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딸 덕분에 새로 태어난 삶
작년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완전 이사를 해 버렸던 터라 올해 독일 방문은 숙박할 곳이 문제로 등장했다. 오래된 독일친구 틸리케가(Thielicke家)에 이 얘길 했더니 아주 흔쾌히 허락했다. 이들은 될 것에는 ‘예스’하고, 안 되면 처음부터 상대방이 민망할 정도의 단연하게 ’노오!‘ 해 버린다. 이들의 ‘예스’ 덕택에 한 달이 훨씬 넘은 체류기간이었을지라도 변함없이 배려해 주는 이 가족의 마음과 행동에 나는 다시 한번 감동을 먹었다.
이 독일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3명의 자식들은 정상인이나 첫 딸인 브리트(Brit)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이 딸 때문에 이들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진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젠 이 딸 때문에 이들의 삶이 오히려 공적인 삶으로 변모했다. 어떤 공적인 삶인가? 그리고 브리트를 통해서 독일의 (정신지체) 장애자들도 함께 보자.
먼저 필자가 독일에 살았을 때 경험했던 브리트의 얘기다. 어느 날 뜬금없이 브리트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용인즉, ‘네가 불쌍해서 자기가 5마르크(지금의 유로)를 빌려 주겠으니 반드시 이자를 꼬박꼬박 달라’는 거였다. 앞뒤의 얘기를 맞추어보니, 10일간 돈이 좀 급하게 필요하다는 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엄마(Angelika) 아빠(Dirk)로부터 들었단다. 내가 불쌍해서 도와 주겠다고 하니 어쨌든 예쁜 마음이지 않는가?
그녀의 엄마 안겔리카(Angelika)와 약속이 있었던 날이었다. 집에 당도했더니 브리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울 엄마가 무지 바쁜데 너 왜 왔느냐?”고. 하지만 이 가족들과 긴 연륜이 쌓였다 보니 이렇게 앙탈을 부리는 브리트를 다독거리는 처방전까지 나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터다. “에구! 브리트의 허락 없이 내가 마 그냥 와 버렸구나! 다음부터는 꼭 브리트에게 허락 받고 올게, 오늘만은 허락 좀 해줘!” 하면 조금 전의 앙탈이 무색할 정도로 금방 헤헤하면서 웃는다.
이런 나의 경험 외에도 그녀에 관해 들은 얘기도 수두룩하다. 어느 날은 느닷없이 시 의료보험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를 휴양치료를 보내달라고 조른다거나, 시 공원묘지의 꽃들이 사라졌다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거나 등등.
브리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랑했던 장애자 남친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극장도 가고, 함께 식사도 하면서 무르익은 사랑을 몇 년간이나 키우다가 유감스럽게도 헤어지게 되었단다. 그녀의 남친이 다른 장애인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별을 맞이한 브리트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이 상처를 치유하는데 장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후에 엄마 안겔리카가 들려주었다.
그녀가 18살 때의 옛날 얘기도 해보자. 브리트는 스스로 신문에다 남자친구 구한다는 광고를 내었다 한다. 이 광고를 통해서 40대의 휠체어 탄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단다. 드디어 이 남자를 만난 뒤 브리트 왈, “지체장애자에다가 너무 늙어서 퇴짜를 놓았다”고! 그녀의 엄마 안겔리카가 브리트의 정신 연령은 4~5세(한국 나이로는 6~7세)세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을 보면 40~50세 정도라고 밝혔다. 엄마의 공이 숨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루돌프 슈타이너가 세운 인지학을 강조하는 발도르프 학교에 보냈던 결과라고 언급했다.
