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칼럼] ‘성유보의 길’을 걸으려는 젊은 언론노동자들에게
입력 : 2014-10-14 08:56:24 노출 : 2014.10.14 09:28:07
손석춘 언론인 | 2020gil@hanmail.net
조민기·이의직·안종필·홍종민·김인한·홍선주·심재택·안병섭·우승룡·배동순·김성균·김덕렴·강정문·안성열·김두식·김진홍·이병주·이인철.
2014년 3월17일, 성유보 전 동아투위 위원장이 “그리운 이름”으로 떠올린 “먼저 떠난” 동지들입니다. 동아투위가 해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열어온 집회에 더는 참석할 수 없는 이름들을 쓰면서 당신은 “벌써 18명이나 고인이 되셨다니…”라고 문장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을씨년스러운 시월에 예기치 않게 고인이 되셨습니다.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결국 당신이 마지막으로 참석한 동아일보 앞 집회에서 투위는 ‘동아일보사와 박근혜 정부에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었지요. “오늘날의 동아일보는 그 ‘아우 매체’ 격인 채널A와 더불어 ‘사회적 공기’라기보다는 민족공동체의 평화와 공존을 파괴하는 ‘흉기’라는 지탄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꾸짖었습니다.
이형도 알다시피 동아투위는 비단 동아일보만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를 포함한 보수언론”의 오늘을 개탄했습니다. 냉철하게 톺아볼까요. 국가정보원의 대통령 선거 개입은 민주주의의 뿌리를 흔드는 반민주적 작태입니다.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선거의 유효성을 의심받을 상황입니다. 마땅히 언론이라면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나서야 옳지요. 더구나 권력이 진실 규명을 방해하는 ‘은폐’가 곰비임비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세칭 ‘조중동’은 권력 감시도, 진실 추구도, 최소한의 공정보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조중동 저널리즘은 추락할 대로 추락했습니다. 동아투위의 ‘백발 청년기자’들에게 그것은 ‘언론’이 아닙니다. ‘흉기’일 따름입니다.
고인은 단테를 인용했습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에게는 ‘지옥’이 준비되어 있고,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들에게는 ‘연옥’이 준비돼 있다”고 경고했다면서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들의 대열 맨 앞줄에 동아일보를 비롯한 ‘긴조 9호 시대 언론’이 서 있었다”고 고발했습니다.
어찌 ‘긴급조치 9호시대 언론’만 그 대열 맨 앞줄에 서 있을까요. 2014년의 언론,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에 진실을 파헤칠 생각은 전혀 없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도 마치 모든 게 밝혀졌다는 듯 예단하고 되레 유족들을 내놓고 조롱하는 언론인들은 명토박아두거니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더러는 단테의 경구를 시들방귀로 여길 수 있겠지요. 죽은 뒤의 세계가 있다고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지옥과 연옥의 그림자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안 한 언론인들에게 짙게 드리워질 터입니다. 가령 전두환을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새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로 글을 써댄 언론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요? ‘성 고문’ 당한 여학생에게 ‘성을 혁명도구화 했다’고 쓴 언론인들은 어떨까요? 언론인으로 자신의 인생에 과연 자부심을 느낄까요? 1980년 오월항쟁을 ‘폭도’니 ‘총을 든 난동자’ 따위로 쓴 언론인들은 그가 인간인한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하더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비단 과거만이 아닙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은폐하는 권력의 작태에 언론인으로서 ‘적극 부역’한 언론인들, 생때같은 자녀를 잃고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족들의 ‘도덕성’을 요리조리 흠집 내온 언론인들, 자살률 1위인 나라에서 최소한의 복지 요구조차 살천스레 붉은 색깔을 덧칠해온 언론인들, 노동시간이 세계 최장이고 비정규직 비율이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노동운동을 언제나 적대시해온 언론인들은 어떨까요? 소속 언론사에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호의호식은 하겠으나 정녕 마음까지 그럴까요? 진실을 언구럭부리며 마음이 뒤틀리고 성정이 혐오스럽게 변해간다면, 바로 그곳이 ‘연옥’이고 ‘지옥’ 아닐까요? 그들이 현업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 어떨까요? 물론, 다음 세상이 있다면 그들이 갈 곳은 더 분명하겠지요.
이형. 저는 동아투위의 떠나간 기자들 이름에 ‘성유보’를 눈물로 올리면서, 언론노조와 기자협회의 다짐에 희망을 느낍니다. “우리 모두 성유보가 되겠습니다.” 얼마나 가상한가요. 흉기인 언론을 성유보가 온 몸으로 살아온 순수한 기운, 정기로 치유할 수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지요. 언론노조 위원장과 기자협회장이 함께 했던 자리에서 이념과 정파 따위를 떠나 ‘저널리즘 살리기 운동’을 제안했었던 저로서는 더없이 반가운 일입니다.
▲ 손석춘 언론인
지금 저의 소망은 소박합니다. 우리 모두 ‘성유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당시 언론계 최고의 일터였던 동아일보에서 올곧게 싸웠고, 한겨레서도 ‘기득권’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언론개혁시민연대를 창립할 때 도와드렸지만 저 스스로 짚어보아도 ‘성유보’가 되기엔 지나치게 편히 살아왔습니다. 하릴없이 다시 눈 슴벅이는 까닭입니다.
수만 명의 한국 언론인들 가운데 ‘성유보’가 십분의 일 정도만 된다면, 아니 ‘이순신의 문법’을 빌려 애오라지 ‘열두 명’만 있더라도 한국 저널리즘은 싸목싸목 바뀔 터입니다. 젊은 언론노동자 가운데 뚜벅뚜벅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분명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조용히 홀로 향을 피우고 성유보 선배의 미소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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