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는 북받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연신 손수건을 안경 밑으로 밀어 넣으며 “억울하다”고 울먹였다. 또 다른 남자는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힘찬 목소리로 망인이 자신에 대해 한 말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수십 년간 서로 알아온 이웃 동년배. 막역한 지기지우는 아닐지라도 친구 사이가 맞다.
억울해서 죽고, 억울하게 밀려났다?
한 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다른 친구는 천신만고 끝에 거머쥔 ‘국무총리’라는 명패를 내려놓았다. 이 두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읽히는 정서가 있다면 ‘억울함’일 것이다. 한 사람은 ‘억울하다’ 외치며 목숨을 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억울하게 총리직에서 밀려났다’고 생각할 테니 그렇다.
‘이완구의 거짓말’은 국민에게 고통이었다. 방송과 신문은 거짓말의 증거를 찾아내 쉼 없이 국민들의 눈과 귀에 주입했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공기처럼 퍼져 나갔고, 모두 그 ‘거짓말’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오감을 동원해 그 거짓말의 ‘맛’이 어떤지 평가해야 했다. 아주 고약한 맛이었다.
국회에서 국민을 향해 대놓고 한 거짓말의 파장은 무척 컸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성과 사과는 없다. 대기를 오염시키는 황사 같은 거짓말을 수백 시간 동안 해대고도 그런다.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은 채 어물쩍 넘기려는 모양이다.
이완구 총리. 판단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단박에 까발려질 거짓말을 한 걸까. ‘포용될 수 있는 거짓말’의 범위를 스스로 재단해 멋대로 확대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판단력 탁월한 이완구 단박에 들통날 거짓말, 왜?
독대하는 자리에서 돈을 받았으니 확실한 증인은 없을 거다, 또 꼼꼼하고 입이 무거운 수십년 지인이 건넨 돈인 만큼 뒤처리도 깔끔했을 터 물증 또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설령 뭔가 나온다 해도 적당히 둘러댔다가 문제가 되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버티면 될 거다, 정치판에서 거짓말 정도는 병가지상사 아닌가, 이렇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으로 총리직을 잃는 건 억울하다’는 강한 집념이 거짓말도 불사하게 만든 모양이다.
망인이 주장하는 억울함은 어떨까. 주장 자체가 모순이다. 절대적 가치기준이 아닌 상대적 잣대에 따라 스스로 저울질함으로써 만들어진 일종의 착시다. 정관계와 금융계에 다양한 로비를 해왔다는 정황이 수두룩하지 않은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한 주제에 억울하다고 소리치다니. 명분이 서지 않는 주장이다.
‘억울하다’를 풀어 말하면 ‘나에게 잘못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망인의 외침과 이 총리의 태도에서 ‘이 정도 로비와 거짓말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풍긴다. 망인은 자신을 외면하는 ‘주변의 배신’을 탓했다. 이 총리는 자신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간 망인의 처신을 탓하고 있을 것이다.
망인과 이 총리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이런 속성이 흐른다. 잘못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려하고, 자기 합리화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덮으려는 죄의 속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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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을 살해하는 카인(다니엘레 크레스피,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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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과 인간의 속성
성서에 등장하는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범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바치는 제물을 거부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만 받자 몹시 화가 나 아벨을 죽였다. 그때 하나님이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살인범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며 오리발을 내민다.
성서는 ‘카인의 모습’이 인간 속성의 한 단면이라고 말한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그러할진대 작은 잘못에 대해서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관대하겠나. 잘못의 ‘불가피성’을 멋대로 해석해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게 인간이다. 그래서 인간은 ‘카인의 후예’인 것이다.
삶과 죽음, 죄와 벌, 선과 악 등 인간의 속성을 깊이 성찰한 독일 작가 토마스만은 하나님에게 항변하는 ‘살인범 카인’의 모습을 그의 작품에 이렇게 등장시킨다.
“맞습니다. 제가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주 유감이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굽니까? 도발을 당하면 제 자신이 완전히 돌변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질투가 심한 인간으로 저를 창조한 자가 누굽니까? 질투하는 하나님 아닙니까…? 제가 부인할 수 없는 행동을 하도록 만든 사악한 충동을 내 안에 누가 넣었습니까?”
카인처럼 항변해서는 안 된다
망인과 이 총리는 어떨까. 토마스 만이 묘사한 카인의 항변처럼 자신의 잘못을 누군가에게 돌리며 합리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말이다.
‘내가 그런 게(돈을 주고받고, 거짓말 한 것) 맞다. 아주 유감이지만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군가? 도발(주변의 배신과 친구의 고자질 등)을 당하면 무슨 짓(자살과 거짓말)을 하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질투가 심한 이런 모습이 돼버린 게 누구 때문인가? 비리와 검은돈이 만연돼 있는 정치판 때문이 아닌가. 누가 나에게 로비를 하고 거짓말을 하도록 충동질한 건가.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세상 아니던가.’
망자는 세상에 없으니 이 총리에게 충고 한마디 하겠다. 검은돈이 판치는 정치판과 비리투성이인 세상을 핑계 삼아 이 정도의 거짓말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잘못은 잘못일 뿐이다. 뼈저리게 뉘우치며 엎드려 근신해야 한다. 국민이 용서할 때까지 잘못을 빌어야 한다. ‘구원의 기회’를 원한다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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