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9일은 ‘대한민국 사법사상 또 하나의 암흑의 날’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1975년 3월 17일 결성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일제강점기보다 긴 40년 동안 활동해 왔는데 대법원이 “그런 단체는 애초부터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라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좀 거창하게 비유하자면 한국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들인 3·1운동, 4월혁명, 광주민중항쟁, 6월항쟁의 정당성과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 팔만대장경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동아일보사가 국가(안전행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민일영)가 내린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 과정에서 (동아일보사에) 의견 제출 기회를 제공했다는 자료가 없는 점을 보면 동아일보사에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고, 정권의 요구에 굴복해 기자들을 해직했다는 인과관계도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 행정소송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하려면 동아투위가 2006년에 진실화해위(위원장 안병욱)에 제기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과 언론인 강제해직에 관한 진실 규명 요청’의 결과를 알아야 한다. 노무현 정부 시기에 공식 기구로 창설된 진실화해위는 2년여에 걸친 정밀조사를 한 결과를 2008년 10월 21일 동아투위에 통보했다. 요지는 아래와 같다.
정부는 이미 1975년에 조선일보를 상대로 광고탄압 방식을 실행하여 효과를 보았던 수단, 즉 광고 수주를 차단하여 경영상의 압박을 가함으로써 언론사 사주를 굴복시키는 방식으로 동아일보사를 탄압하였다. 광고주들을 중앙정보부 남산 조사실로 불러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여성동아. 신동아 심지어는 동아연감에까지 계약된 광고를 취소케 하였고, 광고를 게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보안각서를 쓰게 하였다. 개인 소액광고주에게까지 이러한 위압을 행사하였다. 광고면이 백지상태로 발간되는 동아일보를 지원하고 격려하기 위한 시민들의 격려광고에 대해서도 당국은 조사하여 압력을 행사 하기에 이르렀다. (···) 이는 동아일보사에 대한 부당한 탄압뿐 아니라 언론 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히 훼손하고 침해한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1975년 3월 8일부터 5월 1일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49명을 해임하고 84명을 무기정직 처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민주공화당 의장 박준규가 동아일보사는 발행인이나 편집인 지배하에 놓여야 사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발언한 이후 취해졌으며, 또 이러한 인사 조치에 대한 동아일보 언론인들의 항의농성도 통행금지가 있던 새벽에 정부의 비호 아래 동원된 인력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 판단할 때 동아일보사는 언론자유 수호에 앞 장선 언론인들을 위법한 공권력의 압력에 굴복·순응하여 정부의 요구에 따라 대량 해임·무기정직시킨 것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정부의 광고 탄압으로 인한 경영상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웠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사도 정부의 강압을 기화로 언론자유 수호에 앞장선 언론인들을 탄압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하겠다.
중앙정보부 및 문화공보부 등 당국은 자유언론실천을 주장하는 기자들을 해임 또는 무기정직 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복직도 막았으며, 재취업마저 방해하였다. 이는 비판언론과 언론인을 언론계에서 추방·격리시켜야 한다는 유신정권의 언론통제 방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침내 정부의 치밀한 주도하에 진행된 일련의 탄압조치로 비판언론 거세라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판단되자 동아일보 광고탄압을 해제하였다. (···)
동아일보사는 비록 광고탄압이라는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야기된 경영상의 압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동아일보사의 명예와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 왔던 자사 언론인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정권의 요구대로 해임함으로써 유신정권의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더욱이 사측은 이후에도 정권의 강압에 의한 해임이라는 점을 시인하지 않고 경영상의 이유로 해임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동조하였으며, 언론의 자유와 언론인들의 생존권 침해를 초래하였다. (···)
국가는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에서 동아일보사 및 언론인들을 탄압하여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고, 언론인들을 강제로 해임시키도록 한 행위에 대해 동아일보사 및 해임된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언론자유 수호 노력에 대해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통해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동아일보사는 비록 정부의 편집권에 대한 간섭과 물리적인 압력, 그리고 광고탄압을 통한 경영상의 압력 등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피해자의 처지에 있었다 하더라도 결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하고, 또 정부 압력을 기화로 언론인들을 대량 해임시킨 책임을 부인키 어렵다. 그럼에도 이후 민주화의 진전으로 언론자유가 신장되었고, 권력의 간섭이 사라진 후에도 이들에 대한 아무런 구제조치도 취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법률적 의무 여부를 떠나 피해자인 해직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을 통해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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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기구가 아닌 진실화해위는 위와 같은 이유로 정부와 동아일보사가 동아투위 위원들에게 “명예회복과 피해회복을 통해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의 그런 결정은 동아투위가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받아낼 수 없던 것이었다. 