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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북, 단군을 왜 중요시하는가


북, 단군을 왜 중요시하는가 [친절한 통일씨] 단군릉 개건 20주년으로 본 북한 조정훈 기자 | whoony@tongil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10.12 00:26:18 트위터 페이스북 ▲ 단군릉 [사진출처-민족21] 10월 3일은 개천절이다. 개천절이 되면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노래를 부른다.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뜻을 지닌 개천절은 '개천절 노래'에서 보듯 우리의 뿌리를 되새기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개천절과 함께 기억되는 곳은 강화도 마니산이다. 단군이 마니산에서 제천의식을 봉행했다는 유래가 있어 해마다 개천절이 되면 당시 의미를 되새기는 행사를 연다. 하지만 종교적 의미로 바라본 단군은 언제부터인가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역사학계에서 단군은 설화적 의미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나 단군이 새롭게 조명받은 것은 다름아닌 북녘에서부터이다. 그리고 이는 종교적 의미가 아닌 민족적 개념으로 단군을 중요시 여겼다. 북한은 1993년 단군 유골 발견과 함께 1994년 10월 11일 평양 강동군 강동읍 서북쪽 대박산 기슭에 단군릉을 개건했다. 2014년은 단군릉 개건 20주년으로 개천절 남북공동행사가 9년만에 열리기도 했다. 사회주의, 주체사상으로 대표되는 북한은 왜 단군을 중요시 여기는가. 단군릉의 개건과 함께 북한에서 단군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자. 1993년 단군유해 발굴과 1994년 단군릉 개건 ▲ 단군릉 전경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1993년 10월 개천절을 앞두고 북한은 단군 유해 발굴 소식을 알렸다. 평양 강동지역에 발견된 단군릉은 고구려 양식의 돌칸 흙무덤으로, 주검칸의 크기가 동서로 273cm, 바닥에서 천장고임 1단까지의 높이는 160cm였다. 단군릉 안에서 남녀 한 쌍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금동띠 표쪽, 여러 개의 도기 조각, 관에 박았던 관못 등이 출토됐다. 남자의 유골은 골반뼈를 기초로 감정한 결과, 170cm의 키로 추정됐다. 북한은 해당 유골을 연대측정한 결과, 약 5천 11년 전 것으로 단군의 유골이 확실하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신화 속 인물이 실제 역사로 바뀐 순간이었다. ▲ 김일성 주석이 1993년 9월 단군릉 개건확장할 데 대하여를 발표했다.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이에 김일성 주석은 같은 해 10월 20일 단군릉 관계자들 앞에서 '단군릉 개건방향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김 주석은 "고고학자들이 단군릉을 발굴하고 거기에서 단군의 유골과 그의 아내의 유골을 찾아냈으며 단군의 유골이 지금으로부터 5,011년 전의 것이라는 것을 확증함으로써 단군이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고조선의 실재한 건국시조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판명되었다"면서 1994년 개천절까지 단군릉 개건을 지시했다. 약 1년만인 1994년 10월 11일에 개건된 단군릉은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자리잡았으며, 18층 건물에 해당하는 70m 높이에 아랫부분은 한 번이 50m, 높이는 22m인 9층의 계단식 무덤으로 1994년 준공된 것을 기념해 총 1994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형이다. ▲ 단군릉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 단군릉 네 모퉁이에 세워진 돌호랑이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단군릉 뒤쪽에는 무덤 입구가 있는데, 계단을 내려가 석실을 몇 번 꺽어 돌면, 석실 중앙에 두 개의 나무 관이 놓여져 있다. 여기에는 당시 발굴된 단군과 그 아내의 유골이 아르곤 가스가 채워진 밀폐 유리관 속에 보존되어 있다. 빛과 습기로 인한 손상을 막기 위해 나무관을 덧씌웠다. 단군릉에 오르기 위해서는 총 289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고, 계단 양쪽에는 선돌을 연상시키는 돌기둥이 좌우 5개씩 세워져 있다. 8명의 신하와 단군의 네 아들을 상징하는 상이 좌우 능을 지키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상돌, 분향료가 있고, 릉 네모서리에는 네 마리의 석범(돌 호랑이), 4개의 청동, 검탑과 두 개의 망두석, 석등이 있다. 