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15-05-17 21:51수정 :2015-05-18 01:04
임성택씨는 일부 극우세력이 ‘북한군 특수부대원’이라고 주장하는 사진에 등장하는 복면 시민군(왼쪽 사진 오른편)이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 5월25일 광주시 서구 농성동에서 외신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광주시 제공
도청 남아있다 체포된 임성택씨
‘극렬분자’ 낙인찍혀 고문·실형…
‘오월 시민군’ 자부심으로 버텼는데
아직도 우릴 ‘북한군·홍어’라 매도
극우논객 고소해도 ‘무죄’ 면죄부
‘5·18 왜곡’ 맞서 당당하게 싸울것
‘극렬분자’ 낙인찍혀 고문·실형…
‘오월 시민군’ 자부심으로 버텼는데
아직도 우릴 ‘북한군·홍어’라 매도
극우논객 고소해도 ‘무죄’ 면죄부
‘5·18 왜곡’ 맞서 당당하게 싸울것
설핏 잠이 들었다가 고함소리에 깼다. “계엄군이 쳐들어온다”는 외침을 듣고 카빈총을 집어 들었다. 1980년 5월27일 새벽 5시30분, 그는 시민군 지도부가 있었던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에서 체포됐다. 계엄군은 당시 17살이던 그의 등 뒤에 ‘극렬분자’라고 휘갈겨 썼다. 상무대 헌병대로 끌려갔다. 두달 동안 두들겨 맞고 고문을 당했다. 그때 후유증으로 지금도 온몸이 상했다. 군법회의에서 내란 부화 수행죄로 징역형(1년6월)을 선고받았다. 5·18 시민군 임성택(52)씨는 80년 10월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80년 5월 당시 양복점에서 기능공으로 일하던 그는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때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피가 끓었다. “돌아가신 분들한테도 미안했구요. 그래서 맞서 싸우자는 각오로….” 동네 선후배들이 타고 있던 군용 트럭에 올라탔다. 80년 5월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가 집단발포해 시민 수십명이 목숨을 잃은 뒤 시민들이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하던 직후였다.
계엄군이 진입하기 전날 밤 시민군 지도부는 대원들을 모아놓고 ‘갈 사람은 가라’고 했다. 그는 밤늦게까지 시내를 돌며 계엄군 동향을 살피다가 도청으로 복귀했다. “에무식스틴은 자동이라 (계엄군들은) 무조건 긁어불드만요. 총 맞은 이들은 소리없이 푹 쓰러졌고요….”
세상에 나왔지만,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5월단체의 조직실장을 맡았고, 수년 동안 5월 진상규명 투쟁에 참여했다. 괴로움에 술로 살았고 몸은 망가졌다. “아픈 데만 생기네요. 양쪽 어깨 수술을 했고, 목·허리도 안 좋아요. 신경정신과 약을 복용하는데도, 우울증이 도졌는지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피하고요….”
그래도 5·18은 그를 지탱해준 자부심이었다. “딱 한번 후회한 적이 있어요. 형이 청와대 경비대 시험에 합격했는데, 신원조회에서 떨어졌어요. 나 때문에 떨어진 것이지요…. 그때까지도 (우리는) 폭도였거든요.” 80년 5월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석달 동안 찾아헤매다가 애가 다 타버렸던 노모(77)는 요즘 치매 증상을 보인다. 그는 어머니를 최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면서 죄스런 마음만 들었다.
요즘 그를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인터넷 등에 5·18민주화운동과 북한을 연계하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마스크를 쓰거나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총을 든 시민군 2명의 사진을 갈무리해 ‘북한 특수군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그 사진의 오른쪽 시민군이 임씨다. 80년 5월25일 군용 지프를 타고 광주 시내를 순찰하던 중 서구 농성동에서 외신기자에게 찍힌 사진이다. 당시 임씨 등 시민군은 계엄군의 보복을 두려워해 일시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임씨는 사진 속 왼손 새끼손가락을 의식적으로 감추고 있는 시민군이 자신이라고 설명했다. “일하다가 다쳐 왼손 새끼손가락 1개 마디가 절단됐어요. 지금도 습관처럼 왼손을 구부려요.”
임씨는 “법으로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됐는데, 시민군을 간첩으로 매도해도 무죄판결해불고…. 이것이 문제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광주시민단체들이 꾸린 5·18역사왜곡대책위는 종합편성채널에서 ‘5·18 때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한 4명과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등에 5월 희생자 관을 ‘홍어 택배’로 빗댄 악성 글을 게시한 5명 등 9명을 2013년 6월 광주지검에 형사 고발했다. 하지만 1명만 모욕죄로 형사처벌을 받았고, 나머지는 불기소 처분 등을 받았다. 2008년 9월 극우 성향 논객 지만원씨 등 20명이 5·18 민주화운동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린 혐의(명예훼손)로 고소당했지만, 대법원은 2012년 12월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판시하면서도, ‘피해자를 특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한 것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 김상훈 변호사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4000여명이나 돼 누구의 명예훼손에 해당되는지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은 사법부의 소극적인 법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아들이나 며느리, 미래의 손주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어요.”
지난 16일 경북 경주향교에서 치러진 아들(29)의 혼례식에 혼주로 앉은 그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아들이 네살 때 이혼한 아내가 세상을 뜬 뒤, 아들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럭비 선수였던 아들은 대학 졸업 후 부사관으로 군 생활을 하다가 2011년 경주에 정착했다. 자동차 시트를 만드는 회사에 생산직 노동자로 일하는 아들은 경주 출신 아내(33)를 만났다. “아들에게는 항상 술을 마시고 데모만 하는 아빠였어요. 몇년 전 휴대전화로 ‘미안하다’고 하면서 눈물이 났어요. 5·18을 빨갱이로 매도해도 가만히 보고 있는 아빠는 되고 싶지 않아요.”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임성택(52·맨 오른쪽)씨가 지난 16일 오후 경북 경주시 경주향교에서 전통 방식으로 결혼식을 한 아들·며느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경주/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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