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그네는 방탄막이를 사퇴하고 청와대에서 나오라
조시형 | 2014-10-10 13:57:0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약소국의 비애? 쿠데타정권의 굴욕!
1.과거-巨惡을 보다
나는 반공소년이었다. 그것도 자발적이고 열성적인. 단적으로 초중등 시절 내가 받은 교내외 상은 대부분 반공관련 글짓기, 웅변 심지어 형편없는 그림실력에도 반공포스터만은 입상을 했다. 심지어 5학년 때부터 활동했던 소년한국일보 명예기자로 썼던 글 중에 신문지상에 실린 글은 ‘간첩잡는 똘이장군’, ‘이승복 어린이를 기리며’ 등등 반북 반공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 글을 선정해서 실어준 기자의 말에 의하면 유독 그런 글에서 혼과 기가 살아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반공소년이 된 이렇다 할 연고는 없었다. 6.25의 전란에도 피란도 가지 않았다는 동막골 같은 속리산 기슭의 촌구석에서 태어나 서울 변두리에 정착한 이력도 그렇거니와 하급 공무원에 보험판매를 하시던 부모님은 정치엔 무관심하셨다. 다만 나는 어릴 적부터 감수성이
무척이나 여렸고 폭력을 극도로 싫어했다는 어머니 말씀에 비춰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부터 주입된 제도교육의 영향이 유달리 컸던 것 같다. 동족상쟁을 일으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현재도 호시탐탐 우리의 안녕과 평화를 해치는 잔혹한 살인마들! 그게 이북과 김 씨 왕조에 대한 적개심의 뿌리였다. 공산주의가 뭔지는 몰랐지만 그게 뭐든 사람을 죽인다면 그것은 惡이다. 그 악에 대해서는 최고의 분노로 싸워야한다. 그것이 10대의 내 신조였다.
1984년 봄 어느 따뜻한 주말. 그 동안의 내 삶의 밑바닥을 뒤집어엎는 일대 사건이 내게 닥쳤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도서관에 가려 탄 버스에서 깜빡 졸다가 내린 곳이 명동성당 앞이었다. 거기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치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해 성당의 입구에 도달한 나는 그만 보지 말아야 할 사진들을 보았다. 80년 5월! 불과 몇 년 전에 남도 땅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들을 생생히 웅변하는 그 사진들!! 그것은 천인공노할 집단학살이었다. 국군이 아줌마와 아저씨들 그리고 언니와 형들을 잔혹하게 때리고 찌르고 총쏴서 죽인 거였다. 나는 주저앉았다. 땅이 꺼지고 하늘은 노랗게 빙글빙글 돌아 나는 토악질을 해댔다. 그리고 한 동안 벽에 기대 혼미한 정신을 놓았다.
그날이후 나는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과거를 뒤졌다. 독서실 서고에 비치되어있던 월간 신동아 79~81년분을 한 달에 독파하고 근현대사 책들을 가까운 대학가 서점에서 읽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당시 담임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불온한 눈빛의 반항아로 변해갔다. 나를 아끼던(?) 선배들과 선생들은 나의 속을 궁금해 했다. 그러나 몇 번의 초식으로 그들의 인식상태를 알아채곤 나는 입을 닫았다. 그래서인가 그해 여름, 학교는 나를 당시 예비대학생 녹화사업 프로그램에 보냈다. 삼청교육대나 군대에서 운동권 출신에 자행하던 그것만큼 가혹하진 않았지만 나는 긴장했다. 그것이 전두환의 친동생 전경환이 본부장으로 있던 새마을운동중앙본부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 학교와 부모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나는 그 5박6일의 연수과정에서 또 한 번의 경천동지할 충격체험을 한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새마을본부에서의 프로그램은 다채롭고 유연했다. 천편일률적인 반공교육을 예상했던 나에게 명상 프로그램과 민족사 특히 고대사 강의는 아주 유익했고 베트남 패망에 대한 기록영상은 나름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 이틀간의 국토순례행진도 이 땅의 아름다움을 체험케 해 주었다. 같은 조의 남자동기들은 똑똑했고 몇 명의 여학생들은 예뻤다. 