단군릉을 둘러싼 진위논쟁 ▲ 1945년 해방직후의 단군릉(왼쪽)과 1993년 발굴 직전 단군릉 전경[사진출처-민족21] 당시 단군 유해 발굴과 단군릉 두고 남측 학계과 언론은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고고학계는 단군조선은 만주 농안, 장춘 지역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평양에 존재할 수 없으며, 우리나라 땅 지질상 2천 3백여 년전의 유골이 남아있기 힘들다면서 단군조선이 아닌 기자조선 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제기했다. 하지만 북한은 단군의 유골이 발굴 당시로부터 5,011년 동안 보존될 수 있던 것은 석회암 지대에 묻혀있었기 때문에 뼈가 삭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평양 일대에서 발굴된 황대성 유적은 해당 유골이 단군일 가능성을 높였다. 단군릉을 둘러싼 당시 남북간 학계의 논쟁은 1530년 '신중동국여지승람' 기록과 1936년 '단군릉 기적비' 등으로 일단락됐다. '신중동국여지승람'의 '강동현조' 고적란에는 "큰 무덤이 있다. 하나는 현의 서쪽 3리에 있는데 둘레가 410자나 된다.민간에서 단군묘라고 전한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북한이 1991년 작성한 '고장이름조사보고서'에는 강동읍에 있는 부락 '단군동'이 고장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고, '단군릉 주변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단군동이라고 부른다'는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86년(정조 10년)부터 단군릉을 국가적으로 보존하면서 제사를 지냈으며, 1945년 해방 전까지 제사를 지내왔다고 알려져 있다. 1926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향토예찬 내고을 명물'이란 코너에는 "우리 강동에는 단군릉의 고적이 있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터"라는 기사도 있다. 그리고 1931년 <동아일보> 사회부장이던 현진건은 '단군성적순례'라는 답사기를 연재, "동아일보 강동지국 총무 김중보씨의 인도로 강동에 도착.. 차옹을 울한 아달산이라 부르는 소봉을 돌고 단군전이라 동리와 제천골을 지점하며, 대박산릉에 이르니, 창창한 송림을 뒤로 두고, 경사 완만한 산록에 주위 410여 척의 일대릉이 뚜렷이 정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적었다. 1934년에는 일제가 파괴한 단군릉을 복원하기 위해 수축기성회를 조직, 먼저 능수축 수호각을 건립했다. ▲ 단군릉 기적비, 오른쪽이 발굴된 단군릉 기적비이고 왼쪽이 복원한 것이다.[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1936년 '단군릉 기적비'는 단군릉 실존을 더욱 명확하게 한다. 일제가 단군릉을 파괴하자 1932년 5월 강동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단군릉 수축기성회'(회장 김상준)가 조직됐다. <동아일보>는 대대적으로 '단군릉 수축기성회' 모금광고를 냈으며, 1935년부터 수축에 착공, 1936년 단군릉 보수공사를 마치고 '단군릉 기적비'를 세웠다. '단군릉 기적비' 전면에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경위와 단군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단군릉 수축 경위가 적혀 있으며, 좌우면에는 '단군릉 수축기성회' 회원 66명과 액수, 기부자 5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북, 단군을 통한 단일민족 강조 ▲ 단군릉 전경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북한은 단군릉을 발굴하고 개건하면서 단군을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을 강조한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나라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오랜 역사국이고 우리 민족이 생겨난 때로부터 하나의 핏줄을 이어온 단일민족"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은 처음부터 단군을 실존 인물로 보지 않았고, 단일민족의 뿌리로 인식하지 않았다. 1960년대 까지 백남운, 리지린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단군을 지배층이 만들어낸 신화적 인물로 봤으며, 특히 초기 계급사회 지배자로 치부했다. 그리고 계급사회의 단군사상보다 곰과 호랑이로 대표되는 토테미즘, 계급사회 이전 원시공동체사회의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형태로 바라봤다. 리지린은 단군신화를 3단계로 재해석, △씨족사회에서 곰.