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태안화력 비정규직 노동자 추모문화제... 대통령실 행진 후 강훈식 비서실장에 요구안 전달
영정 속 동생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형은 그렇지 못했다. 국화 한 송이를 놓고 힘겹게 연단을 내려올 수밖에 없던 유족 대신, 6년 전 같은 태안화력에서 아들을 잃은 또 다른 유족이 울분을 터뜨렸다. 고 김용균의 어머니는 고 김충현의 유족을 위해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쥐었고, 국회의원들 앞에서 눈물로 호소했으며, 노동자들과 함께 대통령실로 행진해 요구안을 전달했다.
"참담한 심정입니다. 아들이 죽은 바로 옆 건물에서 같은 이유로 기계에 끼어 김충현님이 사망했습니다. 사고가 난 날 현장에 들어갔습니다. 기계 뒤편 말라버린 선혈의 흔적을 보니 용균이가 죽어가며 흘린 피를 보는 듯 가슴이 메었습니다." -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6일 오후 3시 서울역 3번 출구역에서 열린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추모문화제. 연단에 오른 김 이사장은 "나라를 발전시킨다는 명분 뒤에 가려져 온, 부서지고 터져가며 죽어간 수천 명 노동자를 절대 잊어서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언제까지 남의 일인 것처럼 강 건너 불구경을 할 건가"라며 "산업안전보건법을 더 넓게 허용하고 중대재해처벌법을 강화해 산재 사망이 없는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 국민 모두가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라고 촉구했다.
이어 "문재인 정부는 (아들이 숨진 후 했던) 약속을 이행했다고 국민 앞에 설명했었고 저도 어느 정도 안전한 현장이 된 것 같아 조금은 안심했다"라며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그때 했던 약속이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고 김충현님의 죽음으로 우린 확인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용균이의 추모 사진전 때 국회에서 만난 이재명 당시 당대표의 말을 기억한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다친 왼팔의 아픔을 이야기했었다"라며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님과 나라의 녹을 먹는 힘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아들 용균이와의 약속을 발전사 비정규직을 살리는 마중물로 삼아달라. 비정규직은 사람이 아닌 듯한 현대판 노예제도를 없애달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 향한 쓴소리 "내가 김충현이다"
김 이사장의 발언 뒤, 곧장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학영 국회부의장과 박홍배 의원이 연단 위 영정 앞에 섰다. 이 부의장은 "끝없는 죽음 앞에 저희들도 황망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죄송한 마음"이라며 "부족했던 점을 다시 돌아보면서 엄중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제3의 김용균, 제2의 김충현이 생기지 않도록 이재명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연단 아래에선 "내가 김충현이다"라는 항의가 터져 나왔다. 이 모습을 지켜본 김 이사장은 무대 뒤편에 있던 이 부의장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더불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 국회 산자위원장이었던 이 부의장과 마주한 바 있었던 김 이사장은 눈물을 흘리며 "산재 없는 안전한 사회"를 호소했다. 김 이사장의 손을 붙잡은 이 부의장은 허리를 숙이며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이날 추모문화제에는 나흘 전 숨진 김충현씨의 동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참석해 고인을 애도하고 앞으로 이 문제를 계속 공론화하겠다는 의지를 공유했다.
"마지막으로 고인이 읽었던 책은 <이재명의 기본소득>이란 책이었습니다. 생전에 새로이 대통령이 된 분을 지지했고 (윤석열) 탄핵 집회에도 참여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때 고인이 겪었던 불합리와 힘들었던 일상 속에서도 희망을 가졌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 고인의 동료 김영훈 공공운수노조 한전KPS비정규직지회장
김 지회장은 "살아생전 그는 장인의 반열에 오른 기술자였고 주변에 항상 선한 영향력을 전하며 어떤 때는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주며 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던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라며 "이번 사망사고는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원청이 관리시스템의 부재를 만들어 내고 그 무관심 속에서 일어난 구조적 타살이다. 유가족 분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철저한 진상규명과 확실한 책임자 처벌, 그리고 원청의 진심 어린 사죄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용균 죽음 후 약속만 지켰어도..."
