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경주 무장봉 억새군락지 등정기
14.10.26 17:05l최종 업데이트 14.10.26 17:05l장호철(q9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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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봉의 억새군락지. 1970년에 조성한 오리온 농장이 1996년 문을 닫으면서 드넓은 초지는 자연스레 억새 군락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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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억새'의 계절이다. 정선의 민둥산을 비롯해 창녕의 화왕산, 이른바 영남 알프스라는 간월재 등 드넓은 억새 군락지를 자랑하는 산이 사람들로 붐비는 시절이 된 것이다. 화왕산은 20여 년 전에, 간월재는 지난해에 다녀왔지만 정선 민둥산은 겨누어 보기만 하다 넘긴 게 몇 해째다.
억새 평원은 경주 무장산에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민둥산은 너무 멀다. 포털에서 승용차 길 찾기를 해보면 무려 4시간이 좋이 걸린다고 나오니 겨누기만 하다 말 수밖에. 그런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앞자리의 동료가 '경주 무장산 억새도 괜찮다'고 거들었다.
무장산? 웬 '무장(武裝)'? 30여 년 전에 경주 근처에서 몇 해 산 적이 있는데도 낯선 이름이다. 하필 이름이 무장이람,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게 만만치 않은 이름이라는 걸 알았다. 일연은 <삼국유사>제 3권, 탑상(塔像) 제4 '무장사(䥐藏寺) 미타전'에서 '무장'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종(太宗)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무장사(䥐藏寺)라고 한다"고 한다.
'투구 무(䥐)'자에 '감출 장(藏)'자를 쓴 무장사는 지금 터만 남아있다. 태종은 태종무열왕, 전날의 김춘추다. 그가 삼국 통일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에 묻은 것은 후대의 해석처럼 '전쟁 없는 평화시대'를 열겠다는 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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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도 탓일까. 10월도 중순이건만 무장산에는 아직 푸른빛이 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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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과 절터가 남아 있어 인근 마을 주민들은 '무장산'이라 부르지만 애당초 이 산은 포항 오어사(吾魚寺)를 품은 운제산과 경주 토함산을 잇는 '624봉'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2008년에 주변이 경주 국립공원 토함산 지구로 정식 편입된 이후에야 이 산은 비로소 '무장산'으로 국토지리정보원에 정식 등록되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으로 확인해 본 무장산의 억새 군락은 규모도 풍치도 괜찮았다. 한 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산행을 결정하자, 아내와 딸애는 간식과 점심을 챙기기로 했다. 지난해 간월산행에서 꽤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터득한 것은 '산을 오르려면 하찮은 것도 제대로 챙겨라'가 아니던가(관련기사 "<'1박2일'도 반한 한국의 알프스? 가보면 누구든 반한다> 바로가기).
토요일(18일) 아침, 7시쯤 출발하려 했는데 어정대다 보니 8시가 겨워서야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한 시간 반 길이라고 생각했지만 두 시간이 좋이 걸렸다. 손곡마을 삼거리에 도착하니 해병대 군복을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들어오는 차량들을 일제히 오른편 길섶으로 붙인다. '만차입니다. 버스를 타고 들어가세요.'
주말엔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늦으면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없다는 경고를 허투루 들은 대가다. 꼼짝없이 거기다 차를 대고 시내버스를 탔더니 차는 이내 무장사지 입구 경주시 암곡동 왕산마을까지 승객들을 휑하니 실어 날라준다.
버스 종점을 지나 나타난 꽤 커다란 주차장은 이미 꽉 찼다. 거기 말고도 주차장은 한 군데 더 있는 모양인데 그곳도 찼다면 오늘 이 산 아래로 몰려든 이들을 수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주차장에서 산 아래까지 이어지는 것은 '청정 미나리'와 '돼지고기'를 함께 파는 음식점들이다. 이름난 산 아래마다 이런 음식점이 들어서는 건 마치 유행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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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교의 산은 가족 단위들이 당일 산행으로 붐빈다. 평탄한 숲길을 다니는 가족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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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지킴터를 지나 삼거리에서 길이 갈린다. 왼편은 무장사지를 거쳐 무장봉에 이르는 5.3km 길이고, 오른쪽은 좀 가파른 대신 짧은 3.1km길이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물매가 꽤 급한 오르막길은 500m 남짓, 산등성이에 이르자, 비교적 너르고 평탄한 산길이 이어진다.
등산로 주변에 빽빽이 들어찬 나무와 숲이 무척 실했다. 10월 중순인데도 위도가 낮아서일까, 단풍은 아직 일렀다. 가끔씩 노란빛이 섞이기는 하지만 나뭇잎들은 여전히 싱싱한 푸른빛이었다. 10월의 뙤약볕이 따가웠다.
