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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0일 수요일

아들 둔 부모님들, '비극의 예약석'을 아십니까


군인 2.4일당 1명 사망... 국민에게 목놓아 울며 호소한다 14.09.11 10:21l최종 업데이트 14.09.11 10:21l고상만(rights11) 크게l 작게l 인쇄l URL줄이기 스크랩 38 26 9 메일 오블 기사 관련 사진 ▲ 고 강경대 열사 아버지 강민조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회장.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1994년 3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1990년에 함께 학생운동을 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동료의 4주기 추모 행사를 일주일째 진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첫째 날은 추모 공연을, 그 다음날은 추모 체육대회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짜 놓은 프로그램중 하나가 추모 강연이었다. 사회 유명 인사를 모시고 말씀을 듣는 행사였는데 어느 해에는 저명한 인권 운동가인 서준식 선생님을 모시기도 했고 또 어느 해에는 당시 막 출범한 전교조 선생님을 모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4주기가 되던 그 해에 모신 분이 91년 시위 도중 사망한 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의 아버지 강민조 님이었다. 여기서 강경대 학생에 대해 간략한 설명이 필요하겠다. 1991년 4월 26일, 서울 명지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유는 전날 경찰서로 연행된 자신의 총학생회장을 석방하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이날, 대학 1학년이었던 강경대 역시 처음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비극의 시작은 학생들이 교문을 나와 거리 시위에 돌입하면서부터였다. 무술 경관으로 구성된 사복 체포조가 숨어 있다가 갑자기 학생 시위대를 향해 돌진한 것이다. 이른바 '백골단'이라 불리는 무술 경찰이었다. 사건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돌진하는 백골단의 기세에 당황한 학생들의 대열이 일거에 무너졌고 학생들은 이내 무질서한 도주를 시작했다. 1학년이었던 강경대 역시 학교 담을 넘어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도망치던 강경대의 뒷덜미가 백골단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진 무자비한 폭력. 백골단은 진압 장비로 허용되지 않은 쇠파이프로 강경대의 온 몸을 내리쳤다. 그 마구잡이 폭력과 아우성 속에 강경대는 결국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강경대가 사망한 이 날, 그러니까 1991년 4월 26일 이후 정국은 다시 돌이켜 봐도 끔찍했다. 강경대가 사망한 그날부터 꼭 한 달이 되던 5월 25일까지 모두 11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끊었고, 또 죽임을 당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그때의 참혹함이 어떠했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숨진 11명중 9명은 강경대를 타살한 노태우 정권에게 퇴진하라며 분신 자결했다. 또한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 위원장과 시위 도중 성균관대 김귀정 학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들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의문사로 남아있다. 한편 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이한 노태우 정권은 필사적인 탈출구를 찾았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유서대필 사건'의 조작이었다. 91년 5월 8일 서강대학교에서 분신자결한 김기설의 유서를 그의 운동권 동료인 강기훈이 대신 써 줬다는 황당한 설정이었다. 처음엔 이 말도 안 되는 억지가 끝까지 가리라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조작된 억지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그후 23년간을 버텼다. 다행히 지난 2014년 2월, 우여곡절 끝에 유서대필은 조작이었음이 재심을 통해 밝혀졌고 유서 대필범으로 징역을 살았던 강기훈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부도덕한 검찰의 상고로 대법원에 계류되어 완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정의를 지키려는 양심보다 거짓을 지키려는 이기심이 더 앞서는 검찰의 추악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기사 관련 사진 ▲ 한겨레신문 기사 왼쪽은 한겨레신문 4월 26일 강경대 치사사건 1면 보도, 오른쪽은 5월 31일, 김귀정 사망사고 이후 경찰의 강경진압을 풍자한 박재동 만화 ⓒ 한겨레신문 관련사진보기 돈을 줄 테니... 노태우 정권의 회유 그리고 또 하나의 위기 정국 탈출 방법으로 노태우 정권이 선택한 방법은 강경대의 유족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강경대의 타살로 빚어진 정국이니 그 유족이 재야 및 학생 운동권에게 "우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한마디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여긴 듯하다. 그래서 그들이 유족에게 제안한 것은 바로 '돈'이었다. 강경대의 아버지 강민조님의 증언에 의하면 아들이 죽고난 후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은밀히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처음엔 2억 원을 줄 테니 그만 정리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 어처구니없는 뻔뻔함에 정중히 거절한 후 돌려 보내자 얼마 있어 다시 두 번째 방문이 있었다. 이번엔 10억 원이었다고 한다. 인내심을 갖고 응대했던 아버지가 폭발한 날이 그날이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청와대 고위 관계자를 쏘아보며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내 눈을 똑바로 보시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노태우 대통령에게 한자도 빼 놓지 말고 전해 주시오. 