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전 5월 18일, 대한민국 광주는 수많은 시민이 죽고 다쳤습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5.18광주 민주화운동이라 부릅니다.(공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 지금이야 우리가 민주화운동이라 부르고 있지만, 당시 언론은 광주를 가리켜 ‘폭동’과 ‘폭도’라 불렀습니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신문 대부분이 발행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일보는 5월 18일 1면에 5,17쿠데타라 불리는 ‘전국비상계엄 확대’를 보도했습니다.
한국일보는 전국비상계엄이 북한의 동태와 전국적인 소요 사태를 감안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이 있음에도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 정권을 노리고 있다는 얘기는 없었습니다.
1980년 5월, 언론은 광주를 어떻게 말했는지 그때의 언론을 다시 살펴봤습니다.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광주 이야기’
1980년 5월 18일 오전, 전남대 학생들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와 마주칩니다. 공수부대에 맞서던 생들은 공수부대원에 의해 구타를 당했고, 5월 18일 오후 광주 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됩니다.
계엄군은 시민들과 학생을 무차별 폭행을 하고, 이에 항의하던 학생과 시민을 향해 5월 21일 집단 발포가 시작됩니다.
이미 5월 18일부터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과 폭력, 발포가 발생했지만, 신문에 광주 이야기가 나온 것은 5월 21일이었습니다. 이전에 광주 이야기는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5월 21일 자 동아일보 1면의 광주 이야기도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는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됐습니다.
시민과 학생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어떤 언론도 광주의 진실을 보도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광주 이야기는 신문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광주 이야기를 숨겼던 신군부’
모든 언론이 광주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전남매일 신문은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한 진상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했다는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학생들을 유혈 진압했고 시민들이 합류했지만, 계엄군이 발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작성했고, 신문을 발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간부들의 방해로 결국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은 발행되지 못했습니다.
5월 20일 전남매일 신문 기자들은 사장에게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유인물을 내놓습니다.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죽어가는 사실을 목격한 기자들이 기사를 작성했지만, 대한민국 언론 그 어디에서도 광주 시민들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사태가 전두환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라고 보도했던 외신’
대한민국 언론이 광주에서 시민들이 죽어가도 보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외신 기자들은 광주사태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진실을 보도했습니다.
5월 28일 CBS 뉴스는 ‘한국 정부가 광주사태의 원인을 공산주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왜곡함으로써 시위가 계엄령 반대와 군부의 과잉진압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숨기려 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5월 28일 ABC 뉴스는 ‘전두환 장군과 소수의 선택된 장군들이 민간 정부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로운 혁명의회를 구성해서 군사독재를 감행하려 하고 있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 오고 있으며, 광주사태와 더불어 군사독재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보도했습니다.
외신들은 이미 광주사태의 원인이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에 의한 정권 장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습니다.
광주사태가 벌어지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인 고영재(경향신문 사회부), 정교용(중앙일보 월간중앙), 이수언(부산일보 서울지사 정치부), 이홍기(KBS 경제부)와 감사 박정삼 (서울경제 정경부), 편집실장 김동선 등 6명을 체포했습니다.
이들이 체포된 이유는 5월 16일 한국기자협회가 신군부의 검열거부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언론인을 체포한 5월 17일 직후에 구속된 언론인은 모두 24명이었고, 그중 19명에게 유죄판결이 선고됐습니다.
신군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광주를 진압하기 전, 이미 언론을 장악했고, 신문사와 방송은 무자비한 총칼 앞에 검열을 택했습니다.
만약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진상이 제대로 언론에 보도됐다면 과연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결코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광주를 제외한 다른 도시의 시민들은 1980년 광주가 간첩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언론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해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론이 진실을 어떻게 보도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한국의 대다수 언론은 침묵했고, 오히려 광주 시민을 폭도와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35년이 지난 지금도 일부 언론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이 개입됐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 언론은 1980년 5월과 비교해 나아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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