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12 08:29
최종 업데이트 15.05.12 08:29
▲ 찰리 중대에 배속된 군사진사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이 자신의 개인 사진기로 찍은 학살사진. 1969년 11월 12일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의 미라이 학살 특종보도를 계기로 그해 11월 20일 클리블랜드에서 발행되는 <플레인 딜러>라는 일간지에 처음 게재되고 <라이프(Life)>지에 실려 '더러운 전쟁'이라는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 |
ⓒ 김당 |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에 맞춰 취재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베트남전 관련 자료와 책자를 읽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참전군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펴낸 공식문헌과 통계, 그리고 한국군이 수행한 민사심리전에 관한 학위논문, 최근까지 <한겨레>에 연재된 '박태균의 베트남전쟁'(1~34회) 등이다.
참전군인들의 무용담으로만 전해온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처음 공론의 장으로 나온 것은 1999년부터다. 당시 호찌민대 역사학과(석사과정) 학생이자 <한겨레21> 통신원이었던 구수정씨가 처음 발굴해 전했다. <한겨레21> 고경태 기자는 구수정 박사의 과거사 발굴작업을 이어받아, 1968년 2월 12일 베트남의 한적한 농촌마을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복원해 최근 책(<1968년 2월 12일>)으로 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기사는 한국 사회에 공명과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베트남전 사죄운동과 평화박물관건립 추진의 계기가 되었다. 반작용도 컸다. 보도에 격분한 고엽제 피해자 단체 회원들은 <한겨레> 사옥에 난입했다. 최근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이해 피해자들이 처음 한국을 방문했지만, 참전 단체 회원들의 항의시위로, 1968년 2월 12일 그날처럼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왜 평행선일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겼다. 그날의 아비규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와 우연히 학살장면을 목격한 제3자(미군 병사)가 카메라에 담은 '현장감식' 사진, 그리고 주월 미군사령부와 주월 한국군사령부를 오간 공식서한 등은 하나같이 한국군의 '피 묻은 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베트남전 참전 단체와 군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민간인 학살 문제 제기 이후 나온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민사심리전을 다룬 논문에서도 양민 학살 사건은 '미제'로 남겨져 있다.
"한국군의 경우에도 미군 등 다른 연합국 군대에 비해 효율적인 대민작전을 전개했다고 하나, 일부 부대의 무리한 무력 위주 작전으로 일부 지역에서 대민 피해를 유발하게 됨으로써, 국지적인 부작용을 낳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양민학살'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최용호,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의 작전 및 민사심리전 수행방법과 결과>, 148쪽)
▲ 호찌민 시내의 전쟁증적기념관 앞에 선 구수정 박사(왼쪽)와 박물관 관계자. 구수정 박사는 유학생 시절인 1999년 참전군인들의 무용담으로만 전해온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실을 처음 발굴해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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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것일까? 베트남 호찌민시에 있는 전쟁증적(證積)박물관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박물관 2층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각종 살상무기와 고엽제 피해, 그리고 밀라이 양민 학살 등을 주제로 한 '전쟁범죄관'이다.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미군과 한국군뿐만 아니라 남베트남군과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세 가지 범주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의 공통점은 베트남전의 분수령이 된 1968년 1월 30일의 '뗏(Tet, 구정) 공세' 뒤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인들은 최대의 명절인 음력설(뗏)을 전후해 1주일 이상 휴가를 갖고 각종 민속놀이를 즐긴다. 베트남 전쟁 때도 뗏 명절에는 1주일 정도 휴전하고 명절을 즐겼다. 그런데 68년 뗏에는 NLF와 북베트남군이 구두 휴전 약속을 깨고 100곳이 넘는 남베트남 도시에서 동시다발로 기습공격을 펼쳤다. 사이공 시내의 주월 미군사령부와 미국대사관마저 기습공격을 당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은 베트남전의 승리를 낙관했다. 1965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된 웨스트모어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은 1967년 11월 미국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베트남전쟁의 '끝이 보이는 단계'에 와 있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사이공 시내까지 들이닥친 뗏 공세로 웨스트모어랜드의 공언이 허풍일 수 있다는 의심이 들자, 미국 언론들은 막대한 병력과 무기를 쏟아부은 존슨 정부의 베트남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구정 대공세로 응우웬 왕조 시절의 수도였던 후에(Hue)까지 빼앗겼다. 이후 막강한 화력으로 도시의 80%가 폐허로 변할 만큼 포격을 퍼부어 후에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NLF와 북베트남군은 후에에 살고 있던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전후 북베트남은 NLF에 의한 후에에서의 비전투원 살해를 인정했다. 관련 기록은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돼 있지 않다.
