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네, 완전히 극복했어요.” ‘살아남은 아이’가 말했다. 그도 이제 스물셋. 더 이상 아이는 아니다. 화상과 상처로 뒤덮인 앙상한 몸으로 ‘집’에서 구조됐을 때가 여섯살이었다. 한살 위 누나는 이미 죽어 마당에 파묻혀 있었다. 아이도 “이 상태로 며칠이면 사망했을” 상태였다. 17년이 흘렀다.
“요즘 가장 즐거운 거요? 편의점 일 재밌어요. 단골손님 중에 웃긴 사람 있어서 되게 재밌어요.” 그는 “거기 알바생한테 제가 먼저 말 걸었다”며 자신이 요즘 “많이 변했다”고 자랑을 했다. 심한 낯가림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뒤 취업이 어려웠던 그다.
아이는 한국 사회에 아동학대란 무엇이고,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알린 첫 사례였다. 형제자매 중 누군가 사망할 정도로 심각한 학대를 받은 아이 중에서 평생에 걸친 지원과 관찰이 이루어진 첫 사례이기도 하다. 지난 4월20일, 그에게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안부를 물었다.
아이는 오랜 시간 아무도 믿지 않고, 과거의 일에 입을 닫고 지냈다. 하지만 스물셋의 그는 가족의 이야기도 회피하지 않았다. “가족 얘기를 하면 예전에는 울고 그랬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옛날에 누나가 꿈에 나올 땐 정말 무서워서 죽을 뻔했는데, 요즘엔 푹 잘 자요.” “어렸을 때는, 아팠죠. 마음에 멍이 들어서.” “원망스러운 사람요? 지금은 없는데, 어렸을 때는 새아빠가 미웠죠. 아, 그게 친아빠였나요?”
학대 현장에서 구출된 이후 17년, 그의 삶을 사회복지사·의사·임상심리전문가 등 다섯명의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망가져버린 6년의 기억으로부터 삶을 복구하기 위해 불안과 불신, 공포와 결핍을 이겨내며 걸어온 아이의 길을 되짚었다.
발견 당시 누나는 마당에 묻혀있었고
동생은 구조됐다
그리고 17년 세월을 견뎠다
1. 성인이 된 아이/ “네 완전히 극복했어요” 기다려주자 다가왔다
-김정미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사업본부장
1998년 4월, 아이 발견 당시 그는 성남 아동학대상담센터의 신입 간사였다. 두 해 전 문을 연 센터는 비영리법인인 굿네이버스가 운영하는, 아동학대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국내 유일의 기관이었다. 사회복지사인 김 본부장은 당시 만삭의 몸으로 아이를 담당하게 됐다. 그는 병원에서 아이와 첫 대면을 했다.
그 뒤 17년째 아이를 ‘아들’이라 부르며 돌보고 있다. 처음부터 자신이 엄마가 되어주려 한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두번의 가정 위탁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는 아이를 쉼터에서 직접 돌보기로 했다. 2001년 국내 최초로 문을 연 학대아동 쉼터에 입소해 아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이가 쉼터에 처음 오던 날이 생생해요. 두번째 위탁 가정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왔죠. 회색 정장을 입고 작은 넥타이도 매고 왔어요. 시무룩하게 현관에 서 있길래 제가 다가가서 안아줬어요.” 많은 아이들이 들고 나는 쉼터지만 아이만은 성인이 될 때까지 머무르게 했다. ‘널 오래도록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그는 훗날 쉼터에 들어섰던 그날이 “가장 안전하게 느껴졌던 순간”이라 떠올렸다.
김 본부장은 살인, 아동복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러 교도소에 간 적도 있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여권을 만들어주려면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해서였다. “아이처럼 마르고 단단한 체형이더군요. 아이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묻지 않더라고요. 아이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느꼈죠.”
아이의 초·중·고등학교 뒷바라지를 하며 김 본부장은 아이가 성인이 되는 날을 대비했다. 전세 자금을 준비하고, 아이에게 요리와 청소를 가르치고 운전면허를 따게 했다. “아이가 성인이 된 뒤, 취업이 잘 되지 않자 조바심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때마다 말했죠. 아이가 구조되던 당시의 처참했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렇게 살아가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일이다. 좀 더 뭉근히 기다려주자고요.”
2. 청소년기/ 자존감 없었던 아이 “경찰이 되고 싶어요”
-홍창표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홍보협력팀장
경기도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던 2005년부터 2010년까지 아이를 돌봤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를 만나 중학교, 고등학교 뒷바라지를 했다. “그 시절 아이에게 듣고 싶었던 한마디는 ‘뭘 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자존감이 워낙 낮아서 자기 의사 표현도 안하고, 어떤 일에도 동기부여가 어려웠죠.”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충동 조절 때문에 약물도 복용해야 했다. 학업 수행에도 어려움이 컸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아이들의 뇌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않는 것은 다반사다. 홍 팀장은 “학대를 극복한 ‘대한민국 1호’ 아이로 국가가 책임지고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놀이 치료, 음악 치료, 미술 치료 등이 매주 이어졌다.