나도 사업하는 사람이라서 돈은 남 부럽지않게 있습니다. 그동안 나를 찾아와 사과가 아닌 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치욕스러웠지만 그래도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생각해서 지금까지 참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안 되겠군요. 가서 노태우씨에게 전하십시오. 돈 받고 자식 팔아 먹는 부모도 있냐고. 노태우씨는 그런지 몰라도 전 그렇게 못합니다. 만약 노태우씨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좋습니다. 제가 거꾸로 돈 10억 원을 줄 테니 대신 당신 자식을 저에게 내 놓으라고 하십시오. 가서 분명하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추모 강연에 모시고 싶었다. 그렇게 열린 추모 강연에서 아버지의 기세는 역시 남달랐다. 불의한 권력에 자식을 빼앗긴 아픔과 독재 권력에 대한 분노로 강연은 내내 뜨거웠다. 그렇게 약 2시간여에 걸친 강연이 끝나갈 때 즈음이었다. 분노하던 아버지가 하신 마지막 고백이었다. "돌이켜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엔 노태우 살인 정권이 내 아들을 죽였다고 믿었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우리 아들 경대를 죽인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뜬금없는 아버지의 결론에 강연을 듣던 이들은 깜짝 놀랐다. 무슨 뜻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사실 저는 4.19 혁명이 일어날 때 군인이었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하라는 시위대를 보며 당장 저들을 총으로 쏴서라도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어 박정희가 5. 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는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87년 6월 항쟁 때는 나라가 망할까 싶어 또 시위대에 분노했습니다. 그런 나의 무지, 그리고 불의를 보면서도 무관심하고 방관했던 내 태도가 결국 내 아들 경대를 죽인 것입니다. 만약 내가 4.19 혁명때 침묵하지 않았고, 또 87년 6월 항쟁때 함께 참여하여 저 잔악한 전두환, 노태우 군사 쿠데타 세력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내 아들 경대가 결국 저 노태우 독재권력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저는 이제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전국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또 다른 내 아들 경대가 죽지 않도록 싸울 것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저처럼 자식을 잃고서야 깨닫지 마시고 지금 분노하십시오. 내 아들을 잃고서야 이런 각오를 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함께 합시다." 군인 4일에 한 명 꼴 자살, 이대로 정말 좋은가 지난해부터 나는 국회 김광진 의원실에서 의무복무중 사망한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입법 노력을 해 왔다. "국방위원으로 일하는 동안 의무복무 중 사망한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제대로 일해보고 싶다"며 "그 일을 함께 할 의사가 없냐"는 제안을 받고 함께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난 2013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6차례의 크고 작은 군 인권 관련 토론회와 행사를 추진해 왔다. 그중 내 기억속에 가장 크게 남은 행사는 2013년 5월, 전국에서 모여든 200여 명의 군 유족과 가진 유족 호소 대회였다. 아마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일 듯 싶다. 이제 막 아들을 잃은 50대 초반의 어머니부터 만 30년 전 아들을 잃고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꼬부랑 할아버지까지 제 각각 먼저 간 아들의 영정을 품에 안고 국회 강당으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호소하며 울었고, 절규했으며, 아파했다. '나는 군대에 자식을 보낸 죄인입니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 날 행사에서 유족들은 이렇게 항변했다. '데려갈 땐 조국의 자식이라고 하더니 영문도 모른 채 죽고 나니 못난 네 자식이라며 핍박하는' 이 나라와 국방부가 억울하다고 했다. 그중엔 조용히 장례만 치르면 순직 처리해 준다는 군 지휘관의 말에 속아 화장을 했다며 우는 아버지도 있었다. 기사 관련 사진 ▲ "군대 간 아들 왜 죽었나요" 자식을 잃은 '군 의문사' 유족들이 2013년 5월 24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군 의문사 유족이 외치는 대 국회, 국민 호소대회'에서 아들의 영정을 들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며 흐느끼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또 하나의 아픈 기억은 십수년 째 군 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아들을 보관 중인 한 어머니의 사연이었다. 그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 그 어머니의 답변이었다.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그 추운 냉동고에 넣어두고 사는 제 맘을 누가 알까요. 제 자식을 거기에 두고 저만 따뜻한 방에 잘 수 없어 그날 이후 지금까지 불 한번 때지 않고 십 수년째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장례를 치룰 수 없는 진짜 이유가 있습니다. 전 제 아들이 자살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저를 두고 그 아들이 자살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군사 기밀이라며 군 부대에서 자료도 주지 않아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제 자식의 억울한 타살 의혹을 나중에라도 밝히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가진 유일한 타살 증거는 제 자식 시신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들을 장례 치를 수 없는 겁니다. 