반전 여론 확산시킨 미국 언론의 베트남전 보도
▲ 68년 뗏(구정) 공세 당시 사이공 경찰국장 응웬 녹 로안이 베트콩 장교를 노상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은 전세계의 반전 여론에 즉각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6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사진은 베트남전에서 노획한 총기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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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당시 뗏 공세에 밀린 남베트남군과 미군의 반격작전에서 벌어진 참상은 여과없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미국과 유럽에서 반전 여론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전쟁은 비정하지만 언론에게 특종의 보고(寶庫)이다. 남베트남 경찰국장의 베트콩 즉결처분 장면과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으로 울부짖는 소녀 사진, 미군의 미라이(Mỹ Lai) 학살 보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뗏 공세 당시 사이공 경찰국장 응웬 녹 로안이 베트콩 장교를 노상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는 장면은 전 세계의 반전 여론에 즉각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중에 베트콩 장교는 남베트남 장교와 부인 등을 살해하다가 붙잡혀 즉결 처분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에디 아담스가 찍은 이 사진은 AP 통신을 통해 전 세계 신문에 실림으로써 베트남전 반전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68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사진은 베트남전에서 노획한 총기들과 함께 전시돼 있다.
▲ 72년 6월 미군의 네이팜탄 폭격을 받고 옷에 불이 붙어 벌거벗은 채 도망쳐 나오는 장면을 찍은 이 사진은 전 세계에 반전과 종전을 이끌어내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AP 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가 찍은 이 1973년 퓰리처상 수상작은 지뢰와 부비트랩 등 각종 살상무기와 함께 전시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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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베트남전에서 나프타를 주원료로 한 소이탄인 네이팜탄을 사용했다. 72년 6월 사이공 인근의 한 마을의 절에 있던 소녀는 네이팜탄 폭격을 받고 옷에 불이 붙어 벌거벗은 채 도망쳐 나와야 했다. AP 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가 찍은 벌거벗은 소녀의 사진은 전 세계에 반전과 종전을 이끌어내는 여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이 1973년 퓰리처상 수상작은 지뢰와 부비트랩 등 각종 살상무기와 함께 전시돼 있다.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손미마을(미라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은 베트콩의 뗏 공세에 대한 미군의 보복작전이 그 동기였다. 미 육군 찰리 중대는 이날 공격헬기를 타고 미라이에 진입했으나 적군을 찾을 수 없자 가옥을 수색해 사람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몰아세우고 자동화기로 학살했다. 최대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과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신 중 일부는 훼손된 채 발견되었다.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는 프리랜서 기자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는 AP 기자로 2년 반 동안 국방부를 출입했던 시절에 알았던 취재원으로부터 미라이 학살 사건을 듣고 두 달 동안 파헤쳐 1969년 11월 12일 처음 폭로했다. 그러자 찰리 중대에 배속된 군사진사 로널드 해벌(Ronald Haeberle)은 자신의 개인 사진기로 찍은 학살사진을 11월 20일 클리블랜드에서 발행되는 <플레인 딜러>라는 일간지에 처음 게재하고 <라이프(Life)>지에 실었다.
▲ 전쟁증적기념관의 미라이 학살 관련 증거자료. 미 보병사단의 찰리중대는 공격 헬기를 타고 남베트남의 한적한 농촌마을인 손미(미라이)에서 최대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아래 사진은 학살 현장을 지휘한 윌리엄 캘리 중위와 어니스트 메디나 대위. 그 아래 희생자 명단이 적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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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버틸 수 없었던 미군은 진상조사에 착수해 장교 14명을 체포했다. 하지만 군사재판에서 형사처벌을 받은 건 현장지휘관이었던 윌리엄 켈리 중위뿐이었다. 그럼에도 미국 언론은 미라이 사건 보도로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명분을 잃게 만들었고, '더러운 전쟁'이라는 여론 확산을 통해 국가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쟁을 단축시키고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는 데 기여했다. 박물관에는 당시의 학살 현장 사진은 물론, 가해자의 사진과 피해자의 이름이 함께 전시돼 있다.
68년 뗏 공세는 베트남전의 전설적인 지휘관 보 응웬 지압이 지휘하지 않은 유일한 전투였다. NLF와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에서 5개 루트로 공세를 펼쳤는데, 대통령궁을 목표로 한 공격조는 절반이 죽었고, 미 대사관 공격조는 전원이 사망했다. 또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대대적 반격으로 민간인 학살을 포함한 더 많은 피해가 초래되었다.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이 때문에 뗏 공세는 미국과 세계의 여론을 움직여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40여 년만에 비판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청룡부대의 뗏 공세 반격작전과 민간인 학살 사건
68년 뗏 공세는 그때까지의 게릴라전과는 양상이 다른, 미군을 겨냥한 정규전이었다. 뗏 공세는 한국군, 특히 '해병대는 후퇴가 없다'는 신념을 가진 청룡부대에도 충격이었다. 공교롭게도 청룡부대는 미군을 겨냥한 뗏 공세 직전에 주둔지를 추라이에서 미 제5해병연대 관할이었던 호이안 지역으로 옮기고 이틀 뒤에 공격을 당했다. 전열을 채 다듬기도 전에 기습을 당한 청룡부대는 '해병대 사전'에 없는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격에 나선 청룡부대는 괴룡작전(68. 1. 30~3. 13)을 전개해 실지를 사흘만에 수복했다.
