈 없이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참, 이상하다. 후자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더구나 민간에서 의료비를 커버할 수 없으면, 공공에서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의료가 돈벌이 영역으로 치환되면 안 된다.
이런 기본적인 사고로, 시립의료원 설립 운동을 시작했고 하다 보니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됐다. 유럽은 공공의료 비중이 70%가 넘고 영국은 90%다. 미국이나 멕시코 같은 국가도 30%가 넘는데, 정작 한국은 10%다. 요즘은 더 떨어져서 9.8% 정도다. 공공의료 비중이 낮아도 너무 낮다. 이제는 국민이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이 좋은 병원에 가는 것은 자유지만, 최소한의 의료는 제공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기본적인 식(食)을 제공하면서, 왜 치료는 안 해주나.
- '무상의료, 공공의료' 정책은 의료 행위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이익과 대치되는 주장이라 반대가 심하지 않나.
보통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들은 동의한다. 일반 의사들은 의견이 나뉜다. 물론 그들에게는 의료 행위가 먹고사는 수단이니 이해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의료 영역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과다 확장한 게 문제다. 하다하다 안되니 원격진료다, 법인화다 하면서 다른 의료 행위마저 잠식하려 한다. 일반 환자는 물론, 극소수 자본화된 의료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의료인도 피해자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 의사들 사이에서도 넓은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시립의료원 설립 운동 중 가장 어려웠던 일은 오히려 일반 시민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시립의료원이라고 이야기하면 자꾸 시골의 2층짜리 회색건물을 상상한다. 싸구려 더러운 시설에 무능한 의사가 있는 곳으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공공의료가 점점 더 낙후되고 죽어간다. 이처럼 부정적 현실과 인식의 반복으로 인해 공공의료는 싸구려, 불친절, 더러운 곳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 인식을 깨고 공공의료를 확충하려고 했다. 공공의료기관 의료인에게 월급도 제대로 주고 양심에 따라 진료할 수 있게 하면, 의료인도 자부심을 가지고 하지 않겠나. 그러나 일부 공공의료의 현실은 매출을 얼마나 올리는지에만 혈안이 돼서 이틀만 먹으면 될 약을 열흘 또는 한 달 치를 처방한다. 매출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겨 의료인을 노예화하는 셈이다. 이건 비정상적이다.
- '무상급식, 무상교육, 무상교복, 무상산후조리원' 등 전면적인 무상복지를 실현하고자 한다. 복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설명해 달라.
복지를 비롯한 모든 사회서비스는 시민이 내는 '세금'을 '행정'이라는 수단을 통해 환원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공짜'라는 개념이 성립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득권과 권력층이 '복지'를 시혜적이고 소비적인 것으로 왜곡하며 스스로 정부의 역할을 외면함으로써 본래의 의미를 훼손시킨 것이다. 국가는 시민의 기본적 삶의 권리를 보장하고, 공적 재산을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막아 시민들에게 환원하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 현재 정치, 경제, 복지, 외교, 역사, 문화, 스포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본인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사람의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인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가능한 원천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일단 주변의 조언을 많이 듣는다. 토론도 자주 한다. 뭐든지 최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공부한 다음, 지지 않을 싸움만 골라서 하는 편이다.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작은 승리를 많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지는 것도 습관이다. 지기만 하는 것은 진영 전체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철저하게 준비해 이길 수 있는 싸움을 해야 한다. 물론 불가피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준비를 잘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을 했는데, 이유는 단순하다. 지는 싸움은 피하고, 철저하게 준비해 이기는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 뭘 하더라도 대충하지는 않을 거다.
-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저지르면, 사람들이 '저 사람 혹시 사고치는 것 아냐?'라고 불안해하며 돕지 않는다. 그러나 준비를 철저히 하고 경험을 충분히 한 사람에게는 분명 '도움'이 온다.
- "부정부패의 구조를 극복하고 노력만큼의 성과가 보장되는 정상적인 사회, 주권자의 진정한 의사가 최대한 관철되는 민주적인 사회"(이재명 시장 블로그 중)를 꿈꾼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까지 충분히 경험한 바 없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종교, 도덕, 법률, 정치 영역 모두 근본에서는 큰 차이 없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종교가 추구하는 것도 결국 '인간 존중'을 출발점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 아닌가? 인류 5000년 역사에서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통치 시스템 중 민주주의가 가장 잘 만들어진 제도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한 사람을 그 체제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데 가치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과 일치한다. 사람을 귀히 여길 뿐 아니라, 국민이 주권자라는 것이다. 그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그런데 모두가 주권자로 정치에 참여하기 어려우니까 대리인 제도를 둔 것이고, 다수결을 택한 것이다. 대리인의 제1 의무는 구성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며, 그 사회의 최종 목표는 구성원 최대 다수가 최대의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구성원 개개인에게 '희망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이 자원이나 부(富), 기회를 공평하게 가져야 된다. 이는 곧, 실질적 평등을 의미한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기회'라는 측면에서 실질적 평등이 이뤄지는 사회가 돼야 구성원도 가능성을 갖고 꿈꿀 수 있다. 개개인이 꿈과 열정을 갖고 살아갈 때 사회도 국가도 건강해진다. 자원이나 부를 소수가 독점해버리면 개인도 엄청나게 불행하지만, 그 체제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기회의 균등·실질적 평등·출발점에서의 평등이다. 물론 실현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다. 되게 해야 한다.
