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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 전문 변호사가 됐어요. 연행 당한 사람을 빼내주는 게 아니라, 연행을 당하는 변호사.” 권영국 변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최근 권 변호사는 세월호 1주기 집회에서 인권침해감시활동을 하다 연행됐다가 풀려났다. 지난 2013년 7월 대한문 집회에서의 연행에 이은 두 번째다. 당시 그는 경찰의 집회 방해에 항의하다 연행됐다. 두 번 모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가 기각됐다.
권 변호사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즉각 규탄성명을 냈다. 그를 변호하기 위한 변호인에 이름을 올린 변호사는 50명이 넘었고 서울중앙지법 영장실질심사 법정에는 34명의 변호인이 출석했다. 이대순 변호사는 “권 변호사를 구속한다면 변호사업계 전체의 업무수행을 어렵게 만드는 잘못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권 변호사는 영장실질심사가 열린 다음날 오전 2시 10분께 풀려났다. “신경이 굉장히 곤두서있었어요. 경험상 결정이 늦게 나면 영장 발부에요. 그래서 사실은 자포자기 상태였어요. 구속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구속의 의미가 신경을 건드렸지요. 내가 검찰과 여러 건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데 판사가 검사의 손을 들어준다는 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인식될 수 있죠.”
검찰뿐 아니라 기업도 그를 싫어한다. ‘삼성전자서비스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티브로드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무효 소송’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이주노조 설립신고 반려 취소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등이 적힌 서류가 사무실에 가득했다. 지난 달 30일 오후, 서울 서초동 해우법률사무소에서 권 변호사를 만났다.
경찰과 검찰, 기업이 싫어하는 변호사
권 변호사는 2002년 권두섭, 강문대, 김영기 변호사 등과 함께 민주노총 법률원을 설립하고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민주노총 법률원은 노동운동도 법으로 대응하는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 변호사의 나이 마흔이었다. 변호사가 되자마자 이를 택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애초 3년 정도는 집에 ‘돈을 벌어다 줄’ 생각이었다. 실제 사법연수원에 있을 당시 괜찮은 법률사무소에서 제의도 받았다.
“조건이나 이런 건 다 이야기가 됐었고 서로 얼굴만 확인하면 되는거였어요. 법률사무소 면접을 가는 날 권두섭 변호사가 연락이 왔어요. 면접 직전에 서초동에서 잠시 만났지요. 민주노총 법률원 계획서를 들고 왔더라고요. 순간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거죠. 면접을 보류하고 집으로 갔어요. 한 3주 정도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어차피 할 바에야 지금 하자고 결정을 내렸어요.”
이 결정에는 노동운동 경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한 이후 방위산업체 ‘풍산’에 입사했다.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려다가 인사조치됐고 1988년 회사 공장 폭발사고로 노동자가 숨지자 항의하는 대자보를 붙였다가 해고됐다. 몇 년 동안 복직을 위해 노력했지만 회사에 돌아가지는 못했다. 복직에 실패한 후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노동자를 위한 변호인이 되겠다는 생각보다 당장의 생계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생각은 했어요. 결국은 노동자에게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풍산에 있을 때 한 노동자가 그랬어요. ‘당신은 대학 나온 사람 아니냐. 상황이 불리해지면 당신은 얼마든지 떠날 수 았다.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느냐’ 그 말이 굉장히 가슴에 와서 꽂혔고 ‘여러분이 나를 밀어내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지 않겠다’고 답했어요. 배신하지 않겠다는 거죠.”
그는 인터뷰 내내 ‘믿음’ ‘배신하지 않겠다’는 말을 수차례 강조했다.
“당신을 어떻게 믿고 따르겠냐”던 노동자
권 변호사는 노동자들의 법률대리인이기도 하지만 노동문제,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집회, 기자회견 현장에서도 늘 함께한다. “권영국이 여러 명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맡고 있는 법정 싸움만 챙겨도 시간이 부족할텐데 굳이 현장에 나오는 까닭을 물었다. 현장에 나가지 않으면 굳이 연행되고 구속영장이 청구될 이유도 없다.
“사무실이나 법정은 뒤처리하는 곳이에요. 현재 진행형인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되요. 젊은 변호사들에게 그래요. 현실을 정면으로 봐라. 그래야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바꾸어내야 하는지 문제의식도 갖고 되고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도 갖게 된다. 사건으로 만나게 되면 늘 타인의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민주주의 후퇴나 경찰 인권침해, 노동현장의 권리침해가 타인의 문제일까요.”
그는 애초 이런 성격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체제 순응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강원도 탄광 노동자의 아들로 살아왔고 학창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전부다. 그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선배들이 교복자율화 투쟁을 벌였어요. 저는 공부하기 싫은 선배들이 자기 과시 하고 싶어서 하는 시위로 보고 동참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마주한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청재킷을 입은 남학생이 경찰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걸 봤어요.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도 그 남학생은 '살인마 전두환 물러나라'고 외쳤어요. 데모는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배웠는데. 저렇게 피흘리면서 외치는 이야기가 뭐지?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은 서 있었어요. 그때부터 문제의식을 가지기 위해 일부러 수업도 빠져보고 일탈을 했던 것 같네요.”
“사법정의에 대한 환상을 버린다”
노동변호사·인권변호사로 살아온 지 13년째, 그는 일이 힘들다거나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다만 갈수록 친권력·자본적으로 구성되는 사법부, 그리고 그 운동장에서 싸워야 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쌍용차 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대표적이다. 당시 대법원은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2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개의 경우 2심 법원의 판단이 대법원까지 이어진다. 2심 법원까지는 사실관계를 다투는 것이고 대법원은 법리적인 해석만 다투기 때문이다. 당시 권 변호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졌다. 쌍차 정리해고 사건 대법원에서. (중략) 대법원에 일말의 기대를 했다는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참담하다. (중략) 오늘로서 나는 천민자본과 이를 옹호하는 권력의 카르텔이 너무도 강고한 이 땅에서 노동자들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겠다는 망상을 버리도록 한다. 이 땅을 우리 후손들에게 그래도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민중이 진정으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모색을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정치적 모색’에 대해 물었다. 현실 정치 참여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거리에 나가서 정부를 비판하거나 노동기본권을 침탈하는 자본을 규탄하거나 또는 법정에서 권리침해를 구제하는거나, 제도정치를 하거나 모두 정치적 행위라고 봐요. 경우에 따라서 가능하다면 제대로 된 정당을 만들 수도 있는 거고 정말 필요하다면 국회의원 출마도 못할 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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