최진일 대책위 공동상황실장은 "선반이란 기계는 단면이 원형인 물체를 다루는 데 적합한데 현장을 확인했을 때 단면이 원형이 아닌 물체를 고정하기 위한 부품인 단동척이 없었다. 현장 어디서도 그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관리소장도 그게 어떤 부품인지도 모를 정도였다"라며 "또 방호울 두 개가 있었으나 이는 말려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아니었고 가공 시 발생하는 쇳가루가 튀는 것을 막는 그 정도 역할만 하고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긴급작업 명목으로 의뢰자가 고인을 직접 찾아와 반복해 지시를 해왔다. 회사는 '작업의뢰서가 없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그게) 이번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반복됐다"라며 "(작업의뢰서를) 승인하는 과정이야말로 위험성이 있는지, 위험하다면 어떻게 조치할지 검토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 없이 고인은 매번 모든 것을 책임진 채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더해 "고인이 작성한 서류를 보면 (그가 속한 2차 하청업체인) 한국파워O&M의 작업이 아닌 다른 작업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다. 하청을 준 한전KPS에서 직접 해야 할 일이 대부분 고인의 작업장으로 의뢰됐다"라며 "이건 계약위반이자 전형적인 불법파견"이라고 강조했다.
엄길용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은 "청년 김용균의 죽음 이후 어머님이 중심이 돼 긴 세월, 단식도 마다 않는 모진 투쟁을 통해 중대재해처벌법을 만들었다. 2인 1조 작업과 인력 충원, 발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약속들이 있었다"라며 "이 약속만 지켜졌어도 김충현 동지의 죽음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윤석열 정권이 아닌 문재인 민주당 정권에서 만들어진 약속이다. 도대체 6년 동안 무엇을 한 건가"라며 "이제 그 약속을 늦었지만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제 (집권했으니) 충분히 책임질 수 있잖나. 우리는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 김용균 사망사고 진상규명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 간사였고 21대 대선에 출마했던 권영국 민주노동당 대표는 "김용균 사망사고 이후 특조위와 정부, 발전사는 3년 간 이행점검을 진행했다. 특조위는 안전관리시스템이 자회사와 2차 하청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할 것이란 점을 우려했다"라며 "2차 하청은 1년 몇 달 단위로 업체명과 사장이 변경됐고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고용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처우도, 안전대책도 차별적으로 다뤄진 결과 김충현님은 2차 하청 중에서도 가장 주변화된 작어베서 홀로 일하다 참변을 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유족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철저히 사고 원인을 규명할 것을 촉구한다"며 "더 늦기 전에 노동과 안전을 차등하는 하청 구조를 폐기하고 정규직화 권고를 이행하기 바란다. 그래야 죽음의 행렬을 막을 수 있다"라고 촉구했다.
유족 만난 강훈식 "중처법 등 엄중히 처리해야"
추모문화제 마무리 후 참석자들은 "더 이상 죽지 않게 대통령이 해결하라" 등이 적힌 피켓을 든 채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했고, 요구안을 강훈식 비서실장에게 전달했다. 고인의 영정 바로 뒤에 유족과 김미숙 이사장이 나란히 섰다.
대통령실 앞에서 이들을 만난 강 실장은 "안전 조치가 있었다면 충분히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 중대재해처벌법 등으로 엄중히 처리해야 할 것"이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재명 정부이므로 주신 서한을 잘 전달해 조처가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유족과 대책위가 전한 요구안에는 아래 내용이 담겼다.
▲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노조·유족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 구성, 서부발전·한전KPS·한국파워O&M의 사과와 유족 배·보상) ▲ 6년 전 약속 이행(한전KPS 하청노동자 직접고용 정규직화, 발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권고 이행, 노동 안전을 위한 연료·환경설비 운전 및 경상정비 분야 노동자 직접고용 정규직화 ▲ 현장 인력 확충 및 안전 대책(위험업무 2인 1조, 관리 감독 사각지대 해소, 발전소 폐쇄를 핑계로 채우지 않고 있는 인력 충원, 발전소 전체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실시) ▲ 발전소 폐쇄 관련 대책 마련(발전소 폐쇄 관련 모든 노동자 총고용 보장, 공공재생에너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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