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가 좋을 때는 대화를 책임진 남측의 통일부와 아태, 민화협, 민경련 등의 모자를 쓴 북측의 통일전선부가 전면에 나서 실력을 발휘하곤 한다. 남북관계를 담당하는 이른바 ‘통-통 라인’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어그러지면 군과 정보기관의 목소리가 커지고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 자리잡은 한반도가 여전히 ‘정전 상태’에 처해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최근 남북관계가 악화되자 북한의 군사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보도들이 나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한다. 북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연일 미사일 발사와 사격훈련이 벌어지는가 하면 ‘남한 간첩’들을 내세운 기자회견이 열리기도 한다. 남북의 군과 정보기관이 본색을 드러내는 셈이다.
고사총 총살과 반역죄 처형 ‘첩보’
국가정보원이 13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대면보고하고, 통일부 기자단에게 ‘북한 내부 특이동향’이라는 무려 11쪽에 걸친 친절한 자료를 제시하며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숙청 사실을 공개했다. 특히 “고사총으로 총살했다는 첩보도 입수 되었다”, “‘반역죄’로 처형되었다는 첩보도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북한 내부의 특이동향을 브리핑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첩보 수준의 동향까지 여과없이 브리핑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보와 첩보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정보는 첩보자료들을 평가, 분석, 종합, 판단하는 과정을 거쳐서 ‘가치가 평가되고 체계화된 지식’이지만 첩보는 ‘단편적 불규칙적 지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통상 국가기관이 첩보를 대외적으로 발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북한의 전 통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 전 당비서의 사망 ‘첩보’는 수없이 나돌았고, 언론에 보도된 것만도 여러 차례다. 국정원이 맨날 김경희 사망 첩보를 언론에 공개했다면 아마 조롱거리가 됐을 것이다. 국정원이 현영철 관련 첩보를 공개하자 ‘정치적 의도가 뭐냐’, ‘무슨 뉴스를 덮으려고 이런 기사거리를 제공하느냐’는 비아냥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매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고사총 총살’, ‘반역죄 처형’을 기정사실인 양 대문짝만하게 보도하고 있다. 종편은 지치지도 않고 종일 ‘카더라’ 방송으로 도배하고 있다. 정보기관은 확인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북한 첩보를 의도적으로 흘리고 언론은 검증은 커녕 더 부풀려 받아쓰는, 낯뜨거운 ‘아니면 말고’식의 북한 보도의 악습을 생생히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전의 달콤한 유혹
사실 국정원은 2013년 12월 3일 장성택 숙청 국회 정보보고로 큰 재미를 본 적이 있다. 대선 댓글 공작과 화교 탈북자 간첩 조작 사건이 드러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원세훈 국정원’은 이 정보보고로 극적으로 회생했다. 그날은 여야가 국정원 개혁특위에 합의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장성택 숙청 정보보고로 개가를 올린 이후 ‘남재준 국정원’은 ‘김정은 체제 불안정론’을 퍼트리며 자신의 입지를 다져갔고, 이에 따라 박근혜 정부는 사실상 출발부터 ‘북한 붕괴론’에 근거해 대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는 건재했고, 오히려 박근혜 정부의 최대 치적거리라던 외교분야에서 최근 커다란 구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빛샐 틈 없는’조차 없다던 한미동맹이 무색하게 미국은 한국보다는 일본과의 동맹을 우선시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고, 한국과 중국의 공동의 적으로만 알았던 일본의 아베 총리는 반둥에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악수를 나누고 미국 상하양원에서 연설했다. 더구나 하필 바로 그 시점에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1주기를 비켜가며 별볼일 없는 해외순방에 나섰다가 구설수를 키웠다.
이같은 상황에서 국정원은 4월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이 러시아 전승절에 참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북한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해 국정원은 웃음거리가 됐다. 외교부는 부랴부랴 한.미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을 추진해 지난 5일 북한과 조건 없는 ‘탐색적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발표했고 이어 13일 국정원의 현영철 처형 첩보가 공개됐다.