호랑이 씨족 토템이 생겼고,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적 수장으로서 '단군'이 등장했으며, △계급국가 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분석했다. 즉, 단군신화는 국조(國祖)로서 의미가 아닌 고조선의 통치계급들이 계급적 지배에 맞게 미화해 만들어 냈으며, 단군은 지배계급 발생단계의 국가지배자로 인식했다. ▲ 단군릉에서 출토된 나무관 복제품 [사진출처-우리민족끼리] 단군에 대한 인식은 1970년대 주체사관과 결합하면서 변화가 일었다. 북한 학계의 단군.고조선 관련 연구는 역사학 계열이 아닌 고고학 계열과 국문학 계열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주체사관과 결합됐다. 그리고 70년대 고고학적 발굴 성과로 '승리산사람', '만달사람' 등 인골이 발견되면서 '원시조' 개념이 대두됐고, "조선사람이 인종적으로 한 갈래에서 유래하여 하나의 핏줄을 줄기차게 이어온 인류학적으로 단일한 주민집단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논증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즉,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함께 단군과 관련한 문헌비판적 연구는 과학적 접근방식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단군은 주체적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해석을 낳았다. 이러한 단군에 대한 인식은 1993년 단군유해와 단군릉 발굴로 단군이 신화가 아닌 실존인물로 확인되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단군신화는 고조선 지배계급이 만들어 낸 통치수단의 하나였고, 주체사관과 결합하면서 민족 통합의 긍정적 문화를 가져온다는 비과학적 논리가 아닌 단군이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 단일민족의 의미로 확대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발굴 이후 북한은 단군을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며 우리나라에서 첫 노예소유자 국가를 세운 건국시조이다. 단군릉이 발굴되고 단군의 유골년대측정결과가 나옴으로 하여 신화적 인물로 전해져 내려오던 단군이 실제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단군은 지배계급 출신의 인물이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표한 군주였지만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 우리 민족의 첫 건국시조로서 우리 선조들을 국가시대 문명시대로 이끌어나가고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발전하게 하는 시초를 열어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를 민족의 원시조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단군이 실존인물로 확인되면서 단일민족의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한 셈이다. 여기에 더해 북한은 단군릉이 평양에 있다는 점을 부각, 박혁거세와 동명성왕과 비교하면서 "단일민족이라는 혈연적 동질성으로 더욱 친밀히 결합시키고 묶어 세울 수 있게 하며 이러한 민족적 감정은 오늘 해내외의 모든 조선동포를 민족대단결의 기치 아래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 추동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 민족끼리', '단군조선', 민족대단결' 등을 선점하는 계기가 됐다. 단군, 같은 민족의 뿌리 그리고 남북통일 ▲ 지난 3일 평양 단군릉에서 개천절 남북공동행사가 9년만에 열렸다.[자료사진-통일뉴스] 단군이 실존인물인가에 대한 논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군신화를 신화로 인식하고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단군릉의 주인이 실제 단군인가에 대한 논란에 앞서 단군릉은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단군이 평양이든 서울이든 어디에 도읍을 정했든 하나의 땅을 다스린 인물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분단의 역사는 오래전 하나의 땅을 다스렸던 단군을 바라보는 시각도 나눴다. 남북이 다른 민족이 아니고서야 뿌리가 다를까. 단군이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 논쟁에 파묻히기보다, 우리의 새암이 단군이라는 인식, 그리고 언젠가 다시 하나가 돼야 한다는 믿음. 그것이 오늘날 단군이 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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