특히나 우리 조의 여자 조교는 연대 84학번으로 82년 1기 수료생이었다는 데 설레 일 정도로 예뻤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봐야하는 전경환의 대머리와 그의 유들유들한 목소리를 빼면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런데 운명의 마지막 날은 나를 피해가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그 동안의 연수를 총화하는 강연이 시작되었다. 강사는 당시 조선일보의 유명한 논설위원, 주제는 격전의 국제정세와 한국의 생존전략이었다. 문제는 당시 1주년이 도래하던 KAL 007편의 격추에 대한 부분에서였다. 그는 KAL기가 냉전이 최고조에 이른 동북아에서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사건이라고 회고하며 이는 우리가 힘이 없어 당한 비극이라며 온 국민이 부국강병을 위해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침된 참극이 고래싸움에 새우라니? 일방적으로 소련에 당한 것이지 무슨 약소국의 비애? 다른 수강생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나는 커다란 의문에 빠졌다. 2부 강연이 끝난 후에 질의 응답시간이 있었지만 나는 1부 강연 후 그 강사를 쫓아갔다. 그리고 화장실을 나오던 그에게 나의 의문을 말했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찬찬히 이렇게 말했다. “칼 기를 격추시킨 건 소련이지만 영공을 넘어가게 한 건 미국이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반문에 그는 잠시 망설이다 무슨 자동항법에 유도전파를 쏘면 어쩌구 말을 하다 중단하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2부 강연은 상호토론으로 대체되었다.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 앵커리지를 경유해서 김포국제공항으로 오던 대한항공 소속 007편 여객기가 비행 중 소련 상공에서 소련 공군 소속의 수호이 15(ru)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서쪽에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숨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6개국 269명에 달하는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였다. 당시 KAL 007편을 격추한 수호이 15의 조종사는 겐나디 오시포비치이다. 그는 관제소로부터 KAL기를 국제관례에 따라 유도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받고서 여객기에 300m까지 근접, KAL 007편과 같은 고도로 날아가면서 전투기 날개 쪽에 달린 경고등을 깜박거리며 수차례 유도착륙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KAL 007편은 비행을 계속했으며, 통상탄(당시 조명탄은 장전하지 않았다)을 4차례 발사했는데도 여객기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고도를 높이자 관제소로부터 경고 사격 후 격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KAL기 격추를 인류에 대한 학살만행이라며 유엔 안보리에서 규탄성명을 냈고 소련은 KAL기가 소련 극동지역의 신형 ICBM 연구를 정탐할 목적으로 영공을 불법 침입한 거라며 맞섰다. 한국은 전국이 반소, 반공 규탄 데모로 들끓었다.
나도 자발적으로 그 집회에 참석해서 목이 터져라 외쳤다. “소련 공산당을 타도하자!” 그런데 우방이자 혈맹인 미국이 칼기 격추의 배후였다니? 나는 지난 5월 명동성당의 체험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의 파장은 무겁고 길어서 그 후 30여년의 삶의 과정에 진한 생채기를 만들고 지금도 심장에 파문을 새기고 있다.
새마을 운동본부의 마지막 행사는 조별 팀웍을 보여주는 장기자랑이었다. 우리 조는 ‘평양에서의 하루’라는 상황극을 시연했다. 김일성의 폭압적 전제정치에 시름하는 이북 인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표현했다. 나는 평양의 거리를 취재하는 외신기자 역을 했다. 마지막 나의 일장 연설로 끝을 맺어야 하는 데 나는 이렇게 외쳤다. “약소국의 비애가 아니라 쿠데타 정권의 굴욕이다.” 무대에서 끌려나오면서 나는 전경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왠지 꽉 막힌 무언가가 쓸려 내려가는 시원함을 느꼈다.