자꾸만 “뭘 하고 싶냐”고 묻는 그에게 아이는 종종 “경찰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찰 되려면 뭘 해야 돼?” 여러번 물으면 아이는 한번씩 “태권도도 하고 수영도 해야 돼요”라고 했다. 홍 팀장은 아이를 데리고 태권도 도장도 가고 수영장에도 갔다. 축구 선생님을 초빙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쉼터 친구들과 어울려 가출을 하거나 쉼터 주변을 배회하는 일도 여러번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초등학생과 어울렸고, 어린이용 학습지를 오래 풀었다.
하지만 이 기간, 아이의 정신세계는 성숙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날 무렵, 그때까지 매주 치료를 진행하던 심리치료사들도 아이에게 더는 치료가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고 진단했다. 어렸을 때처럼 강아지나 친구를 때리는 폭력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변해가고 있었다.
3. 초등학교 시절/ 입 닫아버린 함구증 드디어 말을 걸었다
-김성준 임상심리전문가
아이에게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2003~2005년이다. 당시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던 김성준 임상심리전문가가 쉼터를 찾아왔다. 평생 자원봉사만 하면서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가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멀찍이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와 빨리 친해지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그저 우르르 나가서 술래잡기, 얼음땡, 축구, 물총놀이, 구슬치기를 했다.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쉼터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겼다. 그러더니 “선생님, 어부바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날부터 아이는 일주일에 두번 오는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는 아이를 만나면 들어올려 빙빙 돌려줬다. 초등학교 고학년인데도 아이는 아기 같은 유희를 원했다. 어느 날은 작은 축구공 모형을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사람에게 무심해 보였지만, 아이는 사실 정말 따뜻한 아이였어요. 전 그 마음을 진하게 느꼈죠.”
자원봉사를 2년째 할 무렵, 그는 쉼터의 아이들을 상대로 12주 동안 심리치료를 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치료 전 아이의 상태를 검사해보니 입을 닫아버린 함구증이 있었다. 불안과 우울, 사람에 대한 불신감, 자책감이 강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이 나타났다.
좋아하는 선생님 앞에서 아이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과거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썼다. “이때는 6살 때 일이었다. 엄마 아빠가 누나를 굶기면서 비웃고 그래서 내가 몰래 밥을 주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엄청 혼났다.” 그림 속에서 아이는 왜 우느냐고 묻는 한 아주머니를 향해 “으아앙. 안 말할래요. 아빠하고 엄마가 누나를 굶겨 죽였어요. 엄마 나빠요. 왜 때려요”라고 답했다.
아이는 밤마다 누나가 유령으로 나오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선생님의 위로에 힘을 얻은 아이는 꿈속 누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누나, 나 도와주고 잘해줘서 고마웠어. 나 누나한테 밥 주다가 엄마한테 죽을 뻔했어. 다리미 갖다 등에 대서 타죽는 줄 알았어. 하지만 나 많이 나아졌어. 지금 나 누나랑 많이 놀고 싶어. 누나 새엄마 진짜 나빴지. 누나 많이 보고 싶다.”
마침내 아이는 계모를 향해 글을 썼다. “저를 괴롭히고 때리고 그러니까 벌을 받지요. 놀려주고 싶은 거 알지요. 똑같이 해주고 싶네.” 이날 처음으로 그동안 무서워서 그리지 못했던 부모의 얼굴을 그려냈다.
12주의 치료가 끝난 뒤, 아이는 한결 홀가분해졌다. 말을 하게 됐고, 자책·불신감·불안·분노 등 모든 정서적 수치가 눈에 띄게 안정됐다. ‘집-나무-사람(HTP) 검사’ 결과로도, 누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줄어들면서 위협감이 감소됐고 현실을 감당해내는 힘이 커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건을 겪은 지 7년이 지났지만 아이는 매일 악몽을 꾸며 과거를 현재처럼 느끼고 있었어요. 그런 상처가 있는데도 ‘덮어놓고 앞을 향해 가자’, 그러면 안 됩니다. 학대받은 아이들이 좀 더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개인의 열정에만 기댈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요.”
4. 구조 뒤 치료기간/병원서 끝없는 집착 불안에 자주 똥지려
-안동현 한양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연구소장)
응급실로 달려가 아이를 대면했던 순간을 그는 지금도 제자들에게 이야기한다. 3살 아이 수준에 불과한 14㎏의 체중, 지독한 영양실조, 발등과 발바닥에 수없이 찍힌 상처, 등에 있는 다리미 자국 화상, 전신의 멍과 피부염, 욕창, 결핵, 파상풍, 세균 감염에 의한 패혈증 등 성한 곳이 없었다. 영양보충과 상처 치료가 시급했다.