지금까지는 장애인 브리트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였다. 하지만 브리트와 함께 사는 엄마 안겔리카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이 딸 때문에 엄마는 늘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장애인 단체에 살고부터는 스트레스를 좀 덜 받는다고. 집에 함께 살 때는 그녀의 괴성과 기이한 행동들을 종일 받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브리트가 남독일의 이모네로 며칠 간 적이 있었다. 안겔리카는 브리트 없이 살아보는 그 자유로운 며칠을 ‘천국의 날’로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니, 브리트와 함께 사는 하루 24시간이 어느 정도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딸이 성장해 가자 엄마 안겔리카는 고민에 빠졌다. 장애인인 딸일지라도 집안에서만 보낼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작은 역할이나마 할 수 있는 길을 원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엄마는 딸 때문에 장애인 단체인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작은 그룹 3개로 시작했던 이 단체가 지금은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4개의 건물을 이룬 촌이 되었다. 여기에는 장애자들이 서빙하는 카페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카페로 성장했다.
이 촌 안에 있는 브리트가 동료 3명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방문했다. 여긴 정신지체 장애인들, 그리고 24시간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중증 장애인인 청년도 있었다. 이들의 공동체의 내부 모습은 우리의 중류층 생활 양상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것은 틸리케가(Thielicke家)의 사비가 다가 아니다. 대개는 주정부에서 지불되는 장애비로 충당 된다.
이들은 장애등급에 따라 주정부에서 매달 장애비를 지급 받는데 그 금액을 들어보니 실로 엄청나다. 1인당 3000유로에서 장애 등급이 높으면 1만 유로까지 받는단다. 주 정부에도 장애자들이 이들뿐만이 아닐 터인데…. 엄청난 세금들이 장애복지로 흘러들어 간다는 뜻이다.
엄마 안겔리카의 견해는 풍족하게 돈을 받는 이들이 단지 집안에만 박혀 살게 할 것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장애인들에게 말이다. ‘장애인도 사회 안에서 작은 역할을 맡고 인간적인 존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정신지체 장애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정원사로, 어떤 이는 유스호스텔의 부엌에서 일을 하거나, 어떤 이는 양로원에서 일한다. 말하자면 단순 노동에 속하는 일이다. 집에 돌아오면 이들의 공동체 안에는 늘 도우미들이 상주해서 식사를 챙겨준다. 이들은 공동체 일원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고 나머지는 도우미들의 몫이다. 물론 중증 장애인들은 하루 종일 도우미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브리트도 동료들과 함께 이 공동체에 살면서부터 사회성이 훨씬 많이 길러진듯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장애인 증상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증상 중 하나로 브리트는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전화를 해댄다. 나 역시 겪었다. 다 외출하고 혼자 이 집에 머물러 있었을 때 하루에 수십 통의 브리트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뭔가 불안한 심리가 그녀 안에 요동치면 그렇게 전화를 해댄다고 한다. 어느 날은 엄마 안겔리카가 옆에 있었음에도 브리트의 전화를 내가 받았다. 안겔리카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싶었기에 난 브리트에게 엄마가 지금 집에 없다고 대답해 버렸다. 나중에 안겔리카가 나에게 부탁했다. 다음에 브리트의 전화를 받으면 둘러대지 말고 사실 그대로 말해 주란다. “엄마가 너와 전화 통화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고! 그녀의 교육적인 방침인듯 하다.
안겔리카가 이끄는 ‘스펙트럼’의 일면을 보기로 하자.
하루는 안겔리카가 장애인 수업이 있는 날이라고 같이 가자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시에서 13시까지 열리는 이 수업은 중간에 15분의 커피 타임을 빼고는 진지한 시간이었다. 10명 정도의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참석했던 이 날 수업시간의 내용은 ‘여러분이 속한 ‘스펙트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펙트럼’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떻게 책임자를 뽑는지, 그리고 회원들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이었다. 미리 복사해온 회칙을 나누어주고 안겔리카가 장애인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나갔지만 모두 다가 관심을 기울이진 않는듯 했다. 딴짓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진행되었고, 관심 있는 학생들은 그들 수준에서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해 나갔다.