못합니다. 억울해서 못하고 내 아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전 장례를 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설움에 복 받쳐 엉엉 우는 그 어머니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가만히 안아 드리는 것이었다. 저 비어있는 좌석은 누구 자리일까? 그렇게 한 분 한 분의 사연을 들으며 행사가 마무리 되어 갈 때 즈음 나는 유족들이 앉아 있던 좌석을 둘러 봤다. 많은 유족이 왔지만 그중 더러 더러 빈 몇 자리가 보였다. 120석의 대강당이니 그중 몇 자리는 비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중 빈 자리 하나를 가리키며 유족에게 물었다.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던 의자중에서 몇 자리가 비어있잖아요? 저 빈 자리는 누구의 자리일까요? 혹시 아시겠어요?" 갑자기 뜬금없는 내 질문에 군 유족들이 서로를 둘러보며 웅성거렸다. 나는 다시 마이크를 잡아 당기며 말을 이어갔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까지는 여러분이 군에서 자식을 잃고 우는 피해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울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해 주십시오.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1948년 군 창설 이래 지난 66년간 자살 등으로 처리되어 아무런 예우없이 죽어간 군인은 모두 3만1천여 명입니다. 이 숫자를 군 창설 이래 지난 66년간으로 나눠 보면 한해 평균 575명의 군인이 자살로 처리된 것입니다. 또 이를 일일 평균으로 환산하면 이틀에 세 명 꼴로 군인이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군인이 죽어가고 있음을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줄어서 지난 2012년의 경우 147명이 사망했고 이는 평균 2.4일당 1명씩 군인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 빈자리는 그냥 빈자리가 아닙니다. 통계상 오늘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3일이 지나면 누군가 죽게될 그 군인의 유족이 앉아서 울 자리인 것입니다. 저 비극의 예약석을 그냥 두겠습니까? 우리가 막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합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지금 내가 그 피해자가 아니라고 외면해 온 그 방관이 언젠가 내가 앉을 자리가 될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나서서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의무복무 중 사망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피해자인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지만 결코 이 일은 우리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막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약속합시다. 오늘부터 시작합시다. 의무복무중 사망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끝까지 함께 싸워 나갈 것을 함께 약속합시다. 그래야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기사 관련 사진 ▲ 가족 품에 안긴 군 의문사 장병들의 영정 2013년 9월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군 사망사고 명예회복 법안 제정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이 열린 가운데 의무복무 사망 군인 유가족협의회 회원들이 자신의 자녀인 군 의문사 장병들의 영정을 들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의무복무 중 사망 군인 명예회복, 함께 해달라 의무복무 중 사망한 군인은 기본적으로 순직처리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해줘야 한다. 의무복무를 위해 입대한 순간부터 이미 군인은 신성한 병역의 의무에 충실히 응한 것이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더 이상 아들을 잃은 부모에게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한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 왜 억울한 죽음인지 사실상 그 부모가 입증하지 못하면 순직 처리를 해 주지 않는 지금의 잘못된 제도는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만약 이를 바꿀 수 없다면 대한민국은 차라리 더 이상 징병제를 하지 말아야 한다. 추석을 앞둔 9월 6일, 또 다시 속초지역 8군단 소속 송아무개(21) 일병이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되었다. 군은 또 스스로 목을 매었으니 자살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부모는 정말 목을 맸다 해도 왜 맸는지 그 이유를 밝혀달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그러면 군은 다시 '가정적 요인'을 찾아내 그것 때문에 비관 자살했다는 식의 결론을 내릴 지도 모른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군 사망사고의 전형적 모델이다. 이 야만적 도돌이표는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가. 나는 정말 건강한 상식을 가진 우리 국민 모두에게 목 놓아 호소한다. 의무복무중 사망한 군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도와달라. 그것이 결국 우리 귀한 아들을 잃고 억울하다며 울부짖는 또 다른 군 사망사고 유족이 되지 않는 확실한 길이다. 함께 해 달라. 부디 꼭 함께 해 달라. 덧붙이는 글 | 고상만 기자는 지난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이후 지금까지 군 사망사고와 관련한 일을 해 왔습니다. 지금은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김광진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며 '의무복무중 사망 군인의 명예회복' 관련 법안 제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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