- 시장이라는 행정가의 위치에서 본인의 철학을 담은 정책을 마음껏 실현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국회의원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을까?
어디에 있으나, 별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시민운동가, 인권변호사, 그리고 앞으로 국회의원이나 다른 공직을 맡더라도 차이를 못 느낄 것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다. '불법적인 일이나 나쁜 짓만 아니면 다 하겠다'는 말이다. 지금 시장직도 운동하듯이 한다. 정치가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동가로, 모든 사람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 자체가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신 난다. 그들에게 꿈을 줄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보람이다.
'시장'직은 수단에 불과하다. 실제로도 시민단체 집행위원장할 때보다 조금 낫더라. 상근 근무자 한 명과 연간 예산 2500~3000만 원 정도로, 여러 일을 했다. 지금은 상근자만 3000명 이상이고 예산은 2조4000억 원이나 되니,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 이런 측면에서 '시장'직이라는 유용한 수단 하나를 확보한 것이다. 이것뿐이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모르지만, 손에 든 무기의 크기가 다를 뿐이다.
생각보다 개인의 역할이 크다고 확신한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몫도 엄청 크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공장노동자로, 혈연도 지연도 학연도 빽(?)도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갖고 있었던 것은 다만, 사람에 대한 믿음이었다. 한 명이 한 명을 설득해 같이 하면 두 명이 되고, 이렇게 모여 엄청난 시너지가 발생한다. 정책 하나를 결정할 때 구성원 모두가 n분의 1로 결정 권한을 갖는 게 아니다. 다수는 무관심하지만, 소수의 관심 있는 사람들이 경합해 그 중 센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관심 있는 소수, 옳은 생각을 가진 소수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요즘 SNS를 열심히 하는 이유다. 트위터(11만여 명)와 페이스북(2만 8000여 명) 팔로워 덕에 이제는 웬만한 언론사 하나쯤의 공격은 반격할 수 있다.
- 지난 2월 SNS에서 "여당은 권력을 이용해 제 지지층만 챙기는데, 야당이 계속 지지층을 잃어가면서 여당지지층을 배려하면 승부는 이미 끝난 거다"라며, 여야 모두를 비판했다. 양대 정당의 기득권 구조를 만든 정치제도, 특히 선거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지난해 '정당공천제' 논란 당시 생각이 정리됐다. 수도권은 잘못된 정치제도의 피해가 작은 편으로, 공천받은 사람들끼리 실질적인 경쟁이 이뤄지기 때문에 공천제가 지속 가능하다. 하지만 실질적 경쟁이 없는 지역에서는 공천제를 폐지하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 그러나 영호남에서 특정 정당이 공천을 하면 100% 당선이 되는데, 정당 공천이 무슨 의미가 있나. 자기들끼리 시장이며 군수며, 마음대로 결정하는 공천은 하지 않느니만 못 하다. 이는 민의를 왜곡하는 수단이다.
현 소선거구제가 갖는 문제가 워낙 크다. 영호남 공천자는 바로 당선되기 때문에, 공천만으로 국회의원이 사실상 결정되는 정당 내 구조가 보완돼야 한다. 지금 논의하고 있는 '비례대표제 확대안'이 좋다고 생각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 2월 국회에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제안했는데, 내 생각에는 선관위의 안보다는 전국 차원의 비례대표 방식인 독일식 선거제도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국회 차원에서 조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선관위가 제안한 권역별 비례대표제로라도 바꿀 생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선거제도에서 대의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장점이 많은 민주주의가 망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국회의원이 국민의 뜻을 반영하지 않고 당의 눈치만 본다는 것은 국민의 의사를 배반하는 것이고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 점을 고쳐야 하는데, 결국 (하나마나하는 소리 같지만) 국민이 해야 된다. 또 향후 대통령 선거를 통해 강력하게 쟁점화해야 실현할 수 있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철수 의원과 함께 지난달 10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2017년 대선 후보군(차기 정치 지도자)에 처음으로 이름이 올랐다. 기분이 어땠나.
미국 출장 중이었는데, 지인에게 문자가 왔더라. 그래서 '장난치고 있네!'라며 가볍게 답장했다. 그런데 귀국 후 관련 기사를 찾아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좀 빨리 이름이 거론됐다는 생각도 들었다.(웃음) 유권자들이 대선에 벌써 관심을 두는 건가 싶어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좋기도 했다. 대선 후보군에 이름이 올라서 좋기보다는, 내 스피커가 좀 더 커졌다는 측면에서 좋다는 뜻이다. 세상에 대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더 크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군인에게 총이 있다면, 정치인에게는 입이 있다. 정치인에게 말은 무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스피커가 커졌으니(영향력이 늘었으니), 잘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일이기도 하고. 그것 말고는 변한 게 없다.