안겔리카가 주장했던 ‘장애인이니까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고 했던 말이 딱 맞는듯 했다. 이들이 이렇게 주기적으로 알아야 것을 배우다 보면 나름 작은 의식변화도 될 것 같다는 것을 그날 수업 분위기 속에서도 파악되었다. 이런 수업을 받는 장애인들이 이미 나름대로의 인정을 받고 산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음은 틀림이 없었다. 매주의 테마는 때론 종교, 때론 정치 등등을 골라 이들의 수준에 맞게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수업을 마친 이들은 엄마 안겔리카와 함께 중국식당으로 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도 수업 중의 내용을 얘기했다. 물론 그 내용은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매주 화요일은 이들의 정기적인 모임이 열린다. 저녁시간에 식당에서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공동체의 우정을 나눈다. 크리스마스 즈음엔 이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다른 도시의 크리스마스 야시장 구경을 가기도 한다. 1년에 한 번씩 1박2일의 여행도 함께 떠난다. 그녀가 만든 이들을 위한 다른 작은 프로그램들도 수두룩하다.
가장 큰 행사는 아무래도 2년에 한 번씩 2주간 떠나는 여행이다. 주로 네덜란드의 해변가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땐 해변가의 집 한 채를 몽땅 빌린다. 30명의 장애인을 이끌고 이런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도 그녀의 주장이 내포된다. ‘장애인들도 일반인들과 똑같이 휴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모든 계획을 사전에 철저하게 짜야 하는 긴 여행인데 이런 여행은 늘 일 년 전부터 짜고 있었다. 몇 년 전 나도 이 홀란드 여행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나는 이들을 위해 30명 분의 잡채와 불고기 만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네덜란드의 바닷가의 집에서는 매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일상을 엮어 나갔고, 우르르 바닷가로 달려나가 작은 파도를 타면서 함께 즐기기도 했다. 하루는 이들이 바다만 보고 있으면 지겨울 것이라면서 자동차로 벨기에의 브뤼셀로 향했다. 제2의 베네치아라는 그 도시를 이들 덕택에 구경하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도시에서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내다가 다들 뿌듯하고 들뜬 기분을 지닌 채 다시 네덜란드의 ‘해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들의 멋진 2주간의 휴가가 지금도 눈에 선명하게 아른거린다. 나는 내년인 2016년 여름에 가는 이들의 네덜란드 휴가에 함께 가자는 초대를 받았다.
그녀는 장애인 딸 브리트 때문에 시작했던 작은 일이 이렇게 자기 인생의 과업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지금은 독일 마르부륵에서도 커다란 단체가 되었고, ‘스펙트럼’에는 25명의 직원이 있다. 많은 일 때문에 많이 지친 상황이지만 그녀는 열정이 여기서 멈출 수 없다면서 제2의 장애인 촌을 구상 중이다. 이번에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함께 사는 것은 물론이고, 이젠 유치원까지 포함될 촌락을 계획 중이다. 시에서 국가에서 인증된 ‘스펙트럼’을 이끄는 그녀는 동시에 독일 정부산하 장애인단체 조직에서 임원자리를 맡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독일 전역을 다니며 강연을 하거나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참석하기도 한다.
좌우지간 이런 독일엄마의 희생과 열정 덕택에 30명의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늘 따스한 인간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 공동체 안에서 잘 살아간다는 거다. 브리트도 엄마 덕택에 이 공동체 속에서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듯 하다.
한국음식을 너무 좋아하는 이 틸리케家! 이 집엔 자주 김치 냄새가 폴폴 난다. 김치 담는 법을 아빠 디륵이 나에게 배웠기에 잘 만든다. 너무 좋아하다보니 치즈 넣듯이 빵에다가 김치를 넣어 먹는 그녀! 김을 독일 스프에 넣어 먹는 그녀! 라면을 좋아하는 그녀! 삼겹살과 불고기를 무지 좋아하는 그녀! 늘 열정을 뿜으면서 생글거리는 얼굴로 장애인들을 보살피는 그녀! 동시에 그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게끔 장애인에 대한 대우가 남다른 독일국가도 부럽다.