억새 군락 못 미처 그늘이 있는 마지막 숲에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오르면서 바나나와 사과 등 간식을 축냈지만 산 위에서 먹는 밥이란 원래 별미 아닌가. 가게서 사 온 김밥 맛도 괜찮았고, 아내가 부러 챙겨온 김치 맛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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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봉의 억새평원에는 곳곳에서 기념촬영에 바쁜 원색의 등산복을 차려 입은 사람들로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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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봉의 억새군락지. 아직 가을이 이른 탓일까. 하얗게 빛나는 억새의 물결을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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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산의 억새는 정선 민둥산이나 영남알프스에는 비기지 못할지라도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으로 충분히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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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어 가벼워진 배낭을 걸치고 산등성이를 넘으니 눈앞에 억새 군락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그러나 그걸 심상하게 받아들인 것은 간월재에서 만난 억새 평원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었을 것이다. 등산로로 낸 데크 양옆으로 하얗게 빛났던 간월재의 억새 군락에 비겨 무장봉의 억새 빛깔은 여전히 푸른 빛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은빛 억새물결? 아직은 철이 이르다
간월재에서와 같은 하얗게 빛나던 억새의 물결을 만나려면 얼마쯤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언제나 그렇듯 좋은 풍경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곤 하니 말이다. 억새 군락 주변 길은 곳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원색 등산복으로 어지럽다.
무장산의 억새 군락지는 원래 1970년, 동양그룹이 산 정상부 45만 평에 조성한 오리온 목장이었다. 이 목장은 1980년 5공의 재벌 비업무용 토지 강제매각 조치로 다른 축산회사로 넘어갔다가 1996년에 문을 닫게 된다. 그 후 주변 초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억새 군락지로 바뀌어간 것이다.
억새군락지가 끝나는 산마루가 이 산의 정상 무장봉(642m)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투어 '인증샷'을 찍고 있는 무장봉 표지석에는 '동대봉산 무장봉'이라 씌어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에 등록된 '무장산'은 뭐고, 멀쩡한 무장봉에 동대봉산 표지는 또 뭔가. 해발 1000m가 되지 않는 낮은 산이라 이름의 혼동이 있는 것일까.
무장봉에서 무장사지를 거쳐 내려오는 길은 경사는 완만하나 단조롭고 멀었다. 중턱쯤에 '돼지풀 확산 방지를 위한 억새 식재지역'이 있다. 돼지풀은 자생식물의 서식지를 위협하고 알레르기성 비염과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귀화식물이다. 억새 식재는 돼지풀의 확산을 막고 무장봉의 경관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공원 지킴터를 2Km 남짓 앞둔, 암곡동 골짜기의 가파른 등성이에 설치된 데크 길을 따라가면 주춧돌 일부와 석등을 받쳤던 연화대좌가 남은 무장사 터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무장사는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아버지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세운 왕실의 원찰이라고 한다.
무장사 터에는 현재 아미타조상사적비(보물 125호)의 이수와 귀부가 남아 있다. 이 비는 제39대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1915년 주변에서 발견된 비석 파편에 새겨진 글로 이 비가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임이 밝혀지면서 이곳이 무장사 터라는 것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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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사 터 어귀의 데크 길. 아직도 푸른빛을 자랑하는 실한 나무들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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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사지 삼층석탑. 폐사지의 낡고 퇴락한 돌탑 등의 쇠잔한 모습이 연출하는 고즈넉한 정적은 쓸쓸하면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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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장사터 아래에서 만난 옅은 단풍.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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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비가 서 있는 평지 아래 산비탈에 삼층석탑(보물 126호)이 있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이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고 한다.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眼象)으로 미루어 볼 때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돌탑은 저물어가는 햇살 속에서 좀 외로워 보였다.
절터가 주는 느낌은 언제나 그렇듯 좀 각별하다. 외롭게 남은 주추, 깨어진 석등, 낡고 퇴락한 돌탑 등의 쇠잔한 모습이 연출하는 고즈넉한 정적 속에서 그 번성했던 시절의 풍경을 하나하나 재구성해 보는 것은 쓸쓸하면서도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불당과 불탑을 세우던 때, 사부대중의 가슴속에 뜨겁게 살아 있었던 소박한 불심과 서원(誓願)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투구 묻은 골짜기... 그러나 평화는 아직 멀기만 하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밝힌 무장사에 대한 전언은 사실관계에서 다소 어긋난다. 그는 태종무열왕(재위 645~661)이 이 골짜기에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고 쓰고 있지만 삼국을 통일한 군주는 그 아들인 문무왕(재위 661~681) 법민이기 때문이다. 100여 년 후에 원성왕(재위 785~798)의 아버지가 여기에 왕실의 원찰을 세우면서 선대 임금의 유지를 기려 '무장사'라 명명했다는 것인데, 전후의 맥락을 살피면 이 전언의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며 이 골짜기에 병기와 투구를 묻었다는 이가 무열왕이든 그 아들 문무왕이든 무슨 상관이랴. 전쟁과 살육의 시대를 넘어 평화와 공존의 시대를 추구하는 것은 시대를 넘어서 인류의 영원한 과제가 아닌가 말이다.
천 년도 전, 부처의 나라를 꿈꾸었던 고대국가조차 전쟁 없는 평화의 시대를 기약했건만 그 땅에 흘리고 묻은 피와 주검은 또 얼마였던가. 이어진 후삼국의 쟁패(爭霸)뿐이 아니다. 20세기의 중반, 이 땅에 휘몰아친 골육상잔의 전쟁은 여전히 끝을 맺지 못하면서 갈등과 대립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천 년도 전에 김춘추가, 아니 법민이 묻었다는 투구와 병기는 이 산골짝 어디에서 이미 흙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무장사지 앞의 벤치에서 잠깐 다리쉼을 하고 나서 우리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킴터가 가까워지면서 연도의 숲은 조금씩 물들어가는 듯했다. 계곡을 흐르는 물줄기 너머로 단풍나무의 빛깔도 어느덧 한결 선명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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