-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직까지도 민주적 마인드, 시민 의식이 상당히 부족한 것 같다. 이런 인식이 어쩌면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 부족해지는 것 같다. 자기들끼리 아웅다웅하며, 자신이 무능해서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지. 이것이 왜 기울어진 운동장이 됐는지, 왜 나한테 불리하고 특정 소수에게는 유리한 시스템이 됐는지 생각 못하고 있다.
망가진 시스템 안에서 대다수의 개인은 계속 무시당하고 배제당하고 박탈당한다.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인적 역량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 시스템이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게,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구조를 만드는 것도 개인의 몫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개인적 노력도 매우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내 삶의 조건은 내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실망하기 전에 한 번 되돌아보고, 작은 관심과 참여를 통해 삶의 조건을 바꿔야 한다.
사실 이것은 젊은 청년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전 세대가, 특히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교육을 통해 '공공의 이익(공리, 公理)이 개인적 이익과 무관하지 않다'고 끊임없이 예기하고 토론하며 실험도 계속해야 한다.
- 어렵고 힘든 시절 자살을 기도했다고 들었다.
주변에서 이 얘기는 너무 살벌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더라.(웃음) 그래도, 뭐…. 어느 순간 공장에서 일하다 기계에 끼어 팔이 비틀렸는데, 정말 못 견디겠더라. 암울했다. 더러운 회색 작업복이 아닌 깨끗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볼 때 너무 부러웠다. 삶이 마치 절벽 끝에 매달린 것 같아 두 번 정도 시도했는데, 안 되더라. 진짜 죽으려고 했다면 죽었을 텐데, 덜 힘들게 죽으려고 하니까 잘 안된 것 같다.(웃음) 그 당시는 너무나 힘들어 시도한 것이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축복이다.
- 인간이라 갖게 되는 열등감, 자신 없음, 스스로에 대한 불확실 등 내적 고민은 어떻게 극복하는 편인가.
나는 열등감을 느낄 요소가 많다. 장애인이고, 중·고등학교도 못 다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것 하나하나가 나의 재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일은 다 양면이 있다. 음지만큼 양지가 있고, 산이 높은 만큼 골의 깊이가 있는 것이다. 나쁜 것과 비슷한 양만큼 어딘가에 좋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어떤 나쁜 상황에도 좋은 요소를 찾아 잘 활용한다.
의식 속에 존재하는 열등감만큼 무의식 속에 똑같은 크기의 우월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래서 악조건이 닥쳐도 별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난 공격을 당하면,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한다. 진짜 위기는 기회다. 오히려 가능성이 더 많아지지 않나. 통상적으로 좋은 측면에는 기회가 별로 없다. 누가 나한테 '종북'이라고 하면, 나는 달려든다.(웃음) 적의 공격이 집중되는 곳이 우리의 주력지(主力地)인 것이다. 피하지 않는다. 이게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그럼, 딴 거 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떠날 것이다.
- 이재명에게 자유란?
간절히 바라고 꿈꾸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자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자유롭다. 시장직 또한 자유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에 언제든 버릴 수 있다. 대체 가능한 다른 수단이 생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현재에 미련이 크게 없다. 그러니까 용감하다. 무언가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연연하는 순간, 정상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에 뭐 할래?'라고 묻는다. 나도 모른다. 그때 가서 가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삶의 큰 방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강을 만나면 배를 타고 들을 만나면 말을 타고 가면 된다.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정한다고 내 마음대로 되나?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방향만 정하고 최선을 다하면, 길이 생기고. 그러다 죽을 때쯤 '그동안의 삶이 창피하진 않았네'라는 생각이 들면, '잘 살았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삶을 살고 있고,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이 연재는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의 기획, 취재, 집필에 의해 진행됩니다. 인터뷰는 비례대표제포럼 손어진 간사가, 정리는 손어진 간사와 정치경영연구소 조경일 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정치경영연구소가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한국적 함의를 정치 및 정책적 맥락에서 찾아내는 일입니다. 과연 자유는 진보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진보적 의미의 자유를 스스로 누리고 있거나 타인을 위하여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나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 그리고 자유와 평등은 상호 어떠한 관계에 있어야 하는 걸까요?
정치경영연구소의 청년 연구원들이 자유와 관련된 이 많은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 또는 극복해가고 있는 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작정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자유 이론가 혹은 실천가들께 (자신과 타인을 위한) 자유를 실천하는 방식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여쭤보겠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분들은 젊은 저희에게 자신들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겁니다.
앞으로 모든 인터뷰 내용은 잘 정리하여 여기 이 자리에 항상 올려놓겠습니다.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이 자유의 향연을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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