이 독일 부부는 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3명의 자식들은 정상인이나 첫 딸인 브리트(Brit)가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이 딸 때문에 이들은 그야말로 십자가를 진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이젠 이 딸 때문에 이들의 삶이 오히려 공적인 삶으로 변모했다. 어떤 공적인 삶인가? 그리고 브리트를 통해서 독일의 (정신지체) 장애자들도 함께 보자.
*브리트
먼저 필자가 독일에 살았을 때 경험했던 브리트의 얘기다. 어느 날 뜬금없이 브리트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내용인즉, ‘네가 불쌍해서 자기가 5마르크(지금의 유로)를 빌려 주겠으니 반드시 이자를 꼬박꼬박 달라’는 거였다. 앞뒤의 얘기를 맞추어보니, 10일간 돈이 좀 급하게 필요하다는 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엄마(Angelika) 아빠(Dirk)로부터 들었단다. 내가 불쌍해서 도와 주겠다고 하니 어쨌든 예쁜 마음이지 않는가?
그녀의 엄마 안겔리카(Angelika)와 약속이 있었던 날이었다. 집에 당도했더니 브리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울 엄마가 무지 바쁜데 너 왜 왔느냐?”고. 하지만 이 가족들과 긴 연륜이 쌓였다 보니 이렇게 앙탈을 부리는 브리트를 다독거리는 처방전까지 나는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터다. “에구! 브리트의 허락 없이 내가 마 그냥 와 버렸구나! 다음부터는 꼭 브리트에게 허락 받고 올게, 오늘만은 허락 좀 해줘!” 하면 조금 전의 앙탈이 무색할 정도로 금방 헤헤하면서 웃는다.
이런 나의 경험 외에도 그녀에 관해 들은 얘기도 수두룩하다. 어느 날은 느닷없이 시 의료보험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를 휴양치료를 보내달라고 조른다거나, 시 공원묘지의 꽃들이 사라졌다고 경찰에 신고를 한다거나 등등.
브리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랑했던 장애자 남친이 있었다. 이들은 함께 극장도 가고, 함께 식사도 하면서 무르익은 사랑을 몇 년간이나 키우다가 유감스럽게도 헤어지게 되었단다. 그녀의 남친이 다른 장애인을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별을 맞이한 브리트는 많은 아픔과 상처를 받았고, 이 상처를 치유하는데 장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후에 엄마 안겔리카가 들려주었다.
그녀가 18살 때의 옛날 얘기도 해보자. 브리트는 스스로 신문에다 남자친구 구한다는 광고를 내었다 한다. 이 광고를 통해서 40대의 휠체어 탄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단다. 드디어 이 남자를 만난 뒤 브리트 왈, “지체장애자에다가 너무 늙어서 퇴짜를 놓았다”고! 그녀의 엄마 안겔리카가 브리트의 정신 연령은 4~5세(한국 나이로는 6~7세)세 정도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어를 구사하는 외국어 능력을 보면 40~50세 정도라고 밝혔다. 엄마의 공이 숨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를 루돌프 슈타이너가 세운 인지학을 강조하는 발도르프 학교에 보냈던 결과라고 언급했다.
지금까지는 장애인 브리트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였다. 하지만 브리트와 함께 사는 엄마 안겔리카는 사정이 좀 달랐다. 이 딸 때문에 엄마는 늘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장애인 단체에 살고부터는 스트레스를 좀 덜 받는다고. 집에 함께 살 때는 그녀의 괴성과 기이한 행동들을 종일 받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브리트가 남독일의 이모네로 며칠 간 적이 있었다. 안겔리카는 브리트 없이 살아보는 그 자유로운 며칠을 ‘천국의 날’로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니, 브리트와 함께 사는 하루 24시간이 어느 정도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딸이 성장해 가자 엄마 안겔리카는 고민에 빠졌다. 장애인인 딸일지라도 집안에서만 보낼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작은 역할이나마 할 수 있는 길을 원했기 때문이다. 고민하던 엄마는 딸 때문에 장애인 단체인 <스펙트럼>을 만들었다. 작은 그룹 3개로 시작했던 이 단체가 지금은 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생활하는 4개의 건물을 이룬 촌이 되었다. 여기에는 장애자들이 서빙하는 카페까지 운영되고 있는데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카페로 성장했다.