친절한 국정원, ‘눈두덩을 내린 모습’?
국정원은 최근 6개월동안 김정은 제1위원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 한광상 당 재정경리부장 등이 “사라져 버렸다”며 “공포통치의 정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간부들 사이에서도 내심 김정은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친절한 ‘해석’까지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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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이 13일 제공한 '북한 내부 특이동향' 자료에 포함된 <노동신문> 4월 26일자 사진. 인민군 훈련일꾼대회에서 현영철이 '눈두덩을 내린 모습'이라고 노란선으로 친절하게 표시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
더욱 가관인 것은 김정은 제1위원장이 참석한 ‘훈련일꾼대회’에서 현영철이 ‘눈두덩을 내린 모습’이라며 5월 1일자 <노동신문> 사진을 제시했다. 국정원이 숙청 사유 중 하나라며 노란 원으로 친절하게 지목해준 현영철이 “졸고 있는 불충스런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기자의 편견 때문일까?
또한 국정원이 현영철의 최근 위상과 동정으로 “2014년 11월 구소련 야조프 전 국방상 생일행사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을 면담”하고 “2014년 4월 제4차 모스크바 국제안보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핵전쟁 불사’ 내용의 연설을 하고, 러시아 국방장관을 면담”했다고 적시했다. 보수언론들은 김정은 제1위원장의 러시아 전승절 불참과 현영철 숙청을 연관지은 보도들을 쏟아내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당장 현영철 숙청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반론이 제기지고 있다. 러시아의 한국 전문가 게오르기 톨로라야는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과연 행사중 졸았다는 이유로 숙청했다는 논거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면서 “특히, 러시아가 현재 북한에 무기 공급을 금지하는 제재조치에 동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북한에 S-300을 공급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실장은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은 기록영화에 이틀전(11일)까지 계속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처형’ 또는 ‘숙청’되었다고 국정원이 발표하고 있어 정보분석의 기본적인 원칙이 무시되고 있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또한 “‘숙청’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될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극단적인 처벌을 의미한다”며 “왜 정부가 아직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이 시점에 성급하게 내놓았는가”라는 의문도 제기했다.
광복 70주년, 남북은 정보 전쟁 중?
최근 북한과 한미 간에는 치열한 공방이 수면 위아래로 벌어지고 있다. 북한은 인공위성 발사를 예고하는가 하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수중 시험발사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전문가들은 실제로 오는 10월 10일 당창건 7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나 핵실험을 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앞서, 지난 3월 26일에는 ‘남측 간첩’ 두 명을 기자회견에 내세우고 중국 단둥지역 국정원 거점이 30개 정도라고 밝히기도 했다. 단순한 남측 억류자 개인의 일탈행위가 아닌 남북 정보기관 간의 대규모 정보전쟁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난 5~7일 민간 차원의 남북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 대표자회의는 중국 선양(심양)에서 회의를 갖고 6.15, 8.15공동행사 추진 등을 담은 공동보도문을 채택, 8일 공동발표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측은 이를 보도하지 않고 있다가 12일에야 남측 정부가 “대화 타령을 목이 쉬도록 늘어놓고”있다며 5.24조치 해제와 한.미 연합군사연습 중단부터 하라고 반격했다. 6.15공동행사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다가 8.15공동행사는 반드시 남쪽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남측 정부에 ‘의구심’을 보인 것이다.
다시 국정원은 친절하게 현영철 처형 첩보를 흘려 ‘김정은 체제 흠집내기’로 이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이래서야 광복 70주년, 6.15공동선언 15주년을 맞아 분단시대를 하루라도 빨리 마감하자며 남북교류를 추진하고 있는 민간의 노력이 설자리가 있겠는가?
분단 70년을 맞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에 노벨평화상 수상자 두 명을 포함한 세계 여성평화운동가들이 DMZ(비무장지대)를 걸어서 건너오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는 여전히 ‘관계 부처 협의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분단이 외세 탓만은 아니었듯 분단의 고착화도 남탓만은 아니라는 현실이 비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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