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전 '민간학살' 피해자 언론 인터뷰가 열리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하며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 |
ⓒ 이희훈 |
▲ 항의 집회하는 고엽제 전우회 베트남전 '민간학살' 피해자 언론 인터뷰가 열리는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에서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월남전 참전 용사들이 모욕당했다'고 주장하며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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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용사 모욕하지 마라" "민간인 학살 운운, 거짓말 하지 마라"
7일 오후 서울 시내 모처. 커튼을 쳐둔 창밖으로 날선 구호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방한 중인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 떤 런(남·64)씨와 응우옌 티 탄(여·57)씨가 기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 이날 오후 7시에 조계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베트남전 관련 사진전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리셉션 행사가 베트남전 관련단체의 압력으로 취소된 터였다.
"내가 있던 자리에서만 65명이 한국군에게 희생당해"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떤 런(NGUYEN TAN LAN)씨와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씨가 언론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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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당시 한국 군인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두 사람에게 면전에서 자신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참전 군인들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여러분들에게 한국 군인들이 우리 베트남에 있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싶습니다. 참전 군인들이 저를 보시기가 좀 껄끄러울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좀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응우옌 떤 런씨. 그는 15살이던 1966년 2월 13일을 잊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과 이웃사람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아대던 군인들 어깨에 붙어있던 호랑이 마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 군인들은 우리 가족을 포함한 25가구의 마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고개를 숙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 5분 정도 지난 후, 어떤 군인이 크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고 수류탄이 떨어졌어요. 사방에 포연이 자욱한 가운데 주변에는 팔이 잘린 사람, 하반신이 잘린 사람, 창자가 흘러나오고 뇌수가 흘러나온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어요. 부모들은 자식의 이름을 부르고, 자식은 부모를 찾는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응우엔 떤 런씨는 이날 어머니와 13살이던 여동생을 잃었다.
"제가 있던 자리에서만 65명이 한국군에게 희생당했습니다. 바로 제가 목격자이고 생존자입니다. 이 자리에서 저는 제 심장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만 말을 하는 겁니다."
"총 쏘고, 불 지르고, 칼로 찌르기까지..."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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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티 탄씨 가족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은 1968년 2월 12일이었다.
"당시 저는 8살이었지만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국군들이 입었던 얼룩무늬 군복을 기억합니다. 몇 명의 군인들이 제가 숨어 있던 방공호에 폭탄을 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나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같이 있던 이모가 나가라고 해서 방공호를 나갔는데, 한국 군인들이 총을 쐈습니다.
오빠는 덤불숲에 엉덩이가 날아간 채 쓰러져 있었고, 언니는 대나무 숲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이모는 집에 불을 지르려던 군인을 말리려다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다섯 살이었던 제 동생은 숨을 쉴 때마다 쿨럭 쿨럭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때 전 너무 어려서 동생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응우옌 티 탄씨 마을에서는 모두 74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학살 당시 장에 갔던 어머니도 시신무더기 속에서 발견됐다. 그렇게 응우옌 티 탄씨는 고아가 됐다. 한쪽 엉덩이를 잃고 장애인이 된 오빠와도 헤어진 응우옌 티 탄씨는 다낭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퇴원한 뒤에는 작은 아버지 아이들을 돌보며 10년을 살았다고 했다. 8살에 고향을 떠난 그는 18살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버릴 수가 있나요? 그때는 사는 게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순간 순간 죽고 싶었어요. 정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마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저도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며 공부도 할 수 있었을 텐데요."
끝내 응우옌 티 탄씨는 울음을 터트렸다.
"위로 원했는데, 한국와서 이런 일 겪을 줄은..."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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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한국에 와서는 좋은 분들을 만나서 위로를 받고 싶었을 뿐입니다. 참전했던 군인 분들도 만나고 싶었어요. 그분들로부터도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한국까지 와서 이런 일을 겪게 될지는 몰랐습니다."
이날 베트남 참전단체들은 응우엔 떤 런씨 본인과 아버지, 형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 활동을 했다는 플래카드를 걸어놨다. 정당한 전투행위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듯 보였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응우엔 떤 런씨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학살이 일어났을 때 저는 겨우 15살이었고,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집에 있었을 뿐입니다. 설사 백보 양보해서 참전군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쳐도 다른 죽음들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나는 그렇다치고 응우옌 티 탄씨가 당한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다 여자들과 아이들뿐이었는데…."
이날 통역을 맡은 평화운동가 구수정씨는 "베트남이 통일된 후 과거 베트콩 활동을 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국가차원에서 철저히 이뤄졌다"라면서 "베트남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분들이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따이한' 제사를 지냅니다"
▲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인 응우옌 떤 런(NGUYEN TAN LAN, 오른쪽)씨와 응우옌 티 탄(NGUYEN THI THANH)씨가 언론 앞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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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떤 런씨는 방한 첫날 나눔의 집에서 만났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서 같은 전쟁피해자로서 동질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분들도 저희들과 똑같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분들은 일본군에 의한 피해자들이고 저희는 한국군에 의한 피해자라는 점, 한 가지만 달랐습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의 시신을 채 수습하지 못했던 것이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다는 응우옌 티 탄씨는 가족묘를 만드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날이 되면 우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제사를 지냅니다. 그 제사를 어머니 제사, 동생 제사, 언니 제사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제사를 따이한(大韓) 제사라고 부릅니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학살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데도, 한사코 이를 부인하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베트남전 관련 단체들의 태도를 보면서 베트남전이 끝난 지 40년이 흘렀지만 아직 기억 속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응우옌 떤 런씨와 응우옌 티 탄씨의 조용한 흐느낌 소리 위로 스피커에서 나오는 군가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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