2. 현재-巨惡의 재림
지난 세월호 유가족의 대리기사 폭행사건이후 전 방위적인 대대적 언론의 공세를 보고, 초지일관 유족의 곁을 지키던 김현 의원마저 코너로 몰리는 상황을 보고 그리고 주말 집회의 동력이 현저히 줄어드는 걸 목도하면서 우려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박영선의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3차합의가 나왔다. 말짱 도루묵이고 죽 쒀서 개 준 꼴이다. 새누리의 김무성은 선방했다며 이완구와 파안대소하고 새정연의 박영선은 죄송하다며 사퇴하는 이 배리! 뭘 선방하고 뭐가 죄송하다는 것인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빼서 진상규명이 물 건너가서 그러는 건가? 이것들이 도대체 국민을 유가족을 터럭만치라도 생각하는 작자들인가? 인간이 아니지 않는가? 악귀들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검찰은 외부충돌도 없었고 내부폭발도 없었다고 수사결과를 공표한다. 수많은 증언과 사진, 동영상의 의혹들을 뭉개는 발표다. 오로지 화물과적과 조타수의 미숙한 운전이 빚어낸 사고다. 이 정권이 표방하고 그렇게 공인되길 바라는 딱 그대로 결론을 내렸다. 동시에 유병언의 해외 자금책 김혜경을 인터폴 공조로 미국에서 체포했단다. 그는 이민법상의 항변절차도 포기하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단다. 그것도 아주 친절히 체포 장면을 찍어서 온 신문과 방송에 알린다. 그런데 그의 혐의는 횡령과 배임이 전부다. 유대균과 그의 호위무녀도 동일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지들 회사 재산을 빼돌린 게 세월호 침몰과 무슨 인과관계가 있길래 온 방송이 유병언 일가를 주범으로 보도하는 건지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구원파는 왜 이리 잠잠한 건가? 1대 교주는 죽었고 2대 교주는 오리무중인데 그 재산은 물론 교리의 추종자라면 마땅히 죽은 교주를 위해 나서야 하는 거 아닌가? 여전히 구원파인 대한 침례교회는 신도들로 북적대는 데 말이다.
다 좋다. 니들 말을 다 그대로 접수하겠다. 기획참극설은 음모론이라고 치자. 그래도 세월호 침몰과 304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학살의 책임을 이 정권은 피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범죄는 해서는 안 될 것을 하는 행위와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행위 두 가지 중 불법성이 중한 것을 형벌로 응징하는 것이다. 이중 검찰의 발표대로 고의든 과실이든 침몰에 작위(作爲)한 바 없더라도-많은 증거들이 고의 침몰을 추론케 하지만- 침몰이후 구조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작위(不作爲) 책임은 드러난 사실로 확실하며 그 또한 작위책임에 못지않게 중대한 불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부작위 책임은 사인이 아닌 헌법상의 국민 생명구조의무 회피라는 국가책임이므로 거의 무과실에 가까운 입증불요의 형사책임을 지는 것이다.
다 차치하고 구조의 골든타임에 가능한 구조수단을 적극적으로 막고 나선 것은 명백하다. 그 최고 책임자는 헌법과 법률에 따라 청와대에서 대통령이라고 행세하는 박그네 임이 명백하다. 특정해서 예를 들면 해군참모총장의 구조선 통영함의 출동명령을 두 차례나 저지한 명령권자는 4월16일 오전에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분명하다. NSC 상임위원인 국방부장관, 국정원장, 비상임위원인 합동참모총장이 그 명령계통의 윗선이며 그 최종권자는 헌법상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주재하는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고로 정부의 너절한 변명-통영함이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에도 불과하고 통영함 저지 그 자체만으로도 구조가능성을 축소한 학살의 부작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혹시 이런 책임을 모면코자 잃어버린 7시간을 스스로 뻥카 치는 건 아닌가? 처음 박그네의 행방불명을 언급한 게 김기춘이고 이를 최초 보도한 게 조선일보고 인터넷에 널리 전파한 게 지만원이라는 소스코드 추론의 법칙에 따라 이런 의심은 당연하다. 또한 4월16일 오후 5시경 초췌한 얼굴과 부스스한 머리무세를 공개하면서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들을 (바다에서) 찾기가 어렵냐는 황당발언을 전 국민에 중계한 이유도 역시 만에 하나 사건의 진상이 백일하에 들통나도 박그네는 몰랐다는 알리바이를 꾸민 건 아닐까?