이 촌 안에 있는 브리트가 동료 3명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방문했다. 여긴 정신지체 장애인들, 그리고 24시간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중증 장애인인 청년도 있었다. 이들의 공동체의 내부 모습은 우리의 중류층 생활 양상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생활을 꾸릴 수 있는 것은 틸리케가(Thielicke家)의 사비가 다가 아니다. 대개는 주정부에서 지불되는 장애비로 충당 된다.
이들은 장애등급에 따라 주정부에서 매달 장애비를 지급 받는데 그 금액을 들어보니 실로 엄청나다. 1인당 3000유로에서 장애 등급이 높으면 1만 유로까지 받는단다. 주 정부에도 장애자들이 이들뿐만이 아닐 터인데…. 엄청난 세금들이 장애복지로 흘러들어 간다는 뜻이다.
엄마 안겔리카의 견해는 풍족하게 돈을 받는 이들이 단지 집안에만 박혀 살게 할 것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일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장애인들에게 말이다. ‘장애인도 사회 안에서 작은 역할을 맡고 인간적인 존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정신지체 장애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정원사로, 어떤 이는 유스호스텔의 부엌에서 일을 하거나, 어떤 이는 양로원에서 일한다. 말하자면 단순 노동에 속하는 일이다. 집에 돌아오면 이들의 공동체 안에는 늘 도우미들이 상주해서 식사를 챙겨준다. 이들은 공동체 일원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만 하고 나머지는 도우미들의 몫이다. 물론 중증 장애인들은 하루 종일 도우미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브리트도 동료들과 함께 이 공동체에 살면서부터 사회성이 훨씬 많이 길러진듯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장애인 증상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증상 중 하나로 브리트는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전화를 해댄다. 나 역시 겪었다. 다 외출하고 혼자 이 집에 머물러 있었을 때 하루에 수십 통의 브리트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뭔가 불안한 심리가 그녀 안에 요동치면 그렇게 전화를 해댄다고 한다. 어느 날은 엄마 안겔리카가 옆에 있었음에도 브리트의 전화를 내가 받았다. 안겔리카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고 싶었기에 난 브리트에게 엄마가 지금 집에 없다고 대답해 버렸다. 나중에 안겔리카가 나에게 부탁했다. 다음에 브리트의 전화를 받으면 둘러대지 말고 사실 그대로 말해 주란다. “엄마가 너와 전화 통화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고! 그녀의 교육적인 방침인듯 하다.
안겔리카가 이끄는 ‘스펙트럼’의 일면을 보기로 하자.
하루는 안겔리카가 장애인 수업이 있는 날이라고 같이 가자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10시에서 13시까지 열리는 이 수업은 중간에 15분의 커피 타임을 빼고는 진지한 시간이었다. 10명 정도의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참석했던 이 날 수업시간의 내용은 ‘여러분이 속한 ‘스펙트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스펙트럼’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떻게 책임자를 뽑는지, 그리고 회원들이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등등이었다. 미리 복사해온 회칙을 나누어주고 안겔리카가 장애인들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나갔지만 모두 다가 관심을 기울이진 않는듯 했다. 딴짓을 하고 있는 이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진행되었고, 관심 있는 학생들은 그들 수준에서 질문하고 대답하고, 토론해 나갔다.