어쨌든 이명박 정부 때 공식기구의 그런 ‘결정’이 나오자 동아투위 위원 103명은 정부를 상대로 민사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6부(재판장 부장판사 이승호)는 2009년 6월 21일부터 2011년 1월 14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동아투위 위원들이 진실화해위 결정대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해직 되었다는 사실은 인정되지만 소멸시효가 지나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는 없다”고 판결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까지는 소멸시효가 중단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김영삼 정부부터는 그렇게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동아투위 위원들이 항소하자 서울고법 민사15부(재판장 부장판사 김용빈)은2011년 7월 20일부터 2012년 3월 23일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열린 공판 끝에 1심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었으므로 국가는 그 손해를 위자할 의무가 있으나 소멸시효의 완성으로 국가는 원고들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동아투위는 2012년 4월 10일 대법원에 상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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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언론인들이 1974년 10월 24일 편집국에서 유신정권의 탄압에 맞서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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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24일 대법원 제2부(주심 대법관 신영철)는 사실상 원고 전원에 대해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에 따라 생활지원금을 받은 원고들은 민법상 화해를 한 것으로 보아 소송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한편, 진실화해위에 진상조사를 신청한 50명과 그렇게 하지 않은 53명 가운데 생활지원금을 받지 않은 14명에 대해서만 원심 파기환송 판결을 했다. 그런데 재판부는 그 14명에 대해서도 동아일보사가 진실화해위 결정에 관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승소한다면 그 14명은 자동적으로 패소한다는 ‘예고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은 2014년 5월 29일 대법원이 확정한 ‘동아일보사 승소’로 추인을 받았다. 그렇게 됨으로써 동아투위 ‘103인 소송’은 전원 패소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사법부의 ‘갈팡질팡’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동아투위 103명이 제기한 국가 상대 민사배상 소송 1심과 2심에서 재판부는 ‘소멸시효 완성’이라는 이유로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도 박정희 정권이 동아일보사에 광고탄압을 가하는 한편 사주를 강압해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주역 113명을 강제해직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런데 진실화해위가 면밀한 조사를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한 뒤 국가와 동아일보사에 대해 사과와 배상을 권유하는 결정을 내리자 동아일보사는 행정소송을 통해 그 결정을 ‘허위사실’로 확정해버렸다.
사법부 안에서 이렇게 엇갈린 판결이 나온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명박 정부 시기에도 이런 사례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유독 아버지의 유신체제를 세습한 박근혜 정권 아래서 ‘사법부의 망나니 칼춤’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박정희 정권이 저지른 언론탄압과 인권유린을 없었던 일로 돌리려는 권력의 ‘기획’에 어용화한 사법부가 순응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진실화해위의 결정에 대해 대법원이 동아일보사의 손을 들어준 이튿날인 5월 30일자 동아일보는 8면에 “대법 ‘동아일보 해직사건 과거사위 규명 결정은 잘못’”이라는 제목으로 가로 2단 기사를 내보냈다. 그 회사로서는 희희낙락해야 마땅한 판결이 그렇게 시답잖은 기사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일까?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대량해직 당시 사장인 김상만, 그의 장남으로 사장과 회장을 지낸 김병관, 그의 장남인 현재 사장 김재호에 이르기까지 동아투위 113명 강제해직과 민중의 열렬한 성원을 배신한 행위에 대해 단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았다. 김재호는 행정소송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법원의 결정을 뒤엎고 집요하게 ‘공작’을 거듭한 끝에 진실화해위의 결정을 ‘거짓’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동아투위 사람들은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 사주의 추악한 야합 때문에 거리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광고탄압으로 인한 경영난 때문에 해고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만인의 상식’으로 인증된 진실, 곧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투쟁 때문에 박 정권이 광고탄압을 했고 결국 대량 강제해직을 자행했다는 사실을 없었던 일로 만든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그런 죄과와 악업 때문에 지난 40년 동안 민주진보세력은 물론이고 당시 격려광고를 통해 열정적으로 민중운동을 벌였던 이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부역하고 ‘조·중·동’의 말석에서 권력에 아부하기를 일삼았다. 이제 동아일보사는 사법부의 ‘날라리 판결’을 기화로 ‘동아투위는 없다’고 주장할 것인가? 앞에 적었듯이 동아투위는 40년을 의연하게 싸워온 엄연한 실체이다. 동아일보 사장 김재호는 ‘이 찰라의 승소’를 방패삼아 동아투위를 부정하고 권력에 더욱 아부하는 길로 치달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깨어 있는 국민은 명확히 알고 있다. 그의 증조부인 친일파 거두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국민신문’에서 일가의 사유물로 둔갑시킨 사실을. 그리고 그의 장남 김상만이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한 민중의 열렬한 성원을 배신하고 박정희 정권의 압력에 굴복해 사원 113명을 강제해직한 역사를. 또 그의 장남 김병관이 1987년 6월 항쟁 직후 동아투위에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가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계자가 되자 재빨리 그 손을 거두었던 일을. 그리고 김병관의 아들인 김재호가 동아일보를 권력의 나팔수로 만들고 종편인 채널A를 ‘기레기 방송’으로 전락시킨 죄과를.
양심을 팔아버린 사법부가 어떤 판결을 내렸든지 간에 동아투위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지난 40년 동안 한결같이 그랬듯이 자유언론을 실천하고, 궁극적으로 나라의 민주화와 겨레의 통일을 이루는 것은 동아투위의 영원한 과제이다.
(이 글은 뉴스타파 블로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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