그러나 본질은 변치 않는다. 세월호가 오전 7시경부터 선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구조요청을 하고 7시 20분 경 조난 방송이 나가고 8시경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에 박그네가 참석했든 아니면 다른 곳에서 볼일을 즐겼든 이후 침몰이후 3시간 반여의 전원구조 가능한 상황을 방기하고 304명의 생명이 수장되어 죽게 한 책임은 박그네가 진다. 고의 작위이든 고의 부작위든 이게 진실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이라도 탄핵절차에 착수하여 모든 헌법상의 자격을 박탈하고 법정에 세워야한다. 법적으로는 그렇다. 문제는 현실에서 집행가능성이다. 이건 실로 전 국민의 항쟁까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미국과 수구기득권에게 박그네는 아직도 필요한 존재다. 실질적 지배세력이자 배후의 결정권자인 이들에게 박그네는 여전히 對 한국민 통제의 허수아비로 살아남아 줘야한다. 그러나 얼마나 그러할 지는 지금 장담키 어렵다. 개헌론이 박그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년도 최대 이슈가 될 것이 명약관하해진 현재 정세의 흐름이다.
3. 미래-불투명한 작은 소망
최소한 김영삼 이래 김대중 노무현 까지 자국민을 학살한 사건은 없었다. 물론 삼풍백화점 붕괴나 대구지하철 화재 등의 사고는 있어왔지만 84년, 87년 연이은 칼기 폭파사건이나 광주학살 같은 참극은 확실히 없었다. 그런데 이명박이 청와대에 들어선 이후 다시 앙시앙레짐 처럼 학살의 원귀들이 돌아왔다. 용산 참극에 이어 천안함 침몰 그리고 이 참칭정권에서 백주해상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극까지.
그리고 현대사의 학살참극이 국제정세의 배경과 미국의 관련성이 화제가 되었던 것처럼 천안함도 세월호도 국제정세와 미국을 도외시하고는 그 진상에 접근키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지난 주 전격적인 북측 실세 3인방의 방남 이후 훈풍이 불던 남북관계가 연이은 미국의 한반도 핵사용 시사발언과 NLL에서의 돌발적인 남북해상 충돌로 찬바람이 불더니 거듭된 북의 요청에도 아랑곳없이 오늘 기어코 반북삐라를 살포하겠다는 자유북한 연대라는 탈북자 단체의 망동으로 흔들리고 있다. 그런데 이 탈북자단체에 자금을 제공하는 단체가 미국의 준 관변단체인 헤리티지라 한다.
과연 박그네의 진심은 무얼까? 박그네는 언제까지 써준 수첩을 읽기만 하는 신세로 버틸까? 그녀를 위해서도 이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아비의 명예를 위해서도 이제 그만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좋을 것이다. 더 이상 추락할 것도 없는 데 ‘부도 대한민국’의 오명까지 뒤집어써야 하겠는가? 그리되면 박정희 신화는 완전 파산나고 역사의 평가는 더욱 냉혹할 것이다.
나는 누구이든 대한민국의 대통령에게 그다지 과도한 희망을 접었다. 그저 자국민의 생명이라도 지켜줄 정도의 도덕성과 능력만 겸비하면 감지덕지다. 더욱이 부정선거라는 덫에 걸려 전임과 외세에 발목이 잡혀 꼼짝 못하는 현직을 보면서 더욱 그렇다. 나는 박그네가 세월호 참극을 기획하거나 주도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할 수 없었고 세월호 아이들을 살릴 수 없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서도 다시 한 번 권한다. 박그네는 방탄막이를 사퇴하고 청와대에서 나오라. 그게 본인의 유일한 生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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