안겔리카가 주장했던 ‘장애인이니까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고 했던 말이 딱 맞는듯 했다. 이들이 이렇게 주기적으로 알아야 것을 배우다 보면 나름 작은 의식변화도 될 것 같다는 것을 그날 수업 분위기 속에서도 파악되었다. 이런 수업을 받는 장애인들이 이미 나름대로의 인정을 받고 산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음은 틀림이 없었다. 매주의 테마는 때론 종교, 때론 정치 등등을 골라 이들의 수준에 맞게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다. 수업을 마친 이들은 엄마 안겔리카와 함께 중국식당으로 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도 수업 중의 내용을 얘기했다. 물론 그 내용은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리고 2주에 한 번씩 매주 화요일은 이들의 정기적인 모임이 열린다. 저녁시간에 식당에서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공동체의 우정을 나눈다. 크리스마스 즈음엔 이들을 자동차에 태우고 다른 도시의 크리스마스 야시장 구경을 가기도 한다. 1년에 한 번씩 1박2일의 여행도 함께 떠난다. 그녀가 만든 이들을 위한 다른 작은 프로그램들도 수두룩하다.
가장 큰 행사는 아무래도 2년에 한 번씩 2주간 떠나는 여행이다. 주로 네덜란드의 해변가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이땐 해변가의 집 한 채를 몽땅 빌린다. 30명의 장애인을 이끌고 이런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도 그녀의 주장이 내포된다. ‘장애인들도 일반인들과 똑같이 휴가를 즐길 권리가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모든 계획을 사전에 철저하게 짜야 하는 긴 여행인데 이런 여행은 늘 일 년 전부터 짜고 있었다. 몇 년 전 나도 이 홀란드 여행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나는 이들을 위해 30명 분의 잡채와 불고기 만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네덜란드의 바닷가의 집에서는 매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일상을 엮어 나갔고, 우르르 바닷가로 달려나가 작은 파도를 타면서 함께 즐기기도 했다. 하루는 이들이 바다만 보고 있으면 지겨울 것이라면서 자동차로 벨기에의 브뤼셀로 향했다. 제2의 베네치아라는 그 도시를 이들 덕택에 구경하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 도시에서 아주 멋진 시간을 보내다가 다들 뿌듯하고 들뜬 기분을 지닌 채 다시 네덜란드의 ‘해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들의 멋진 2주간의 휴가가 지금도 눈에 선명하게 아른거린다. 나는 내년인 2016년 여름에 가는 이들의 네덜란드 휴가에 함께 가자는 초대를 받았다.
그녀는 장애인 딸 브리트 때문에 시작했던 작은 일이 이렇게 자기 인생의 과업이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지금은 독일 마르부륵에서도 커다란 단체가 되었고, ‘스펙트럼’에는 25명의 직원이 있다. 많은 일 때문에 많이 지친 상황이지만 그녀는 열정이 여기서 멈출 수 없다면서 제2의 장애인 촌을 구상 중이다. 이번에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함께 사는 것은 물론이고, 이젠 유치원까지 포함될 촌락을 계획 중이다. 시에서 국가에서 인증된 ‘스펙트럼’을 이끄는 그녀는 동시에 독일 정부산하 장애인단체 조직에서 임원자리를 맡았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독일 전역을 다니며 강연을 하거나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참석하기도 한다.
좌우지간 이런 독일엄마의 희생과 열정 덕택에 30명의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늘 따스한 인간적인 보살핌을 받으면서 이 공동체 안에서 잘 살아간다는 거다. 브리트도 엄마 덕택에 이 공동체 속에서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듯 하다.
한국음식을 너무 좋아하는 이 틸리케家! 이 집엔 자주 김치 냄새가 폴폴 난다. 김치 담는 법을 아빠 디륵이 나에게 배웠기에 잘 만든다. 너무 좋아하다보니 치즈 넣듯이 빵에다가 김치를 넣어 먹는 그녀! 김을 독일 스프에 넣어 먹는 그녀! 라면을 좋아하는 그녀! 삼겹살과 불고기를 무지 좋아하는 그녀! 늘 열정을 뿜으면서 생글거리는 얼굴로 장애인들을 보살피는 그녀! 동시에 그녀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게끔 장애인에 대한 대우가 남다른 독일국가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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