“제일 중요한 건 의식주를 포함해 기본적인 것을 제공해 아이가 안심하도록 하는 것이었죠. ‘살려주는구나’, 그 느낌을 준 다음에 신뢰관계를 맺고 그다음이 심리적인 치료인 것입니다.” 안 교수는 치료시간이 되면 아이와 바닥에 함께 앉아 기차놀이, 공놀이를 했다.
병원에서 아이는 끝도 없이 먹었다. “입원 기간 동안 아이는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었어요. 밥도 군대에서 수북이 쌓아놓고 먹는 거만큼, 기본적으로 두세 그릇을 먹었죠. 과자나 과일도 끊임없이 먹었고요.” 아이는 한밤중에도 깨어나 배가 고프다고 서럽게 울다가 과자 상자를 끌어안고서야 잠이 들었다.
식탐뿐만 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사준 곰 인형과 로봇을 다른 아이가 건드리자 이를 갈았다. “학대받은 아이들은 매일같이 예측 불가능한 부모와 함께 지내다 보니까 불안이 강하고, 너무 부당한 일을 당하다 보니 분노 조절이 안 됩니다. ‘안전지대’로서 집이 존재하지 않으니 항상 결핍에 시달리는 거죠.”
몸의 상처가 아물어갈 때쯤 아이가 사자, 기린, 뱀과 같은 단어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능의 문제도 있었지만 문화적인 경험도 또래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다. 불안 때문인지 자주 똥을 지렸다. 안 교수는 “장기적인 심리 치료가 필요했고 지속적으로 신뢰관계 맺을 사람을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고 말했다.
5. 구조 당시/온몸 상처 깡마른 몸 석고상처럼 미동 없어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장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섰을 때의 냉기를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장은 기억했다. 4월이었지만 집 안은 추웠고 안방에만 온기가 있었다. 방 한쪽 구석에 덥수룩한 머리에 비쩍 마른 아이가 웅크린 채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방문자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아이가 맞는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고 하니 엄마는 “애가 말을 안 들어서 그렇다”고 받아쳤다. “아줌마한테 와보자.” 장 관장의 말에 아이는 수긍도 반항도 하지 않고 품에 안겼다. 아이는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학대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가해 부모들은 여름에도 아이에게 긴팔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옷을 들춰보니 염증과 상처가 뒤범벅된 깡마른 몸이 드러났다. “많이 아프니?” 아이가 엄마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아파요.”
새 가정을 꾸리고 두 딸을 낳은 부부가 전처의 자식인 남매를 데려다가 학대한 사례였다. “이 아이는 야반도주한 친척의 아이”라고 거짓말을 하던 아빠는, 곧 “아이 누나는 어디 있느냐”는 경찰의 추궁에 무너졌다. 다음날 경찰은 마당에 파묻혀 있던, 죽은 지 5개월 된 누나의 주검도 수습했다.
아이의 누나는 부검 결과 위장부터 대장까지 아무런 음식의 흔적이 없는 상태였다. 1997년 12월 아이는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으려다가 부모에게 발각돼 폭행을 당했다. 6일 동안 아이는 늘 갇혀 있곤 했던 차디찬 방에 누워 있다 숨졌다. 그 방 벽에는 “말 안 들으면 세탁기 속으로 들어간다”는 아빠의 협박이 적혀 있었다.
그날 장 관장은 아이를 안고 자동차에 타며 아이에게 속삭였다. “이제 아줌마가 살려줄게.” 잠시 뒤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자 먹고 싶어요.” 장 관장은 “미국 아동학대 교과서에서 봤던 사례와 정황, 아이 모습 등이 너무 똑같아 놀랐다”고 말했다. 이 일을 겪은 뒤 그는 “끝까지 현장에 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가해자인 아이의 친아빠에게는 5명의 아이가 있었다. 세 남매는 첫번째 부인의 자녀들, 두 딸은 새 부인의 아이들이었다. 한 명이 죽었고, 한 명이 구조됐다. 나머지 아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08년 이후 기록이 남아 있는 아동학대 사망자 113명 중 ‘살아남은 형제자매’가 있다고 확인된 경우가 40.7%(46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해자로부터 ‘살아남은 아이’의 분리가 확인된 경우는 7건에 그쳤다.
스물셋이 된 아이는 ‘멋진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생각하는 멋진 아빠는 ‘잘 웃어주는’ 아빠다. “아이가 모르는 게 있으면 잘 알려주고, 못하는 게 있으면 더 잘 알려주세요.”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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