구수정 박사가 2000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80여 건으로 90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고경태 기자가 같은 해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발굴한 문서를 보도한 바에 따르면, 당시 미군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관련, 꽝남성의 퐁니·퐁넛(68. 2. 12)과 호앙쩌우(68. 10. 22) 그리고 푹미(69. 4. 15) 등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요청했다.
▲ 전쟁증적박물관에 전시된 베트남전(1962~1973년) 당시 남베트남의 미국 '위성국가' 군대의 주둔지역 지도. 오른쪽 상단이 청룡부대를 포함한 한국군 주둔지역으로 한국군은 가장 먼저 참전해 가장 늦게까지 남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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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건 모두 청룡부대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다. 특히 뗏 공세에 대한 반격으로 전개된 괴룡작전에서 발생한 퐁니·퐁넛 사건은 미라이 사건보다 한 달 앞서 발생했다. 우연히 현장을 목격한 미 해병 제3상륙전부대 본(Vaughn) 상병이 카메라에 담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군은 이렇게 기록했다.
"한국 해병2여단 1대대 1중대가 마을 주변을 일렬종대로 지나던 중 저격을 받자 마을을 공격. 앞 소대에서 민간인들을 후송시켰으나 뒤에서 대부분 사살됨. 79명(또는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 (박태균의 베트남전쟁, "베트콩 나타나면 마을을 몰살시켰어요", 한겨레, 2015. 1. 17)
목격자와 피해자 그리고 현장감식 사진이 움직일 수 없는 물증으로 남아있는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 사례인 미라이 사건과 퐁니·퐁넛 사건의 공통점은 뗏 공세에 대한 반격, 즉 보복작전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 언론은 사실을 보도한 반면에, 한국 언론은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 언론은 파병 당시는 물론, 그 이후로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된 어떤 사진도, 스트레이트 기사도, 탐사보도도 하지 않았다. 미라이 학살 보도 이후, 미국 언론은 동맹군의 민간인 학살로 보도 영역을 넓혔다. 1970년 1월10일 <뉴욕 타임스>는 '한국군이 수백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고, 주월미군사령부의 고위 장성이 한국군에 대한 조사를 중단시켰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외신을 인용한 보도조차 안 했다. 박정희 정권의 철저한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 외면하는 국가 지도자의 언론의 책임
하나의 전쟁이 미국에서는 '더러운 전쟁'으로 기억되고 소비되는 반면에,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의의 전쟁'이나 '불행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1차적 배경은 양국 정부의 어정쩡한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사과를 한 이후 입을 닫고 있다. 해외자본 투자유치를 통해 경제발전을 꾀하고 있는 베트남 정부 또한 '미래를 위해 과거는 덮어두자'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한국은 2014년말 현재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
한국 정부가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8월 방한한 쩐 득 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인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사과했다. '민간인 학살'이란 표현을 쓰진 않았지만, 이 문제가 처음 공론화된 시점이어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사과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2004년 베트남 방문시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로 에둘러 유감의 뜻을 표시했다.
▲ 베트남을 국빈 방문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9일 오전(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방문, 헌화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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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베트남 방문시 호찌민 묘소에 헌화했다. 2001년 김대중이 사과했을 때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이라고 발끈했던 박근혜도 2013년 9월 대통령으로서 호찌민 묘소에 헌화하고 참배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사과는커녕 유감 표시도 없었다.
진정한 사과는 피해자가 수용할 때까지 하는 것이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나치 과오에 대한 책임에는 마침표가 없다"고 했다. 국가 지도자의 반복된 사과는 국민들에게 '고통과 기억의 연대'로 계승된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는 국가의 책무를 계승하지 않고 있다.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이 살아있는데도 가해자들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1차적 배경이다.
2차적 배경은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언론 환경과 도미노 이론이 국제질서를 지배하던 냉전시대 환경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미국 언론과 비교해 한국 언론은 사실 보도 그 자체에서도 무기력하거나 게을렀다. 역사적 문헌자료와 전쟁증적기념관에서 확인한 것은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관련, 미국 언론은 사실을 보도했지만, 한국 언론은 사실을 외면했다는 점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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